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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무장봉 억새축제] 경주 무장봉 억새길을 걷다.

작은천국 2016. 10. 31. 06:30

[경주 무장봉 억새축제] 경주 무장봉 억새길을 걷다.

 

 

경주 무장봉 억새는 은빛으로 금빛으로 출렁이며 바람을 따라 눕는다.

 

꼭 울긋 불긋 하지 않아도 마음만은 절정의 가을이다. 

억새 길을 따라 우리는 발을 맞춰 걸었다. 

 

그 저녁에 친구는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다. 

 

'서로의 거울이 되고 나침반이 되도록 열심히 살자.'

 

고등학교 졸업하던 그해 겨울, 우리는 서로에게 다짐 했었다.

 

서로의 거울이 되고 나침반이 되자고.

 

그로부터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고

우리는 몇 번의 길모퉁이를 돌아

어느새 이만큼 와 있다.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좋다고 했던가.

 

오래된 친구가 있어 좋았고

그들과 함께할 수 있어 좋았고

그런 가을이라 더없이 좋았다.

 

 

 

 

다들 그렇듯 각자 자신의 생활이 바쁜 탓에 고향을 가더라도 어찌어찌 겨우 밥 한 끼 혹은 커피 한 잔이 전부였다.

그러다 친구들이 올해부터 조금씩 여유가 생기는 듯하여 

길었던 추석 연휴에는 시간 되는 친구끼리 오랜만에 경주 남산을 돌아보겠다 생각했었다.

 

 역사교육을 전공한 친구도 있고 고고 미술을 전공하고 출강하고 있는 친구도 있어

이참에 그들의 지식을 날로 먹어보리라 생각했었지만 추석 때 발생한 경주 지진으로 모든 것은 수포가 됐다.  

 

임도 보고 뽕도 딴다고 조용필 님 공연 덕분에 몇 주 만에 다시 찾게 된 울산인지라

지진으로 입산이 금지된 경주 남산 대신 친구들은 경주 무장산을 추천했다.

 

경주를 잘 안다 생각했는데 처음 들어 본 경주 무장산이었다.

하도 생소해 가족들에게도 경주 무장산을 물어보니 다들 그런 산이 있냐고 했다.

친구들은 회사 야유회로, 가족끼리 이미 수차례 무장산을 올랐다는데 당최 거기가 어디냐는 호기심에 더해

해마다 가을이면 억새길은 응당 신불산이었기에 살짝 지겨워진터라 내심 기대를 했다.

 

나의 큰 기대에 친구들은

 "신불산에 비하면 동네 앞산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라.

그래도 나름 아기자기하고 괜찮다."며 덧붙였다.  

 

공연 전에 무리하면 공연 보는 데 지장이 있기에

원래 계획은 일요일 등산 예정이었으나

무장산이 그리 높지 않은 산이라 했고 일요일 비 예보가 있어

일정을 변경해 토요일에 다녀오게 된 무장산이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화창한 토요일 경주 무장산으로 향했다.

거기가 어딘지 너무 궁금했는데 보문단지 뒤로 길이 나 있었고 암곡이라는 곳에서 들머리를 시작했다.

 

온통 벚꽃길, 봄에도 와 봤다는 친구는 이 길이 잘 안 알려진 또 하나의 벚꽃 명소라고 했다.

 

어느새 가을걷이가 시작된 황금 들판을 걷는다.

 

무장산의 정상인 무장봉까지 약 6.2km

이 정도면 등산치고는 아주 양호한 편이고 무장봉의 해발은 624m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다.

 

무장산은 토함산 일대의 산자락인지라 이 일대 역시 경주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무장산을 찾는다 생각했는데 직원분 말로는

평소에는 하루에 5천 명 정도나 찾을 만큼 전국 각지에서 등산 애호가들이 찾는 산이라고 했는데

지진과 태풍 차바의 영향으로 현재는 1/3 수준으로 탐방객이 줄었다고 했다.

 

친구들 말로도 계곡에 물이 있는 편이 아닌데 차바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초반에는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갈림길에서 능선을 가파르게 올라가는 탐방로와 다소 완만한 계곡을 따라 걷는 탐방로로 나뉜다.

계곡의 경치가 정말 좋다며 친구들은 올라갈 때는 능선을 타고 내려올 때는 계곡 탐방로를 계획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태풍 차바의 영향으로 계곡 탐방로가 아예 유실돼버렸단다.

재해신청을 했고 다 복구되는 데는 아마 1년 정도는 걸린다는 설명이었다.

 

울산도 태풍 차바의 영향으로 엄청난 피해를 봤는데 경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계곡 탐방로의 경우는 정상의 억새와 함께 활엽수의 단풍과 계곡 풍경을 함께 즐길 수 있어

정말 아름답다며 국립공원 직원들도 상당히 아쉬워했다.

 

아마 내년 말이나 내후년 봄 정도에 다시 개방될 듯하다고.

 

 

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은 거리는 짧지만 상당히 가팔라   

능선이 나올 때 까지는 체력과의 전쟁이요 땀은 비 오듯 쏟아진다. 

 

그래도 온통 밤나무 숲 군락인지라 깊은 숲에 온 느낌이라 좋았다.

이 길은 원효대사가 포항의 오어사로 향해 가면서 수도차 지나던 길이었다고 하니

나 역시 수행하는 마음으로 길을 걷는다.

 

그나저나 우리나라에서 좀 괜찮다 싶은 절과 산은 원효대사가 거쳐 가지 않은 곳이 없다는.

 

 

 

 

그렇게 들머리에서 약 1시간 30분 정도 걸으니 탁 트인 능선에 도착했다. 

 

친구들과는 20대 초반 등산과 캠핑을 엄청 다녔더랬다.  

완전 저질 체력이라 그때는 항상 꼴찌로 산을 탔었는데

올해 6월경 2주 만에 무려 5kg이나 체중 감량을 했음에도

매주 토요일마다 서울 둘레길을 걸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매일 10km 정도를 꾸준히 걸은 덕분에

땀은 비 오듯 흘리지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러고 난 뒤 저녁에 공연을 갔는데도 멀쩡했다는 -

 

역시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    

 

억새길을 따라 무장봉 정상을 향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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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를 한 포대 쏟아 놓은 것처럼 하얀 억새풀이 황홀하다.

 

 

정상에 올라섰으니 줄 서서 다들 기념사진 한 장씩 찍고

 

전망대에서 서서 무장산 정상의 억새를 바라본다.

 

 

 

 

원래 이곳은 70년대에 동양그룹이 오리온 목장으로 운영했던 곳으로

90년대 후반 목장이 문을 닫으면서 관리가 되지 않았고 그 자리에 가장 먼저 초본류인 억새풀이 자리 잡으면서

산 정상 일대 148만에 달하는 억새 군락지가 형성됐다고 한다.

 

한때는 드라마 선덕여왕을 비롯해 많은 영화 등이 촬영됐는데 지금은 좀 뜸한 편이고

현재는 이 억새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산악 애호가들이 찾는다고 했다.

 

신불산 평원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계곡 탐방로를 이용하면

 평소 등산이 힘든 노약자나 어린이도 충분히 정산 등반이 가능하며 (지금은 폐쇄됐지만)

 1시간이나 2시간 정도만 걸으면 전국 억새 5대 군락지라는 신불산 평원에 못지않은

드넓은 억새평원을 만날 수 있으니 전국 각지에서 사람이 몰리는 이유는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처음에는 등산이나 둘레길을 걸을 때 도시락에 간식 등 잔뜩 싸서 갔었지만

몇 번 걷다 보니 음식이 과해 부대끼는 느낌보다 땀 흘린 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드는 쾌감을 즐기게 된 지라

 당을 보충할 수 있는 간식과 과일 약간과 물 외에는 몸에 지니지 않는 편이다.

 

게다가 이번 등산은 짧은 편이기에 점심은 하산 후 먹기로 해서 친구들도 과일 몇 개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산악회에서 오신 분들은 김밥은 기본이고 족발도 모자라 회무침에 정말 별거별거 다 싸오셔서 먹는 게 아닌가-

서울에서도 이런 광경은 흔치 않은 광경이라 너무 신기해서 사진을 막 찍었다. ㅎㅎㅎ

 

친구들 왈-

아줌마 아저씨들은 산에 먹으러 온다며-

이렇게 먹고 내려가면 다시 또 막걸리에 고기에 갖은 음식을 먹는단다.

 

ㅠ.ㅠ 

 

 

정상에서부터 계곡 탐방로 입구까지 약 1.8km에도 억새 탐방로가 이어지지만

이마저도 태풍 차바의 영향 때문에 탐방 금지인지라

적당히 땀이 식을 만큼 쉬어 주고 다시 왔던 길로 하산.

 

불과 해발 640m의 무장산인데 경주의 산들이 그리 높지 않아 발아래로 산등성이 좍- 펼쳐진다.

 

올라올 때 가파른 건 괜찮지만 내려갈 때는 무릎에 하중을 받기도 하고 미끄러워 조심해야 한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돌부리에 걸려 골반이 틀어지는 고통을 느낄 정도로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

산이 수월하다며 내뱉은 말을 산신이 들었나 보다.

 

산에서는 항상 겸손하고 겸손 할 지 어니.

 

 

미나리 하면 의례 청도인 줄 알았는데

무장산 깊은 계곡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로 재배한 미나리는 이 지역의 큰 농가소득원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곳곳에서 미나리 재배 하우스를 비롯해 미나리를 파는 곳이 즐비했다.

친구가 단골이라는 윤가네 농원에서 점심을 먹기로 결정.

 

땀 흘리고, 약간 피로하고, 약간 허기진 상태에서

싱싱하고 향긋한 미나리와 함께 구워지는 삼겹살-

 

체질을 관리해야 하니 의사 선생님은 육식을 삼가라고 했지만

이날만큼은 친구들과 함께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꿀맛 같은 삼겹살을 즐겼다.

 

그게 무엇이든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는 음식은 다 보약이려니-

 

오후 3시경 모든 일정이 끝났고 다시 울산으로 돌아가는 길.

시간적 여유가 있어 오랜만에 보문단지에 들렀다.

 

한때 친구들과 벚꽃 필 때, 녹음 우거질 때, 낙엽 질 때, 눈 올 때 

사시사철 정말 많이 걸었던 곳이다.

 

올해 봄 해랑 열차를 타고 경주 신라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짬을 내어 보문일대는 산책했었다.

그때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계절은 두 바퀴를 돌아 가을이 됐고

친구들과 함께 이 길을 다시 걷는다.

 

"이 길을 얼마 만에 걸어 보는지 모르겠다."

 

다들 이구동성이다.

 

그렇게 우리는 옛날에- , 옛날에-, 옛날에-

 

옛날의 그 언제적 시간 속을 걷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길은 좀 슬픈 추억이 있다.

할머니 돌아 가시고 경주로 모셨는데  그해는 유독 벚꽃이 일찍 피어

 경주 벚꽃이 절정에 달하는 시기였고 마침 이 길을 지나게 됐다.

 

운구차 안에서 사람들은 절정의 벚꽃 시기를 일부러 딱 맞춰 경주를 오기도 힘든데

할머니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벚꽃 구경을 하게 됐다며 다들 한마디씩 하셨다.

그때까지 꾹 참고 있던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이 길은 경주 마라톤 코스로 울산에 있을 때 더러 벚꽃 마라톤을 뛰었지만

할머니 돌아가시고 난 뒤 벚꽃 마라톤은 더이상 뛰지 않는다.

 

나 역시 할머니 덕분에 그렇게 황홀했던 경주의 봄을 

여태껏 두번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벚꽃 피는 봄이 되어 이 길을 다시 걷는다 해도 이젠 슬프지 않다.

 

보문에서 울산으로 향할 때 가족들은 통상 대릉원을 지나 동궁과 월지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친구들은 불국사 방향으로 움직였다.

 

정말 한적한 도로였는데 지금은 한 집 건너 한 집이 커피숍이었다.

한옥이 근사한 커피숍에 들렀다.

 

창밖으론 황금 들판이 일렁이고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지난 몇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참 특별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다들 성격은 제각각이지만 친목모임한답시고

우르르 모여 집안 얘기에, 남자 얘기에,  신변잡기를 늘어놓는

그저 그런 이야기로 시간을 죽이는 수다 떠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과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공통점으로 '친구'라는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내가 서울로 거주를 옮기기 전까지 약 7년간 독서모임의 형식으로 모임 기록을 해나갔고

지금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기록을 정리해 제본으로 엮은 책을 3권이나 만들기도 했었다.

 

게다가 그녀들과는 단톡방도 별로 의미가 없다.

정말 친한 지인과는 문자보다 전화를 좋아하는 나처럼

친구들 역시 문자를 주고받는 안부보다 전화로 전하는 안부를 더 좋아한다. 

 

서로의 삶에 치어 한동안 안부조차 주고 받지 못한 세월이 길었건만

공백기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했던 가을 산행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참 새삼스럽게 행복한 가을이다.

 

그래, 친구야!

우리 서로에게 거울이 되고 나침반이 될 수 있도록

남은 생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아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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