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kking/나는 걷는다

[청산도] EBS 하나뿐인 지구, 청산도 슬로길

작은천국 2016. 4. 8. 19:21

[청산도]청산도 슬로길 EBS 하나뿐인 지구

 

 

이 봄, 청산도의 청산도슬로길을 느리게 걷고 왔다. 

그건 우연하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다가온

EBS 하나뿐인 지구』덕분이었다.

 

이번에 내가 걸었던 청산도 슬로길, 지리산 둘레길, 서울 둘레길

이 세 길을 묶어< ESB 하나뿐인 지구,   '길, 자연과 사람을 잇다' > 로 

2016년 4월 15일 저녁 8시 50분에 방송될 예정에 있다.

 

 나는 청산도를 원 없이 걸으며

그 길에서 봄을 만끽했다.

 

늘 그렇듯 걷다 보면 절로 느려지는 시간 속에

자연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그 길의 끝에서 나를 만났다.  

 

그리고 청산도를 느리게 걸었던 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봄날이 되었다.

 

 

EBS 하나뿐인 지구, '길, 자연과 사람을 잇다 

 

올해는 국내 여행지 사진 자료도 업데이트할 겸 옛날에 가 본 곳들로 여행을 계획하는 한편,

그동안 정말 가보고 싶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 못해 늘 아쉬워만 했던 곳을 가보겠다 다짐을 했다.

청산도는 그중 한 곳이었다.

유채꽃 피는 4월이 가장 아름다운 청산도를 언제가야하나 고민을 시작하던 차,

'후리지아'라는 향긋한 닉네임을 쓰는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날아왔다.

 

'EBS 하나뿐인 지구'라는 프로그램에서 '한국의 봄을 걷다'라는 콘셉트로

아름다운 한국의 봄, 그리고 천천히 생각하며 걷는 '도보여행' 을 방송 할 예정이며 

내가 걸어야 할 곳은 청산도라고 했다.

 

'옴마야 - , 이 사람들 뭐지. 내가 청산도 가고 싶어 하는 걸 알았나?'

 

 

 

청산도라는 한마디에,  도보여행이라는 두 마디에 2주 후 촬영이라고 하는데도

이것저것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광속으로 '좋아요'  했다.

물론 이후에 스케줄 조정하느라 좀 힘들긴 했지만...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대략의 날짜만 확답받은 상태에서 일주일하고도 며칠이 정신없이 흘렀고

막상 청산도로 가야 할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오니 그제서야 현실적인 문제들이 생각났다.

 

개인 여행도 아니고, 사진 찍는 여행도 아니고 , 글을 써야 하는 취재여행도 아니고, 방송! 인데

EBS 하나뿐인 지구는 도대체 날 뭘 믿고 (내 얼굴도 보지 않고, 사전 미팅 같은 것도 없고) 덜컥 방송 출연 제의를 했단 말인가? 

게다가 나 역시 'EBS 하나뿐인 지구'라는 프로그램에 내가 적합한 것인지 아닌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청산도와 도보여행에 끌려 즉흥적으로 출연 결정을 한 게 조금 걱정되긴 했다.

 

이번에 연출을 맡은 김병연 PD님이 직전에 만든 '도시탈출 백패킹'을 보니 그냥 느낌이 좋았고

(다시보기 http://www.ebs.co.kr/tv/show?prodId=439&lectId=10464210)

<EBS 하나뿐인 지구>라는 프로그램도 굉장히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우리나라 최장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니 더이상 설명해 무엇하랴.

그런 곳에서 다루는 도보여행이라면 다 좋을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나름 여행작가로 출연하는 방송이니 뭔가 준비를 해야 하나 조금 고민하기도 했지만 

청산도에 관한 내용을 달달달 외워서 어쩌고저쩌고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의 걱정에 이지아 메인작가님은 "아무 준비 없이 오면 된다. 그냥 청산도를 걸어보고 느낌 정도만 가볍게 이야기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새가슴을 품고 트리플 AAA형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청산도 촬영을 앞두고 부담도 걱정도 전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청산도에 대한 준비를 너무 많이 하면 막상 청산도에 갔을 때 감흥이 떨어질 것 같았다.

백지상태까지는 아니어도 청산도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청산도를 만났다.

그리고 원 없이 청산도를 걸었고, 청산도를 보았고, 청산도를 느꼈다.

 

청산도  위에서 을 만났고 청산도는 내게 그 시절 언젠가 다시 가고 싶은 이 됐다. 

 

슬로시티 청산도, 그 섬에 가고 싶다.  

 

청산도.

우리에게 슬로시티(Slowcity)라는 단어를 알게 한 곳이 바로 청산도다. 

지난 2007년 12월 청산도는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선정됐고 빠른 것만 최고라고 생각했던

우리에게도 비로소 '느림과 여유의 미학'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했다. 

산도, 바다도, 하늘도 푸르다는 청산도는 도시를 삶의 터전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힐링의 섬이 됐다.

무조건 빨리 가야 하고 높이 올라가야 하고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도회지의 팍팍한 삶.

청산도에서는 그 모든 빠름은 반칙이라고 한다.  

바쁘게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조금 늦게 가도 괜찮다고 청산도의 풍경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청산도 슬로길  vs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 

 

그 길은 닮았다.

두 길이 그토록 닮아 있는 줄 걸어보기 전에는 몰랐다.

한 걸음, 한 걸음 청산도의 풍경을 느리게 걷다 보니

산티아고를 걸었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고

어린 시절 기억과도 만났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기에 있다.   

 

 

청산도 슬로길.

 

국제슬로시티연맹 공식인증 세계 슬로길 1호로 지정될 만큼 풍경, 사람, 이야기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다.

총 길이 42.195km의 슬로길은 11코스(17길)로 청산도 마을과 마을을 잇고 있는데 마음만 먹으면 이틀이면 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슬로길은 완주를 목표로 해야 하는 길도 아니며, 완주가 목표가 되어서는 슬로길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는 길이었다. 

 

 

 

무엇보다 슬로길이 절대로 그렇게 빨리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걷다 보면 청산도 풍경에 취해 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슬로길.

슬로길이 괜히 슬로길이겠는가.

빠름이 아니라 느리게 걸으며 풍경 하나하나 눈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살아난 오감으로 도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것과 만나게 되고, 보게 되고, 듣게 되고, 말하게 된다. 

어쩌면 도시에서도, 일상에도,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으나 여유가 없어 놓치고 있는 소중한 이야기를 말이다.

 

 

 

 

 

 

날씨는 기대했던 것과 달리 좀 흐렸다.  

맑은 날씨라면 보길도까지 보인다는 화랑포 전망대는 보길도는커녕 모든 것은 희끄무레.

그치만 흐린 날의 풍경은 흐리다는 이유만으로 가산점을 부여했다.

지금 흐림의 순간은 맑은 날에는 절대 보지 못할 풍경이니까.   

흐리면 흐린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어차피 어느 한순간도 똑같은 모습은 아니지 않은가.

 

 

걷고 걷고 걷고, 참 많이 걸었다.

 

하루에 평균 15km 좀 많이 걸은 날은 17km까지도 걸었다.

슬로길 1, 2구간은 전부 걸었고 나머지 구간들은 조금씩 조금씩 잘라서 걸었다.

다양한 장면을 담아야 하니 걸었던 길을 걷고 또 걷고 또 걸었다.

물론 나만 걸은 것이 아니다. 스텝들도 모두 함께 걸었다.

우리는 걸으며 연신 사진으로만 보던 청산도와 직접 걷는 청산도가 너무 다르다며 청산도에 흠뻑 취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도보여행 힐링 방송!  이 좋은 느낌이 방송으로도 전해질 것이라 믿는다.

다만, 카메라 장비를 무겁게 매고 걸어야 했던 PD님 이하 스텝들은 촬영 강행군으로 코피 좀 쏟지 않으셨을까? ㅎㅎ

 

 

 

 

 

청산도 촬영 기간이었던 3월 28일~4월 1일.

아직 서울은 봄이 도달하기 전이었고 청산도는 절정의 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봄 길을 걷는다는 건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하지만 겨우내 숨쉬기 운동만 하고 살았기에 기분과 달리 사실 몸은 좀 많이 힘들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걸으면 걸을수록, 걷는 날이 쌓이면 쌓일수록, 몸이 알아서 스스로 조절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산티아고 도보여행을 통해 걷기로 한 번 단련됐던 내 몸은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산티아고를 다녀온 이후로 그곳에서 찍은 사진으로 전시만 5번, 그곳에서 넘치도록 충만했던 에너지는 이미 다 소진되고 없건만

몸이 기억하고 있는 산티아고는 그 순간이 오자 놀랍도록 한 치의 오차 없이 내 몸을 움직이게 하고 있지 않은가.

놀라운 인체의 신비여!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약800km, 산티아고 가는 길.

 

 

 

또한, 방송으로 길을 걸어야 하고 가장 경치가 좋은 구간을 구간 반복해서 걷는 것이니 

그 짧은 시간 안에 무엇을 느낄 수 있기나 할까 좀 궁금하긴 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같은 길을 구간 반복해서 걷고 있지만 전해지는 느낌은 모두 달랐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그 길에서 울고 웃으며 땀으로 눈물로 모두 쏟아냈던 그때의 마음.

청산도를 걷고 있으니 마치 그때의 내가 걷고 있는 것인 양 날 선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선명함은 방송으로^^

 

 산티아고에 노란 화살표가 있다면

 

 

청산도에는 파란 화살표가 있다.  물론 그 길을 느리게 걸어가는 달팽이도.  

 

 

 늙음이 찾아오는 시간도 느리다는 청산도.  

 

청산도 사람에게 질문했다.   

그들의 대답은 늘 이렇게 시작한다.  

"그라제~"

 

일단 "그라제"라고 운을 뗀 다음, 

비로소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신다.

 

청산도에서 "그라제"는 일종의 추임새랄까.

때론 그~라제가 되기도 하고 때론 그라~제가 될 뿐

언제나 한결같았다.

그라제.

 

"그라제~ 저쩍~으로~ "

 

자꾸 듣다 보니 몹시 기분이 좋아지는 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혼잣말로 슬며시 따라 해봤다.

'그라제'... 어. 이 억양이 아닌가.

그러다 또 슬며시 웃었다.

 

 

 

이런 단어는 짐작하듯 큰 뜻도 의미도 없다.

다만 예스에 준하는 의미다. 그것도 초초초긍정적으로다.

물론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니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여러 가지 문제들과 부딪치겠지만

무의식중에 드러나는 언어습관에는 그 사람의 숨길 수 없는 마음이 드러나는 법이다.

느린 시간을 살고 있는 청산도의 여유로움은 그들의 대답 첫 마디에 드러나고

그 여유로움은 청산도 어르신들의 얼굴에도 드러났다.

 

길을 걷다가 만난 77세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십중팔구 방송에서 편집되겠지만

나는 소년 같은 표정을 가진 청산도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그 할아버지뿐이 아니었다. 청산도 대부분의 어르신이 그랬다.

청산도는 시간만 느리게 가는 게 아니라 늙음이 찾아오는 시간 역시 느린 곳이었다.

 

 

 

삶이 곧 예술.

 

영상도, 사진도, 밭일도 모두 작업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모두 예술이 된다.

단지 모양과 방향이 다르니 보이는 것이 다르고 대상이 다르니

한 작업은 '예술'이 되고 한 작업은 '일'이 된다.

그러나 맥락으로 따지자면 모두 '예술'이다.

 

김병연 PD님이 카메라를 메고 걸어가는 모습과

할머니가 일을 마치고 걸어가는 모습이 묘하게 닮았다.

청산도 어르신은 모두 예술하고 있었다.

 

 

 

 

어! 저게 뭐지?

뭔가 대개 근사한 것인 줄 알았다.

자세히 다가가 보니 플라스틱 재질의 병을 수납하는 무엇(이름을 모르겠음)이었다.

분명 우리 아파트에서도 재활용품으로 버려진 것이 청산도에 오니 창틀로 탈바꿈했다.

이 집만 이런 것이 아니라 곳곳에서 이런 장식을 한 집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청산도는 사람도, 사물도 모두가 그렇게 예술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름도 모르겠다며 질긴 뿌리가 싫다고 하셨다.

아이비처럼 보였다. 나는 이 아이비를 애지중지하며 화초로 키우고 있다.

청산도에선 아이비는 그저 잡풀!

청산도에서는 그렇다.

 

 

에필로그

 

확실히 이상기온이다.

청산도를 떠날 때 그제야 벚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나 지나야 서울에 도착할 봄이었다.

그런데 서울로 돌아와보니 서울도 이미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해마다 벚꽃 피는 봄이 오길 기다렸는데

막상 벚꽃이 피었는데도 큰 감흥이 없다. 

청산도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청산도에서 미리 만난 봄에 흠뻑 취해 있었나 보다.

 

벚꽃 사진 데이타베이스 구축을 위해 경포대, 하동, 진해, 경주까지 알뜰히 세웠던 계획은 자연스레 모두 취소했다.

아마 슬슬 동네 산책하는 것으로 올해 벚꽃 구경은 끝날 것이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다.

 

- 서울 월드컵 경기장 벚꽃길 -

 

불과 일주일 머물렀던 청산도.

청산도를 떠난 지 불과 일주일.

심리적 시간은 굉장히 오래전 일인 양 느껴진다. 

눈을 뜨자마자 들리던 새소리 대신 자동차 소리가 들리면 청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낀다. 

그뿐이 아니다. 매일 머리를 감을 때도 어김없이 청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노푸 1년 6개월. 샴푸와 린스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헤어제품을 잘 바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오염된 도심의 공기는 노푸에 완전히 적응했음에도 가끔 힘들게 한다.

그러나 청산도에서는 촬영 때문에 매일같이 헤어제품을 2종류를 듬뿍듬뿍 바르고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도시로 돌아온 첫날, 청산도처럼 생각하고 헤어제품을 똑같이 발랐다가 식초에, 소금에, 베이킹소다에

삼푸없이 헤어제품을 씻어내느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게다가 안구건조증때문에 인공눈물을 달고 살았던 내가 청산도에서는 한 번도 인공 눈물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구구절절 청산도가 얼마나 좋은 곳이었는지 말해 무엇하랴.  

이미 몸이 다르게 반응하는 것을.

 

느리게 걸으며 봄을 만났던 청산도. 

산티아고에서 그랬던 것처럼 청산도에서도 기운을 듬뿍 받았다.

나는 다시 도시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살아갈 것이다.

어떤 사람의 표현처럼 일상에 치어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면

느리게 걸었던 청산도의 봄을 기억해 낼 것이다. 

청산도의 바람, 냄새, 하늘, 바다, 산을 말이다.

 

 

 

<EBS 하나뿐인 지구> '길, 자연과 사람을 잇다'

방송일 2016년 4월 15일 저녁 8시 50분 

 

다시보기  ☞  http://www.ebs.co.kr/tv/show?prodId=439&lectId=10494362 

 

 

 

 

 

오랜만에 노래 선곡. 끝없는 날개짓 하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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