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o Yong Pil/YPC history

제13집<세종 '꿈'> 제7부 울음 끝에서 슬픔이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작은천국 2007. 9. 7. 12:05
 
[슬픈 사람이 울고 있을 때 우리는 따라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의 슬픔이 나의 슬픔과 다르기 때문이다.
숭고한 일을 하는 사람을 볼 때 그는 울지 않으나 우리는 운다. 왜냐하면 그의 안에 들어 있는 숭고함이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중에서 공지영]
 
1993년도 당시에는 최고의 음반불황을 겪고 있었다. 그런 중에 신승훈의 ‘널 사랑하니까’ 서태지의 ‘하여가’ 김건모의 ‘핑계’가 속한 앨범들이 각각 백만 장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운다. 이 놀라운 기록 이면에는 10대 소년소녀들이 확고한 음반 구매층으로 자리했다는 본질을 파악 할 수 있다. 이후 그야말로 10대들의 세상을 겨냥하듯 많은 기획사들이 엔터테이너적인 부문에 초점을 둔 댄스가수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1993년도 어느 일간지 설문조사에 이르면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 1위는 서태지로 선정된다. 이 설문에선 조용필은 그 어느 곳에도 순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조용필과 서태지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이치에 전혀 맞지 않다. 80년대 조용필. 90년대 서태지 역시 정의할 수 없음도 명백하다. 40여 년간 꾸준히 주류의 정상에서 활동해 온 조용필과 90년 초중반의 활동영역으로 국한된 표현을  할 수 밖에 없는 서태지의 상황을 인식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넓게 생각한다면 공통점은 발견 할 수 있다. 고교 졸업 후 음악을 위해 가출을 택한 조용필과 고교 중퇴를 하며 가출한 서태지에게서 당시 그들을 보아왔던 주변인들의 공통적인 한 부분은 미8군 무대에서 시나위시절에서 기타리스트로서 베이시스트로서 엄청난 연습벌레였다는 부분이 있고, 음악영역은 다르지만, 다양한 장르를 소화했지만 개척에 가까운 장르를 통해 한국대중음악사상 주류를 바꿔 논 조용필. 랩을 처음 시도한 한국 가수는 아니지만 랩을 통하여 한국대중음악사에 장르변화를 개척한 서태지. 한국대중음악사에서 발전된 변화를 확연하게 보여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주류변화를 깨하고 최고선상에 서면서 많은 가수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던 두 뮤지션에겐 많은 가수들이 그들의 음악성을 인정하고 부러워했고 존경심을 표현했다. 그러나 큰 차이가 나타났다. 수많은 그룹과 가수들이 서태지를 모방하거나 그 분야를 따라서 같이 갈려고 했지만, 조용필에겐 전무하다. 여기에서 아티스트적인 부분과 엔터테이너적인 부분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조용필과 서태지의 음악성과 능력을 가늠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알게 할 것이다.
과연  조용필을 어떻게 무엇으로 모방하겠는가?

랩 댄스음악이 방송3사를 지배하던 1993년 조용필은 음악인생 25주년을 맞이한다.
그리고 여전히 엔터테이너적인 부분을 배제한 채 음악만으로 승부하는 콘서트에 심혈을 기울인다.
바로 세종문회회관 무대에 처음으로 록밴드를 올리기 위한 준비를 한다.
세종무대 선험자인 이미자 패티김 하춘하의 무대는 모두 오케스트라가 협연했다.
 
서울시와 조선일보의 협찬에 의해 성사된 25주년 공연을 위해 조용필은 당대 최고의 드러머였던 김희연을 필두로 하여 한정호, 최희선, 이태윤, 최태완, 으로 이어지는 라인업을 구축하여 5주간에 걸쳐 서울 모처에서 자정 넘겨가며 연습에 몰두한다.
 
93년 10월 5일 6일 양일공연에 앞서 조용필은 양일 공연 다르게 레퍼토리를 구상 할 것이며 특히 마지막 날은 관객들이 원하는 만큼 앙코르에 응하겠다고 공언했다.
 
40여곡의 레퍼토리를 준비한 조용필은 공연 첫날 공연에 앞서 마지막 총리허설을 준비한다. 이 때 당시 최고인기스타였던 서태지가 대기실로 방문했다. 시대적으로 보나 두 스타의 위치를 봐도 커다란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이었고 모든 언론매체는 이를 이슈화하기 위해 온갖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나 조용필은 두 사람의 만남을 조선일보를 통해 ‘오버 더 레코드’전제로 할 것을 지시한다. 수많은 기자들이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조용필은 완고하게 거절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을 취재했던 모든 기자들은 조선일보의 횡포에 분노하고 이 큰 기사거리는 일간지에는 실리지도 못하고 한 달이 지난 후 월간지에 큰 내용이 없이 기사화 되었을 뿐이다.
 
서태지에게 대단하다며 격려했던 조용필이 자신에게 존경을 표현하며 배우려는 자세로 임한 서태지에게 냉담했던 것은 쓸데없는 것에 이슈화되고 싶지 않다. 고 냉정히 판단한 것이다.
 
이는 창간 2주년을 맞이한 ‘TV저널’ 93년 10월 8일 인터뷰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언론의 지나친 횡포에 염증을 느낀 조용필의 심정이 나타난다.
‘전 허구한 날 당하고만 살았어요. 환멸감을 느낄 때가 많았지요. 예전에 어느 기자가 이런 얘기 하더군요. 연/예부 기자가되려면 먼저 저에 대한 스캔들을 한 가지 터트려야 한다고요’
 
당시 일간스포츠. 스포츠조선. 스포츠서울을 비롯한 일간지들은 판매부수에 대한 지나친 경쟁으로 헤드라이너를 장식하기 위해 온갖 선정적인 것에 치중하던 시기였다. 옐로우저널리즘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경쟁처럼 보였다. 연예인 두 명 함께 사진 찍고 바로 다음날 스캔들기사로 만드는 예도 종종이었다.
 
요요기획 직원 1명만의 보호 속에 모자를 푹 눌러쓴 서태지는 2시간 이상의 리허설을 객석에서 감상했다.
 
공연 둘째 날 약속대로 관객들의 끊임없는 앙코르에 답하기 위해 벅찬 감동을 표현하며 노래를 했고. 예닐곱 번째 앙코르무대에 오른 후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서 이상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눈이 촉촉이 젖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마지막 앙코르에서 처음엔 조그맣던 울음이 점점커지고 종국엔 어깨를 들썩일 만큼 커진다.
 
문제의 이 장면을 조용필의 마니아들이라면 기억하고. 많은 대중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눈물의 의미를 헤아릴 수 없다. 공연 후 조용필 자신도 눈물의 의미를 언어로 표현한 적은 있지만 필자가 느끼기엔 크게 동감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숭고했던 그 눈물의 의미를 찾아 숭고한 아티스트의 내면에 접근한다는 것은 큰 결례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꿈’은 너무나 많은 감성과 느낌을 만들어주기에 표현할 수 있는 것들도 많다. 그러나 두 가지의 큰 틀을 지닌 곡임은 직시해야 한다. 서구적이면서도 질 좋은 사운드와 세련된 리듬을 지니고 있음에도 한국적인 멜로디를 접목시키고 있고, 조화가 되면서도 양분화 되어 나타나는 점이 청자들을 크게 매료시킨다. 즉 화려한 도시가 배경임에도 그 도시에서 서성이는 농촌의 젊은이를 느끼게 하는데 농촌젊은이의 외형이 아닌 내면이 그려지기에 이 음악은 뛰어나고 대단하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가주는 분위기와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를 구분된 다른 느낌을 찾는 것은 이 곡의 위대함을 찾는 첫걸음에 불과하다.
 
화성이란 작은 농촌마을에서 세계적인 음악인들의 음악을 들으며 세계적인 밴드가 되겠다고 밤하늘의 별에게 고백을 했을 조용필은 보컬로 전향하고서도 그 꿈을 잃지 않는다.
한국의 슈퍼스타는 일본으로 향했고, 완벽한 성공을 한 후 10집 음반 시점에서 영어권 진출을 준비했음을 느끼게 한다. 12집 시점에서 어느 정도 물밑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13집 음반은 숨겨져 있던 조용필의 꿈이 확연하게 공개된 느낌이다.
 
‘슬퍼질 땐 차라리 나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미처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독한 황제는 완주를 잠시 멈추고 뛰어난 기타 반주를 들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을 잡아 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건지, 의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건지 모를 일이나, 스탠더드 마이크를 끌어 앉듯이, 안기듯이 마이크에 얼굴을 기댄다.
 
저렇게도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도통 모를 관객들도 의미조차 알 수 없는 눈물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
 
[슬픈 사람이 울고 있을 때 우리는 따라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의 슬픔이 나의 슬픔과 다르기 때문이다.
숭고한 일을 하는 사람을 볼 때 그는 울지 않으나 우리는 운다. 왜냐하면 그의 안에 들어 있는 숭고함이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
 
계속되는 눈물과 함께 그의 완주는 계속된다.
 
‘저기 저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숭고한 눈물만큼이나 저별의 마음도 조용필의 꿈도 헤아릴 수는 없다.

한국 그리고 일본의 정상에 섰던 조용필이지만,
영어를 쓰는 언어제국주의 무대에선 극동의 작은 언어를 지닌 것에 불과했고, 영어를 못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게도 생각 안할 그곳에서 어쩌면 털썩 주저앉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PS : 난삽한 글재주임을 잘 알면서도, 뻔뻔하게도 길게 글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13집이란 무게감도 그랬지만 공유라는 이유만으로 이해해준 조용필 마니아 분들의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많이 부족한 것임에도 공유해준 여러분들께 무엇으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기꺼이 후원모금에 동참하는 것으로 필자의  감사를 대신 하려고 합니다.

ps2 :제목으로 사용한 ' 울음 끝에서 슬픔이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는  신현림의 자화상 중에서 인용한 것이며  바로 에필로그를 통해 자료출처등을 밝혀 드리겠습니다.

 

 

♣ 조용필 팬클럽 '위대한 탄생' 에서 아이디 ms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