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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 의림지

작은천국 2008. 1. 22. 15:19

■ 제천 의림지는

1976년 지방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어 내려오던 의림지는 2006.12월 국가명승지 제20호 로 지정되었다.

많은 기록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김제-벽골제(碧骨提 : 사적 111), 밀양-수산제(지방기념물 102)와 함께 우리나라 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인 저수지로 축조되었다.

김제의 벽골제 와 밀양의 수산제 는 모두 제방을 뜻하는 언덕제()를 사용하고 있으나 제천  의림지는 저수지를 뜻하는 연못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상주 공검지(경북기념물121),의성  대제지 등 삼한시대 에는 전국에 20여개의 저수지가 축조 되었으나 모두 전해지고 있지 아니하며 의림지는 원형이 잘 보존된 형태로 남아있다.

용두산 골짜기 에서 흘러내린 물은 의림지에 가두고 흙과 모래는 서쪽의 용추폭포를 통하여 홍류동(洪流洞)쪽으로 내�b는 뛰어난 얼개를 가지고 있으며 진섭헌(), 임소정(臨沼亭).

호월정(湖月亭). 청폭정(廳瀑亭). 우륵대(于勒臺) 등의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고 전해 지고 있으나 지금은 영호정 과 경호루 만 남아 있다.

일제시대에 수문을 다시 고쳤으며 1972년 홍수로 둑이 터져 다음해에 복구하였고,  2차에 걸쳐 의림지 명소화 공사를 시행하여 1차년도(2005)에는 29 5천만원을 들여 용추폭포의 고무댐을 유압식으로 교체하고 용터 에서 약수터에 이르는160m 도로정비와 인공폭포, 수경분수, 교량2개소, 조명시설, 140여개의 친환경적 체험의 장과 관광,휴식의 최적지로 조성하였다.

2차 사업인 2006.11~ 2007.12월까지 에는 22억을 투자하여 휴게지. 수변테크, 목교가설, 성곽돌쌓기 .수목정비 등의 시설을 정비하여 명실공히 국가명승 의 자취를 다듬고 있다.

 

1. 의림지 명칭

[한국지명총람]에는 신라때 의림이라 하였으며, [경호루기]에서는 신라때 박후의림 이라 불렸다 전해지고 있으며 원래 임지 라 하였는데 고려 992(성종11)에 군현(郡縣)의 이름을 개칭할 때 제천의 지명을 의원현(義原縣), 또는 의천(義泉)이라 한것에서 유래하여 자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삼국사기] : 지금의 이름은 식주(湜州)이다, ( : 물맑을 식 저수의 뜻)

            992년에 별호인 의천(義泉) 과 의원(義原)에서 의림지의 명칭이 태동하였다,

            의천 : 용출한 샘이 주민에게 혜택이 두루 미치는 것

            의원 : 관개수의 원류인 제방을 내포 는 것

 

2. 의림지 축조설

신라 진흥왕때(540~575)에 가야금의 대가 우륵이 해발 871m의 용두산 골짜기에 뚝을 막은  것이 시초이며 700년후 제천현감 [박의림] 4개 군민을 동원하여 저수지 주변을 3단의 석축으로 쌓고  물이 새는 것을 막았으며 배수구의 수문은 수백관의 돌을 네모나게 다듬어 여러 층으로 쌓아올려 수문 기둥을 삼았는데 돌의 바닥에는 [박의림] 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또한 수구(水口)를 옹기로 축조한 흔적이 발견되어 삼한시대 농업기술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청인터넷] : 신라 신흥왕때 악성 우륵이 시축하고 700년뒤 현감 박의림이 축조한 것으로 기록

이병도(1896~1987)

삼한시대 축조를 정설로 수용하며 축조 연대는 최대 약 1140년 서기 229년 으로 추정(김제의 벽골제는 330년 으로 추정)

 

3. 의림지 관련 기록

[택리지]

의림지는 신라로부터 대제(大提)를 쌓고 물을 막아 한고을의 논에 관계하였다 는 신라의 신축설을 기록하였으나 제천권역에는 청동기시대 농경문화 상징인 지석묘와 하천변의 선돌이 대거분포 하여 기원전 오곡재배가 입증되므로 삼한시대 수경농업의 시원으로 추정된다.

고려 장수왕(475)때 남진하여 백제의 남한강유역을 점령 70여년간 통치할 때  제방을 뜻하는 내토군(奈吐郡)이라는 고을명을 명명하여 백제시대 수경농업 발 전을 유추할수 있다

삼국의 변방에 위치한 내토군은 668년 신라의 점령으로 읍호를 계승하였으나 경덕왕 16(757)에 내제군(奈提郡)으로 고치면서 청풍현, 적산현(단양)을 속현으로 삼은 것은 수경농업의 발전으로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중심지로 짐작된다.

고려 태조23(940)에는 제주군(提州郡)으로 개명,

* (고을주) : 냇물이 흐르는 하천과 제방을 읍호로 명명

 

[세종실록 지리지]

“  제천현은 415호에 1235명 이다.대제는 하나요 현의 북쪽에 있는데 의림지 라고 한다. 길이는 530척이며 논 4백결에 물을 댄다 라고 하여 저수량은 전고을 농경지에 관개혜택이 미침을 뜻한다,(그때 당시의 논이 559결 인 것을 볼 때 77.6%에 혜택이 미친것으로 ,일반적인 경우 17% 수준인것에 비하여 대단한 것이다)

530 : 31.6cm로 환산시167.5m로 둘레를 환산한 것이 아니며 한변의 길이로 유추할 때 2,120(700둘레)에 저수하여 총400(400hr)의 논에 관개한 셈이다

 

4. 의림지 전설

옛날 의림지가 생기기 전에 이곳에 부자집이 있었다. 하루는 이집에 스님이 찾아와 시주할 것을 청하였다. 그런데 이집 주인은 탐욕스러울 뿐 아니라 심술도 또한 사나왔다. 한동안 아무 대꾸도 없으면 스님이 가버리려니 했는데 탁발스님은 가지않고 목탁만 두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심술이난 집주인은 거름 두엄에 가서 거름을 한 삽 퍼다가 스님에게 주었다.

스님은 그것을 바랑에 받아 넣고 선 머리를 한 번 조아리더니 발길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집안에서 보고 있던 며느리는 얼른 쌀독에 가서 쌀을 한바가지 퍼다가 스님을 뒤쫓아가  . 스님에게 주며 시아버지의 잘못을 빌었다. 스님은 그것을 받더니 며느리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조금 있으면 천둥과 비바람이 칠터이니 그러면 빨리 산속으로 피하되 절대로 뒤돌아 보면 안된다고 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며느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집안에서는 집주인이 하인을 불러 놓고 쌀독의 쌀이 독이났으니 누구의 소행인지 대라고 호통을 치고 있는 것이 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자기가 스님이 하도 딱해 퍼다 주었다고 아뢰었다.

시아버지는 크게 노하며 며느리를 뒷광에 가두더니 문에 자물쇠를 채워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해 버렸다. 런데 갑자기 번개와 천둥이 울리고 세찬 바람과 함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광속에서 안절부절 못하는데 더 요란하게 번개가 번쩍하고 천둥이 치더니 잠겼던 광문이 덜컹열렸다. 며느리는 탁발승의 말이 생각나 얼른 광속을 빠져나와 동북쪽 산골짜기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얼마쯤 달려가던 며느리는 집에 남아 있는 아이들이 생각이 나서 뒤돌아 보지 말라던 스님의 말을 잊고집이 있는 쪽을 뒤돌아 보았다. 그 순간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더니 며느리의 몸은 돌로 변해갔으며 집이 있던  지리는 땅속 으로 꺼져서 온통 물이 괴고 말았다. 물이 고인 집터가 의림지이며 며느리가 변해서 돌이 된 바위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제비바위(연자암)근처 어디엔가 서 있다는 것이었다.

 

▼ 의림지 모습

 

 

▼ 미동도 없이 숨죽이고 있는 겨울철새들... 아마도 자고 있는 중인듯..

 

 

▼ 의림지의 소나무는 200~300년 수령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소나무로 의림지 제방을 따라

   노송이 어우러져 자라고 있다.

 

▼ 의림지를 따라 산책할 수 있도록 목교가 설치되어 있다.

 

▼ 의림지 주변을 제방처럼 쌓아놓았다... 池는 꽁꽁 얼었다..

 

▼ 특이하게 생긴 소나무.. 거의 쓰러져 갈듯보이는데 버팀목으로 붙여놓아다..

   사진은 정면에 우뚝 서 있는것처럼 보이는데 실지로보면 거의 45도 이상 누워있다.

 

▼ 호수는 꽁꽁 녹았다 얼었다 반복하면서 묘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 어디든 유원지에 가면 그림을 그려주시는 분들이 꼭 있는듯...

 

▼ 수변로 입구에 있는 솟대..

 

▼ 솟대: 고조선시대로 우리 인간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하늘을 향한 희망의 매개물로 세워 온 솟대는

   삼한시대에는 소도에 세워 인간의 소망을 기원하는 천제를 지냈으며 마음의 안녕과 풍요의 상징으로

    또한 훌륭한 인물이 나왔을때 기념비적으로 세우기도 하였다.

    의림지를 찾은 모든 이들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2005년 3월 능강솟대문화공간 조각가

    윤영호. 윤태승 공동 제작으로 기러기를 조형물로 한 청동솟대를 이곳에 세웠다.

 

▼  건너편에는 인공으로 폭포를 조성해 놓았다.. 겨울이라 휑하지만 여름에는 정말 장관일듯..

 

 

▼  수변로 목책 산책로

 

▼  오래된 목조 다리처럼 느껴진다..

 

▼  며칠전 내린 눈으로 인해 멋진광경이 연출되고 있다.

 

 

 

 

▼ 폭포안에서 바라보니..

 

▼  산책중인 시민들.

 

▼  산책로를 따라 한바퀴 돌아보는데도 꽤 시간이 걸린다.

 

▼  꽁꽁 언 호수위로 눈썰매를 타고 있는 사람들.. 아버지는 힘들고 아이들은 신나고..

 

▼  이런 겨울풍경도 좀 있으면 보기 힘들겠지..

 

▼ 산책로가 끝나는 즈음..

 

 

▼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헉~~~ 엄청난 높이다..  

 

▼  그저 산책로를 따라 걸어 올때는 그냥 평지를 걷고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높은 경사진 길이었다니...

 

 

♣ 제천이란 곳은 참 궁금한 곳이었다. 어릴적 고향친구의 고향이 제천이라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는

   나는 서울이란곳보다 제천이란 낯선 곳에 대해 언제나 어떤곳일지 궁금했었다. 그리고 국사시간에

  우리나라 3대 저수지 중 하나로 '의림지'가 등장했을때도 역시나 제천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늘

  궁금했었다. 또한 근처에 있는 '배론성지'는 나의 종교와도 관련이 있어 언젠가 한번은 그냥 훌쩍

  이라도 다녀오고 싶은 곳이었나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제천을 아예 고려하지 않았기에 당일

  바로 제천으로 방향을 바꾸면서도 문득 오랜시절 헤어진 그 친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졌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바로 도착한 의림지... 간간이 비가 내리고 있다..  

  겨울 호수는 생각만으로도 황량한 느낌이 묻어나는 곳인데 제천시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흔적

  덕분으로 굳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이 한가한 휴일오후를 보내고 있다.

  의림지를 따라 한바퀴를 크게 돌아볼 수도 있고 또 옆으로 난 수변로를 따라 산책을 할 수 도 있다.

  목조 산책로를 따라 걸었기에 의림지의 문화재인 경호루와 영호정을 보지 못해 좀 아쉬운 생각이

  든다. 또한 의림지에 좀 더 자세히 알아보던 중 예전에 들었던 위에 전설이 의림지와 관련된 곳이란

  새로운 사실, 혹은 잊어버리고 있던 사실에 대해 다시 한번 일깨운다.

  삼한시대에 이곳이 엄청난 수리시설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제천은 농경사회에선 최적의 주거지였지

  않을까 싶은 생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지만 개념이 잘 안 잡힌다. 

  늘 그러하지만 이곳도 나름 아쉽운 점을 꼽자면 별로 어울리지 않는 미니 놀이공원이 있다..

  왜 꼭 이런시설물들이 들어서는지.. 이런 놀이시설물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올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시설물보다는 의림지와 더 어울리는 공원이나 산책로등을 더 길게

  조성해 놓는다면 더 좋을듯하다...

  시내에서 이렇게 큰 호수(이젠 호수로 부르는게 더 제격이겠다)가 가까이 있다는것은 참 부러운

  생각이다. 여유만 된다면 이른 새벽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를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물안개..... 피어나는 물안개를 끼고 수변산책로를 따라 걷는 그 기분은

  자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연이 주는 최대의 선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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