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nkook's Diary/Ordinary Daily Life

[2016년 11월 소소일기] 11월 11일 그날을 기억해.

작은천국 2016. 11. 11. 23:11

[2016년 11월 소소일기] 11월 11일

 

오늘이 그날이라는 걸 잊어버렸다.

한동안은 이맘때쯤이면 까미노 블루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그러다 오늘이 그날이라는 것 마저 잊어버릴 만큼 시간이 흘렀다.

 

꼭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당장 이번 달에 써야 하는 원고와

겨울 동안 하게 될 몇 번의 여행 관련 강의도 준비해야 하고

12월까지 예정된 몇 차례의 여행도 다녀와야 하고

한창 논의 중인 내년 프로젝트가 확정되면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 가고 있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조금 센치한 기분을 오래도록 품고 싶지만

막장 드라마 같은 뉴스로 도배된 나날이라 마음이 뒤숭숭.

이러니 어지간한 일 아니면 잊는 것이 정상일지도.

 

[2009년 11월 10일]  마지막 알베르게였던 이레 데 산티아고에서 800km 걷기가 끝난 걸 기념하며. (완전 쌩얼 @.@)

 

페이스북이 기억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아. 빼빼로 데이구나' 이러고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2009년 10월 7일에 시작해 '산티아고 가는 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2009년 11월 11일에 도착했으니 약 800km를 걷는 데 꼬박 35일이 걸렸다.

 

산티아고 가는 길의 최종목적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스페인 북부의 도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까데드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성당이다.

2009년 11월 10일 마지막 알베르게 였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 초입의 이레 데 산티아고에

점심 나절에 도착했고 거기서 대성당까지 약 5km니 1시간 정도면 도착할 '산티아고'였다.

 

하지만,  하루 종일 걸어 땀에 쩔은 몰골은 자처하고라도

34일동안 걷느라 녹초가 된 지친 몸으로 산티아고에 입성하고 싶지 않았다.

이레 데 산티아고에서 하루를 쉬었고 다음 날 정갈한 마음으로 목욕을 한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고

마지막 의식을 치르는 경건한 마음으로 5km를 걸어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그날이 바로 11월 11일.

 

남들은 매일같이 마시는 포도주 때문에 살이 찐다고 했으나

걷는 동안 살이 너무 빠져  몸무게가 43kg정도 였으니

길을 걷는 내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산티아고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몇 년간은 그곳에서 머물렀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으로

산티아고 우울증이라는 '까미노 블루'를 나 역시 한동안 겪기도 했었는데

이젠 그곳에서의 기억도 희미하고 생에 의미 있는 날짜인 11월 11일도 잊어버릴 만큼 시간이 꽤 흘렀다.

 

오늘이 아니어도 다음 주 여행 강의에서 '산티아고'를 다룰 예정이라

PPT 자료를 새로 준비해야 하니 다시 떠올리게 될 산티아고이긴 하다.  

 

산티아고에 언젠가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유도 

걷다가 골반이 탈골될 것 같은 육체적인 고통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7년.

 참 많은 것이 변했다.

 

더러는 전공과 전직을 질문받는 경우가 있다.

상경계열 전공에 은행원이었다는 과거사(?)를 밝히면 다들 놀라워 한다.

너무 극과 극이라서 상상이 안 된단다.

7년의 세월보다 두 배 이상의 시간을 은행에서 보냈는데

희한하게도 나역시 내가 은행원이었나 싶고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동기들은 대부분 부지점장 혹은 지점장이 됐다.

내가 그 삶에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면 내 삶일 수도 있는 그들의 삶.

한때 그것이 전부라고 믿었고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삶이 이젠 너무 낯설다. 

 

하긴, 내가 이런 인생을 살고 있을지 7년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여행 한 번이 내 인생을 이렇게 바꿔 놓을 줄 누가 알았으랴. 

 

우연이자 운명처럼 내게 다가온 산티아고 가는 길.

그 길을 걷고 있을 땐 몰랐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길이었는지를.

여름 내내 뜨거운 폭염에도 서울 둘레길 176km를 걷는 동안 

 내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인지 스스로 대견했고 새삼스러워졌다.

길의 끝에 닿을 수 있다는 믿음과 이 힘든 시간을 기꺼이 견뎌내리라는

강한 의지는 그 모든 과정을 기꺼이 버텨게 했다.

그만큼 간절함이 컸다고나 할까.

 

그 길이 끝난 날.

내 인생은 이전과 전혀 다른 인생이 될것임을 짐작했다. 

 

쉼 없이 달려온 지난 7년. 

은행원으로 살았다면 절대 알지 못했을 세상에서

참 스펙타클한 일들이 많았다.

 

많은 세상을 두루두루 다녔고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일을 겪어냈다.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고 있고 스스로가 상처를 받는 일도 많았지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일도 많았으리라.

그 많은 일들 속에 나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여전히 실수투성이고 허점투성이고 많이 부족함에도

내가 지금의 '나'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보낸 시간 속에 함께 한 사람들 때문이리라.

그들은 나에게 모두 거울이었고, 모두가 스승이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혼자였다면 결코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으리라.

 

나와 인연을 맺었던

 그 모든 것에 감사함을 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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