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s like traveling/Jeolla

영화 '동주', 동주 촬영지 소록도

작은천국 2016. 3. 14. 16:12

영화 '동주', 동주 촬영지 '소록도'

 

 

영화 '동주'가 100만을 돌파했다.

저예산으로 제작된 영화 '동주'는

상영관도 많이 없고 상영시간도 불리했음에도 100만을 돌파했다.

 

우리의 아픈 시대를 살다간 29세의 젊은 청춘이

흑백의 영화 속에 되살아났고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소록도배경과 어우러지며

영화는 묵직하면서도 담담하게 가슴을 울렸다.

 

영화 '동주'

동주 촬영지 '소록도'

 

오랜 기억,

덜 오랜 기억이 만났던 순간이었다.

 

 

 영화 '동주'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 윤동주와

우리에게 안 알려진 혁명가 송몽규에 관한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들이

알게 모르게 강요하고 있는 어떤 지점이 있다.

굳이 강요하지 않더라도  아픈 시절의 역사에 대해

이미 우리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대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 국민이 의무감처럼 느끼고 있는 역사에 대한 의식일지도 모른다.

 

그런 기분으로 영화 '동주'를 만났다.

 

영화 동주를 좀 더 일찍 보고 싶었으나

저예산 영화 탓에 스크린 수도 적었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던 시간대에 없어서

이리 재고 저리 재다가 겨우 보게 된 동주였다.

천만 영화가 나와도 스크린 독과점을 생각하면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는데

저예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영화를 본 며칠 후 

영화 동주가 100만을 넘겼다는 기분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영화 동주의 100만 돌파의 힘은 개인적으로는 '담담함이라 생각하고 있다. 

암울한 현실 사이 사이마다 윤동주의 시가 흐르는 풍경은 너무도 서정적이었고 

흑백 영화임에도 총천연색 컬러보다 몇 배나 더해진 입체적 컬러감은

담담해서, 너무 담담해서, 그래서 더욱 슬프게 다가왔다.  

 

흑과 백 두 가지로 표현되기에 단순하게 느껴지는 흑백이지만

사실 흑백만큼 까다로운 것도 없다.

 

흑과 백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 것처럼

 수많은 계조들을 계산해야 내야 하고

자칫 한 장면에서라도 조금이라도 과하거나 혹은 모자라게 되면

영화 전체적인 톤에 영향을 받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영화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종반까지 계속 이어지는

윤동주의 고문 씬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흑백 중에서도 압권 중의 압권이었다. 

 

시대의 아픔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지 부드러운 순광의 빛은

어떤 기교도, 애국심도 강요하지 않은 채 정직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러나 강단있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가 담담한 것과 달리 관객은 개인의 아픔을 지나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의 국가적 아픔까지 더해져

꿈 많던 청춘 그들의 짧은 생에 가슴이 쓰라렸고

영화가 끝나고도 대다수의 관객이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동주와 몽규의 학창시절을 비롯해

동주가 고등 형사에게 심문을 받는 취조실 등

영화 '동주'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전달해 낸 곳은 바로 '소록도'다.

 

'소록도'는 영화 동주의 상당부분이 촬영된 곳으로

관객들에게 동주와 몽규가 살았던 그때 그 시절에 내가 머무는 것처럼  

 영화 '동주'에 사실성과 깊은 몰입감을 느끼게 했다.

 

 

소록도(小鹿島).

 

 '작은 사슴을 닮았다'는섬의 모양 때문에 소록도로 불리고 있어

다소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전혀 낭만적인 곳은 아니다.

이곳 역시 일제 강점기 아픈 역사가 숨 쉬는 곳으로

그런 점에선 동주와도 맥을 같이 한다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2012년 뜨거웠던 여름,

 슬픈 사슴 같은 소록도를 다녀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진 인연은 인간관계로 맺어지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끈질기게도 우리를 괴롭힌다.

 

2012년의 그때, 나도 그랬다.

처음 맺은 인간관계 때문에 너무 힘들었고

그 관계가 조금씩 흔들리고 무너질수록 어찌해야 할 줄을 몰랐다. 

 마음은 한여름의 더위보다 더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럴수록 나는 점점 지쳐갔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은 일상을 떠나 무작정 길을 나서게 했고

그렇게 서울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소록도에 도착했다.

 

소록도에 발을 딛는 순간,

심하게 달궈진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는 참기 힘들 정도로 훅- 밀려왔다.

 

 

 

소록도 입구 주차장에서 한참을 걸어야 우리가 알고, 보고 싶어 하는 소록도가 있다.

아스팔트의 뜨거운 열기를 소나무 숲이 가려주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덜 정도였으니

그날 얼마나 더웠는지 굳이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일상에서는 너무도 번잡스러워 쉬- 가라앉히지 못했던 뜨거운 마음이

더 뜨거웠던 날씨 탓에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열치열이라고 했던가.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한때 격리됐던 섬이지만

현재는 한센병 치료제도 개발이 되었고 소록대교가 개통되어 외부와의 왕래가 활발하다.

 

관광객이 꾸준히 늘고 있다하지만 막상 소록도에 도착하니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격리 상태인 섬이 아닌가 싶었다.

 

이런 소록도가 몇 년 전에 뜻밖의 일로 주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2010년 조용필 님이 영국 필하모닉과 함께 소록도를 방문했고

다시 소록도를 찾겠다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011년 밴드 위대한 탄생과 다시 소록도를 찾은 것이 큰 화제가 됐었다.

 

 

 소록도는 '기회가 되면....'에 머물던 곳이었다가

2011년 조용필 님의 방문으로  '꼭 한 번'으로 바뀌긴 했지만

워낙 먼 거리에 있다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그러고 불과 1년 만에 소록도를 가 보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엄격히 따지면, 소록도는 관광지가 아니며

소록도 섬 전체가 한센인의 치료 및 생활 공간이 되는 병원이라고 할 수 있다.

 

 

소록도 안쪽으로 이동하는 곳곳에는 사진과 설명으로

 소록도의 아픈 역사의 이해를 돕고 있다.

 

 

 

무거운 기분과 달리 소록도는 너무나도 고요하고 평화로운 섬이었다.

 

약 20여 분 남짓 걸었을까.

국립 소록도병원이 있는 소록도의 생활공간 입구에 도착했다.

 

마을 사람들의 생활공간은 이곳과 좀 떨어져 있는 편으로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과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소록도는 한센병의 전염 우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오래된 편견으로

외부인들에 의해 주민들이 상처받는 일이 있어

섬의 모든 곳을 개방하지 않고 일부만 개방을 하는 점도 한 몫했다.

 

선물의 집과 마주하고 있는 병원 본관에서 시작해 검시실, 감금실, 한센병 자료관 등등

지도에서 안내하고 있는 노선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영화 동주는 검시실, 감금실, 녹산 초등학교 등에서 촬영이 됐다고 하는데

오후 6시면 무조건 촬영을 마쳐야 하는 악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이곳 소록도를 촬영지로 선택했을 때는 다 이유가 있었겠다.

 

 

지금은 평온해 보이고 다소 운치마저 느껴지는 조용한 검시실이지만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강제로 마취도 없이 남자들에게는 정관 수술을, 여자들에게는 낙태 수술이 자행됐다.

또한, 사망자들은 가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망원인에 대해

이곳에서 해부절차를 마친 다음에야 장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작은 방에는 수술대와 검시대, 세척시설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인권을 유린당했던 시대의 역사적 현장을 보고 있으니

등줄기로 써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간다.

 

 

 

넝쿨이 온통 뒤덮고 있는 감금실로 발길을 옮겼다.

 

마치 작은 교도소를 방불케 하는 외관의 모습은

실제로도 소록도에 강제 수용된 한센병 환자들을 감금했고

금식, 체벌 등의 징벌에 강제노역 등으로 많은 한센병 환자들이 이곳에서 사망했다.

 

맞은편 언덕에 있는 소록도 자료관에서 바라본 감시실의 모습

 

소록도의 아픈 역사를 기록으로 만날 수 있는 소록도 자료관

 

한없이 평화로웠던 섬 소록도는 일제 강점기에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적으로 격리했고

이곳에서 사람들이 어떤 처우를 받고 어떻게 생활했는지

그들의 인권 유린 역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고 있으니 더는 언급하지 않겠다.

 

올해 소록도 병원 설립 100주년을 맞이해 박물관에는 역사 자료 외에도

주민들이 한센병으로 인한 장애의 손으로 만든 작품들도 함께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또다시 심각해진 발걸음으로 중앙 운동장으로 향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풀들이 운동장을 채우고 있는 중앙 운동장에 앉아 숨을 돌렸다.

생각이 사라진 머리로 멍하니 앉아 있으니 주민들 한두 명이 지나가다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묵례를 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무거운 마음을 지니고 있기엔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부드럽다. 

 소록도 곳곳은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오랜 시간 격리된 섬은 한센병 환자들의 손을 거쳐 중앙공원으로 탄생했고

편백, 향나무 등 약 100여 종의 잘 자란 나무들은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1950년대 6천 명에 달하던 주민은 지금은 약 550여 명.

주민들의 평균 나이는 70대를 넘겼고 점차 그 수는 줄고 있다.

 

격리된 소록도 백 년의 역사.

섬 곳곳에 한으로 남은 백 년의 흔적이 희미해지는 대신

더불어 살아가는 소록도 백 년의 역사로 다시 쓰이면 좋겠다.

 

 

 


 

 

 

 

 

 

일제 강점기 암울했던 시기를 살았던

영화 '동주' 그리고 소록도.

 

격리된 소록도 백년의 역사가 그대로 보존된 덕분에

소록도는 영화 '동주'의 촬영지로 선택됐고

암울했던 시대가 더욱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동주와 몽규가 후코오카 형무소에서 운명처럼 마주치던

장면에서 윤동주의 '자화상'이라는 시가 흐른다.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가다 다시 생각하니 그립고 그 과정을

다시 반복하고 이젠 추억이 된 사나이를 생각했던

윤동주의 마음.

 

영화의 장면과 내 기억이 교차하며

뜨거웠던 여름날의 소록도가

나를 뒤흔든다. 

 

뜨거웠던 여름을 보냈던 그해 여름을 지나고도

냉탕과 온탕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감정의 소용돌이의 중간에 있을 때는 

너무 아팠고, 너무 힘들었고, 

너무 외로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때도, 지금도,  

그런 순간들을 만난 것에 대한

감사함은 변함없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관계 맺음으로 인해 빚어지는

감정들은  결코 겪어 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기에.

 

경험만큼 소중한 자산이 또 어디 있으랴.

 

 

 

 

 


 

 

시인이 되고 싶었던 윤동주.

혁명가가 되고 싶었던 송명규.

 

 윤동주와 송명규의 빛났던 짧은 생은

시대의 비극 속에 제대로 꽃 피어 보지도 못한 채

광복을 몇 달 앞두고 그렇게 끝났다.

그들의 나이 고작 29세에.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중. 

 

여전히 먹먹하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 혹은 큰 전환점들은 모두 아홉수에 있었다.

열아홉이 그랬고, 스물아홉이 그랬고, 서른아홉이 그랬다.

 

기분이 묘하다.

내 인생에 남은 몇 번의 아홉수는 또 어떤 생의 전환점이 기다리고 있을까?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 겠다.

별이 바람에 스치우기에.

 

 

 

<소록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