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nkook's Diary/Ordinary Daily Life

[2015년 4월 소소일기] 4월16일 벚꽃 단상(斷想)

작은천국 2015. 4. 16. 06:30

[2015년 4월 소소일기] 4월 16일 벚꽃 단상(想)

 

 

봄이 됐다.

 

벚꽃이 화사하게 피는 4월. 

 

다시 봄이 됐다.

 

어느 철학자의 벚꽃 단상은 이랬다.

 

"벚꽃이 피는 건 약 열흘 정도다. 

벚나무는 시커먼 것이 참 보잘 것 없다.

그런데 꽃피는 단 열흘때문에 벚꽃나무로 불린다는 것을 까먹으면 안된다.  

벚꽃이 꽃 피우려면 따뜻한 햇빛을 만나야 한다.

시커멓고 못생긴 벚꽃나무가 절망하고 있다가

 어느날 태양을 만나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면서 '내가 이렇게 예뻤단 말인가' 라며

자기도 몰랐던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인 것이다.

어쩌면 벚나무는 일 년에 열 흘을 제외하고는 그냥 사는 것이다."

 

벚나무가 구름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햇빛을 만나 아름다운 시절의 꽃을 피워낸다.

 

철학자는 이런 벚꽃나무에 빗대어

사랑하면 생기가 돌고 얼굴에 꽃이 피는 것으로 벚꽃나무를 '사랑'과 연결지어 설명했다. 

 

미처 아니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피다'가 내포하고 있는 함축적인 속성에 대한 생각을 붙잡고 있다.

 

"난 벚꽃이 싫어. 참 잔망스럽잖아."

 

지인과 봄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이상하리만치 올 봄에는 '꽃' 때문에 뜻밖의 생각과 많이 마주치는데 그 중 하나가 매화꽃이다.  

 

초 봄 가족들과 양산의 순매원으로 매화를 보러갔을 때,

매화꽃이 그토록 고혹적인 향기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정말 새삼스러웠다.

고혹적인 향기에 이끌려 다시 맡아 보려고 하면 신기루처럼 향기는 오간데 없이 사라지는 것 또한 매화향기였다.

그러고 생각하니 벚꽃은 향기가 없다는 것 또한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워내는 매화의 강인함은

마른 겨울을 향기로 물리치고 있음이니 그 옛날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매화를 예찬했음이겠다.

 

 

이런 내 이야기에 지인도 비슷한 생각이라며 얘기가 오가다가

사방 팔방 벚꽃 피는 계절이니 이야기는 벚꽃에 이르렀다.

 

그리고 대뜸 벚꽃이 잔망스러워서 별로 좋아하지 않은데

올 봄에 더 싫어 졌다고 했다.

 

이유인 즉슨,

 벚꽃이 뭉쳐서 피어나기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팝콘'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지인의 친구는 벚꽃이 싫다며 그 이유로 '두꺼비가 알을 낳아놓은 모양'이라고 했단다.

 

지인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진짜 모양이 그런것 같다며

평소에도 벚꽃이 잔망스러워서 싫어했는데 친구한테 그 말을 듣고 나니

자신 또한 벚꽃을 보면 두꺼비 알이 생각날 것 같아 더 싫어진다고 했다.  

 

국어사전에는 「잔망스럽다」를 '얄밉도록 맹랑한데가 있다.'고 적고 있다. 

 

나 역시 벚꽃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얇은 가지가 버텨줄까 싶도록 뭉치로 피어 바람이 불때마다

가지째로 어찌나 요란하게 흔들리는지 가벼워도 그렇게 가벼워 보일 수가 없어

잔망스럽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폼새였다.

 

 

지인으로부터 벚꽃이 뭉치로 핀 모양새가 두꺼비 알 같다는 얘기를 듣고나니 

길게 뻗어 있는 가지에 핀 벚꽃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개구리 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우스웠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 유난스럽게도 부지런히 벚꽃을 보러 다녔다.

 

봄이 되니  '꽃'과 관련된 원고 청탁이 많이 오기도 했고

그동안 원고 쓰느라 바깥공기를 외면하고 살았던 것을 보상하는 차원 겸

운동 겸 날마다 꽃 구경을 나섰다.

 

봄 꽃들은 이파리가 나기전에 꽃이 먼저 피는게 정상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아파트의 벚꽃은 이파리와 꽃이 한꺼번에 핀다.

 

도대체 왜? 벚나무도 종류에 따라 다른 건가? 아니면 해마다 기온 탓인가? 

궁금해 죽겠는데 어디에 찾아도 답을 못 찾았다. 

 

게다사 산벚꽃을 제외하고 통상 벚꽃은 이런 모양인줄로만 알았다.

 

 

우리 동네에는 조그만 산이 하나 있다.

운동삼아, 놀기삼아 시간 날때마다 산으로 산책을 다니는데

그곳에서 참 다양한 벚꽃을 만났다.

 

이런 벚꽃도 있고~

 

 철쭉처럼 생긴 벚꽃도 있었다.

 

벚꽃은 절정의 순간을 지나 바람에 이파리들이 하나씩 날려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정의 시기를 맞이한 벚꽃에 새 한마리가 나무를 휘젖고 다니니 그 새가 지나가는 자리는 벚꽃이

동백꽃처럼 똑! 똑! 똑! 하나씩 떨어지더니 나중에는 새가 없는데도 후두둑 눈 처럼 떨어져 내렸다.

 

가장 아름다운 절정의 순간에 떨어지는 벚꽃이 어찌나 처연하던지...

 

가장 절정의 순간에 눈물처럼 떨어지는 동백꽃인지라 나는 동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벚꽃이 동백꽃처럼 떨어지기도 하는 줄 미처 몰랐다.

 

아름다움이 지닌 묘한 슬픔과 애잔함은 봄이면 피고지는 꽃처럼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나에게 벚꽃은 희미해지고 싶지 않은 '때때로의 그리움'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그해 봄은 유난스럽게도 계절이 일찍 찾아와 있었다.

상여가 나가던 날, 사방천지에는 벚꽃이 만발했다.

 문상을 오신 분들은 한결같이 '꽃길을 걸어 가신다'며 고운 날이라고 했다.

 

운구차에 앉아 차장을 스쳐가는 흰 눈 같이 화사한 벚꽃을 할머니와 함께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 특별했던 그해 봄에 말이다.

 

그리고 몇 년 간은 해마다 벚꽃이 필때면 어김없이 '할머니 가시던 날'이 생각났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를수록 기억은 희미해졌고

지금은 벚꽃을 봐도 옛날만큼 할머니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내를 잃은 사람은 홀아비, 남편을 잃은 사람은 과부, 부모를 잃은 사람은 고아라고 부른다.

그런데 자식을 잃은 사람은 그 사람을 부를 단어조차도 없단다.

 

1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자식을 잃은 사람들을 부를 단어조차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죽어서야 잊을 수 있는 그리움을 가슴에 지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벚꽃이 피는 기간을 제외하고 그렇게 시커멓게 그냥 사는 것 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더이상 꽃피지 않는 이 봄은 지난 해 보다 더 잔인한 봄일 게다.

 

이렇게 또 봄 날이, 세월이 지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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