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s like traveling/Gyeonggi

[남양주] 역사의 마지막 한페이지 홍.유릉

작은천국 2007. 4. 5. 18:01
여행지
[경기] 남양주 홍.유릉
여행기간
2007.3.31
나의 평가
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
나의 여행 스토리

홍릉 : 사적 제 207호로 홍릉은 고종황제와 그의 비 명성황후 민씨가 묻힌곳이다. 고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창덕궁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후 처음 10년간은 흥선대원군이 섭정하였다. 고종은 장성하면서 흥선대원군과 대립하다 1873년(고종10년)에 친정을 선포하였다.  고종은 재위기간동안 청.일.러의 각축속에서 일련의개화시책을 실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제를 개혁하고 젊은 개화파로 구성된 신사유람단과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학습케 하였으며 1897년에는 자주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 근대 자주 국가를 이루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907년 을사조약 무효를 세계에 알리고자 네들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실패하고 이를 빌미로 이완용 송병준등 친일 매국대신들과 알제에 의해 그해 7월20일 강제 퇴위당하였다. 그 뒤 1919년 1월21일 덕수궁에서 승하하였다.

명성화후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1866년 왕비로 책봉되었고 1874년 고종황제의 뒤를 이은 순종황제를 낳았다.. 고종의 친정 이후 명성황후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임오군란(1892) 이후에는 일제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친정. 친러정책을 펴서 정치적인 기반을 다지려고 하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공사가 보낸 일본 자객에 의해 1895년 10월8일 경복궁 건천궁에서 살해 당하였다. 명성왕후는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처음 안장되었던 청량리에서 홍릉으로 옮겨 묻히었다. 홍릉은 합장릉으로 병풍석과 난간석이 화려하게 봉분을 감싸고 있으며 봉분 앞에는 상석 장명등 망주석 등이 있다. 침전은 정(丁)자 모야을 한 정자각 대신에 일자형 건물로 신위를 봉안한 제전인데 역대 왕릉과는 달리 중국 황제의 능제를 따라 조성하였다. 특히 홍살문에서 침전까지의 길에 나란히 선 석물로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등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문인석, 무인석과 석수들이 모두 침전 앞으로 나가서 배치되어 침전의 웅장함에 비해 단촐해 보인다.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신문과 수라간 수복방이 있다. . 홍살문 밖으로 재실이 있다.

 

유릉 : 유릉은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민씨 계비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묻힌곳이다. 순종은 1874년(고종11년)에 황태자로 책봉되고 고종의 뒤를 이어 1907년에 왕위에 즉위하였다. 즉위한 후 연호를 융희라하고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잡으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간섭으로 뜻을 펴보지 못하였다. 결국 재위 4년만인 1910년 8월29일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등 친일 매국대신과 일제의 강압으로 1910년 한일 합방조약이 체결되었다.

순종황제는 한일합방 이후 단지 이왕으로 호칭된 채 1926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순종의 인산일을 기하여 6.10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순명효황후는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딸로 고종 19년(1882) 11세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97년 황태자비로 책봉되었으나 순종황제가 즉위하기전엔 1904년 경운궁에서 승하하였다. 오늘날의 뚝섬인 양주 용마산 기슭에 모셔졌다가 순종황제 승하 후 이곳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순정효황후는 1894년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로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었고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황후는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고자 소위 한일 합방조약 체결을 서두르자 옥새를 감추기까지 하였다. 또한 나라를 잃은 후 일제의 침탈행위를 경허�웸뗌만�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었었고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모든 슬픔을 달랜채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66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하였다. 유릉은 합장릉으로 홍릉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능으로 침전이 있으며 상석, 난간석,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등의 석물이 있다. 이 석물들은 홍릉보다 사실적으로 만들어졌다. 홍살문과 수복방이 있다. 홍살문 밖으로 재실이 있다.

 

[출처] 문화재청 금곡지구 관리소 유입물에사 발췌 

 

왕릉관련 자료 홈페이지 : http://www.cha.go.kr 

 

▲ 남양주 시청 건너편에 있는 홍릉과 유릉..  뜻밖에 남양주 시내에 있다.
▲ 표지판 나오자마자 좌회전했더니 후문이다.  ▲ 목련꽃. 잔인한 4월을 앞두고 너무나 탐스럽다
▲ 홍.유릉 안내판                                         ▲ 입구에서 밖을 내다보니 참 오묘하다
▲죽죽 늘어지는 나무이름이 뭐랬더라              ▲ 온 우주를 담고 있는 연못
▲ 참 기이한 소나무                                       ▲ 왼쪽으로 가면 홍릉, 오른쪽으로가면 유릉이다
▲ 보존상태가 좋아 나무들이 너무 멋지다         ▲ 홍릉의 어재실이보인다
▲ 홍릉에 딸린 재실, 재실은 제관들의 제사준비와 휴식을 위하여 사용된 곳이다                       

▲ 어재실 내부 전경

▼ 자 드디어 홍릉을 둘러보자

▲ 1897년 고종은 대한 제국 수립을 선포 연호를 광무라했으며 황제가 되었다. 이때 민비가 명성황후로 추존되고 능호를 홍릉이라고 다시 정하고 2년만에 국장이 마무리되었으며 이곳이 오늘날의 청량리 홍릉이라 불리는 곳이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황휘를 물려주고 퇴위한 뒤 1919년 승하하자 지금의 남양주시 금곡등에 고종의 능을 만들면서 천장론이 일었던 민비의 능도 옮겨와 합장릉으로 했다. 오른쪽에 보이는 바둑판 같은 곳에서 제사를 지낼때 절을 하는곳이란다
▲ 우물..제사를 지낼�� 어재실의 물을 사용하는것이 아니고 이곳의 우물물을 사용한다
▲역사의 한을 고스란히 간직한 문고리             ▲ 홍릉의 내부안

▲ 지붕위의 손잡이가 달린것은 눈이 오면 눈을 치우기위한 도구로 쓰인다

왼쪽 계단에 있는 구름모양과 태극모양은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저 태극모양이 박영효로 태극기의 시초가 된 문양이 이곳에도 남아있다

▲최근 단청을 새로 하고 보수를 하여 보존상태가 비교적양호하다. 오른쪽으로 석물이 보인다

   중국 황제의 능제를 따라 정자각 대신 침전이 세워진 최초의 능이다. 침전이 있는 능은 황제의

   능인 홍릉과 유릉뿐이다. 침전 뒤에 능이있다

▲ 역대왕릉과 달리 중국황제능제 따라 조성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 정면에 보이는 침전                                  석물 (유릉과 차이점이 크다)

▲ 원래 이곳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인데 해설하시는 분이 친절하게도 안내해 주셨다

▼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합장했다는 비석         ▼ 봉분앞에 있는 사각 장명등

▲ 망주석: 특이한 모양이 새겨져있는데 오른쪽은 올라가고 왼쪽은 내려가는 모양

  다산을 상징하는 상상속의 동물. 이름을 까먹었다...ㅠ.ㅠ

▲ 상석 (문양도 참 독특하다)                           ▲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있다
▲   석주                                                     ▲ 면석위에 새겨진 꽃무늬

▲ 침전의 기단아래 홍살문까지 깔려져있는참도.   세부분으로 나누져 좌우보다 한단 높게 마련된 중앙길은 황제와 황후의 영혼이 다니는 길(신도)이다 이 침전가까이로 석물이 도열하듯이 서있다..

오른쪽 사진은 홍릉에서 유릉으로 가는 길. 꽃을 찾기엔 좀 이른듯하나 관람은 홍릉에서 유릉방향으로 하는것이 걷기도 편하고 볼것도 많다

▼ 자 그럼 유릉을 둘러볼까?

▲ 조선의 마지막 왕릉인 27대 순종황제와 원비 순명효황후 계비 순정효황후의 능으로 유일한

   동봉삼실의 합장릉이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화후의 둘��아들로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

   하면서 연호를 융희로 고쳤다.

▲ 홍릉과 현저한 차이를 모이는 석수들,,, 기린 탁타 코끼리 홍릉에 비해 중후한 느낌이기도 하지만

   홍릉과 가장 큰 차이점은 다리부분이 뚫려있다. 이것은 기존에 없는 양식으로 일본사람들이 석수

   를 만들면서 미쳐 따라하지못했다는 문화해설자의 설명이다

▲ 홍릉에 비해 유릉은 초라하다고 할 정도로 소박하다. 이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으로

  한 나라의 멸망과 관계있을 듯하다. 오른쪽은 홍살문으로 홍살문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것이다.

▲ 연지못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나오면서 다시 한컷
▲홍유릉 관리사무소                                  ▲ 이메일주소를 적어주니 왕릉답사수첩을 선물로

▲역사적 슬픔이나 아픔과는 상관없이 너무나도 평화롭게 이곳에 봄이 찾아왔다.

   그렇게 또 우리의 역사는 시작되는가 보다

 

♣ 홍릉수목원에 그렇게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아직도 계획만 짜고 있다. 봄은 코앞에 와있고 몸은 근질근질하고 도저히 참을수없는 여행의 유혹을 이기지못해 비가내리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남양주로 출발했다. 집에서 자가용으로 50분거리,,, 너무 가깝다... 홍유릉에 도착해 준비해온 도시락을 주차장에 펴 놓고 목련꽃아래서 우산을 받쳐들고 김밥을 먹노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문화유산을 해설해 주시는 분과 동행하면서 26대 고종황제 27대 순종황제에 관해 이런 저런 이야기도 듣고 곳곳에 남아 있는 흔적을 따라 걸어가노라니 역사의 한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침전뒤의 홍릉은 개방이 되지 않는곳이나 문화유산 해설하시는 분의 안내로 금단의 구역을 들어갔다. 선정릉에서 본것과 비슷한것 같기도 하고 다른것 같기도 하였는데 중국황제의 능을 묘사한것이라며 이것저것 꼼꼼하게 설명을 해주신다. 다시 오솔길을 따라 유릉으로 넘어오니 홍릉과 달리 매우 단순하고 초라한 느낌마저 든다. 설명으로는 마지막 황제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 나라의 멸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것 아니겠냐는 말 한마디가 비수처럼 와서 박힌다. 곳곳에 남은 일제의 잔흔들... 우리의 유고한 역사의 왕조마저도 그들에게 무참히 짓밟혔건만 그들은 아직도 망발을 서슴치 않고 있으니...이 고즈늑한 역사의 현장에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있건만 무심하게도 너무나 평화롭게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어있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는 또 새로이 시작되는가 보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안내하시는분께서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면 수첩을 준다고 해서 후다닥 뛰어가서 얼른 적어주니 조선왕릉 수첩을 주었다.

현재 완전하게 존속되어 남아 있는 조선왕실의 능묘는 서울 근방에 119기가 있으나 왕릉을 답사할때마다 정보가 한정되어있고 전지역을 분류해놓은것이 없어 이래저래 많이 불편하였는데 너무 쉽고 편하게 조선 왕조 역대 왕릉을 한꺼번에 조그마한 수첩을 만들어 설명과 그림이 있어 너무도 유용하게 쓰일것 같다. 이 수첩을 받은것만으로도 오늘 여행의 120%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해도 좋을듯하다... 날씨가 좀 더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여행의 묘미는 이런 날씨일수도 있다.

비가 오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날이 있고 그 떠남이 과거와 현재속에 공존하는 곳이라면

그 또한 의미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