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blesse Nomad/Interesting movie

[영화] '상실의 시대', 슬픔은 슬픔으로 이겨내고..

작은천국 2011. 4. 27. 08:30

 '상실의 시대'

슬픔은 슬픔으로 이겨내고.. 

 

 

'나는 지금 썰렁한 수족관 같은 방 안에 앉아 있다'

 

 

2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 담담하게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는 와타나베의 혼잣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는 온통 허무만이 가득 한 와타나베의 혼잣말은

주인공의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었고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엄청난 베스트 셀러를 기록했었다.  

 

 

수 차례 영화와 되려고 했던 시도는 원작자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거절로 실현되지 못하다가

섬세하고 감정적인 장면 연출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트란 안 훙의 감독에게 허락을 하였기에

영화화 된 작품으로 이 소설의 부제로도 사용되고 있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 이란 음악도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다는 소식은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더 하게 했다.

 

그렇게 나의 추억 속에 고이 잠자고 있던 상실의 시대는 스크린을 통해 깨어나고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 오래되어 소설의 줄거리도 기억나지 않지만

주인공이 느끼는 허무감과 상실감을 제외하면 줄거리 적인 면에서는

 그리 큰 공감은 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기에 영화가 보여줄 '상실의 시대'는 어떤 것일지 나름 기대가 되었다.

 

소설속의 1인칭 시점의 주인공이었던 '와타나베'역의 마츠야미 켄이치는

소설속에서 걸어 나왔다고 해도 제격일 캐스팅이었다.

 

다만, 소설과 영화가 다른 점은

소설속에서 와타나베는 37세의 비 내리는 독일 함부르크 공항에서 문득 들려오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 을 들으며

20년전,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의미가 없었던 풍경들과 자신과 여자들의 기억을 떠올리며

모든 기억과 상황들은 와타나베의 설명으로 내내 이어지고 와타나베의 심리 상태를 통해 모든 것을 유추하도록 만들고 있지만

 

영화에서는 나오코, 미도리라는 두 여자,

특히 나오코의 깊은 상처를 통해 모든 것을 유추해 내야 하는 철저히 여성 중심의 시선을 가진 영화로 재탄생했다. 

 

영화의 줄거리는 소설과 거의 흡사하게 진행된다.

다만 워낙 내용이 넓고 심리 표현이 깊은 소설을 다 옮길 수 없어 중요 장면만을 잘라서 가져오다보니

 관객들 중 일부는 감정 전달이 잘 안되어서 아쉽다는 분들도 계셨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원작에 충실한 영화라는 생각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도대체 <노르웨이 숲> 이란 곳이 정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환상을 자극하던 주인공들의 머물렀던 심리적인 공간, <노르웨이 숲> 

 

  수만평의 광활한 구릉에 바람이 불면 억새밭이 말칼퀴가 되어 떼로 일어나는  일본 효고현의 초원의 분위기는

 현실과 환상세계의 절묘한 몽환적인 공간이 적절히 뒤섞여

이 영화와 너무 잘 어울리는 배경이었기에 실지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하는 곳이었다.

 

또한, 이 영화에서 가장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줄거리    사랑을 앓고, 알아가던 스무 살의 그 때…
17살.

나, ‘와타나베’(마츠야마 켄이치)는 절친 ‘기즈키’, 그의 연인 ‘나오코’(키쿠치 린코)와 함께 항상 셋이 어울렸다. ‘기즈키’가 홀연히 죽음을 택하고 남겨진 나는 그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19살.
도쿄의 대학생이 된 나를 ‘나오코’가 찾아온다. 매주 함께 산책을 하면서 서로 가까워지게 되고, ‘나오코’의 스무 살 생일 날 우린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 후로 한동안 연락이 없던 ‘나오코’에게 현재 요양원에 있다는 편지를 받게 되고, 그 곳을 찾아가면서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조금씩 확고해져 가는 것만 같다.
20살.
같은 대학에 다니는 ‘미도리’(미즈하라 키코)가 내 삶에 들어온다. 톡톡 튀는 생기발랄한 그녀에게서 ‘나오코’와는 다른 매력이 느껴진다. ‘나오코’의 편지가 점점 뜸해지던 어느 날, ‘나오코’의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 출처 :  다음 영화 홈에서 발췌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Story.do?movieId=51508&t__nil_main_synopsis=more

 

세 살때 부터 남자친구인 키즈끼와 모든 것(심지어 사춘기의 2차 성징까지도)을 공유했던 나오코,

그랬던 키즈끼가 이유도 없이, 어떤 말도 남기지 않고 자살을 했다.

이 사건은 키즈끼의 친구들이었던 나오코와 와타나베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켰다.

 

나오코, 와타나베 이 둘의 공통점은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하고 좋아했던 키즈끼가 죽고 난 뒤의 시간들속에

그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억지로 뒤에서 미는 것처럼 시간에, 세월에 떠밀려가고 있었고

다른 점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와타나베와 달리

나오코는 철저히 자신 안으로 숨어 버렸다.

 

그랬기에 17세이던 그들은 20살이 되었지만 나오코는  여전히 17살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18살이 지나면 19살이 되고, 19살이 지나면 다시 18살이 되고 ..

그렇게 나오코는 여전히 18세와 19세의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

 

키즈끼로 인한 죽음의 상처가 나오코의 영혼에 너무나 깊이 드리웠고 그녀는 그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와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던 와타나베는 그런 그녀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었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둘은 만날 때 마다 미친듯이 정처없이 걷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깊은 슬픔을 떨처버리고자 하듯이..

요양원에 와서도 미친 듯이 걷는 방법은 여전하다.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깊은 상처를 드러내지 못했던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서서히 사랑을 느끼게 되고

 

세 살 떄부터 모든 것을 공유했던 키즈끼가 떠나고 나니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안개비에 흠뻑 젖어 오열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와타나베에게 드러내게 된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최고로 꼽을 수 있는 명장면으로 장장 6분간의 긴 롱테이크를 긴 호흡으로 이어가는데 

관객들에게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상실감을 같은 공간으로 끌여들여 나오코의 심장박동에 맞춰

같이 숨이차오도록 만들며 상실감으로 인해 곪을데로 곪아 있는 상처에 대한

깊은 공감을 끌어내고 있는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장면에서 어떻게 등장할까 촉각을 곤두세웠던 비틀즈의 노래 <노르웨이 숲>

다시 한번 나오코의 깊은 아픔을 슬픔으로 드러내는 심리적인 방편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음악이 장면과 만나니 효과 만점이었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자신안으로 숨을 줄 밖에 몰랐던 나오코는 와타나베와 연인관계로 발전을 하게되지만 

결국 죽은 남자친구인 키즈끼와 똑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반복하게 되고 

그녀는 다시 또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에 휩싸이게 되고 막다른 선택을 하며

와타나베는 사랑했던 사람의 두 번째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와탄베는 다시 철저히 혼자가 되어 슬픔과 상실의 시간속에 목놓아 울게되고

 

 

비로소 자신의 슬픔, 상처, 상실을 마주보게 되면서

죽은 이들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그 상처를 극복하게 된다.

 

 개인적으론 와타나베가 거의 야생인으로 살면서 깊은 슬픔을 정면으로 대하는 이 장면을

두 번째 명장면으로 꼽고 싶을 만큼 주인공 내면의 깊은 상실감이 제대로 잘 전달된 장면이었다.

 

확실히 영화는 영화였다.

원작이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이며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와타나베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영화에서는 와타나베, 와타나베 선배, 나오코, 미도리, 와타나베 선배 약혼녀, 요양원 언니까지

각자 사랑을 대하는 다른 모습, 각자 다른 상실감과 슬픔을 보여주면서도 

(심지어는 누가 환자이고 누가 정상인지 어떤때는 구분이 힘들기도 한다)

철저히 여성적인 입장을(특히 나오코가 중심이 되는) 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상처를 회복하는 방식에서도 나오코와 와타나베를 통해 극과 극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줄거리를 두고 소설과 영화가 접근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소설이, 혹은 원작이 더 좋다 나쁘다라는 식의 단순 비교는 좀 무리수가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다.  

 

다만, 일본인이 성(性)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유롭다고는 하지만 수위가 이 정도일까 싶은 생각은

소설에서도 그랬지만 영화에서도 역시 주요 소재가 되는 성(性)적인 부분은  

그저 상상으로만 있던 부분을 굳이 눈으로 확인했을 때의 찜찜함이 약간은 있었기에  

관객들도 이런 부분으로 인해 '이 영화는 소설로 남겨 두었어야 했다'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심리학을 전공 하고 난 이후에 보게 된 이 영화 '상실의 시대'는

십 수년전에 이 소설을 보았을 때 와는

영화의 완성도, 재미를 떠나 나에겐 다른 접근 방식으로 다가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죽음' 이라는 상실감을 느끼는 시기가 반드시 온다.

 영화를 보면서 그럴 때 과연 그 상실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 남은 자들의 고통과 슬픔도 시간이 가면 언젠가 잊혀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간이 흘러 간다고 모두가 저절로 그 상처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그 해답은 와타나베가 엄청난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원시인처럼 생활하면서

오열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확인하기 바란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그것이 무엇이었던 지금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혹은 그 시대를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에게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  어떤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치유할 수 없다.

슬픔을 슬픔으로 이겨내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

 

 

 

 블로거 메인 타이틀을 소설<상실의 시대> 속에 등장하고 있는

'인생은 비스킷통이다'라는 것에서 힌트를 얻어 아예 그 문장을 차용해서 쓰고 있는 지인도 있다.

영화 리뷰를 쓰기위해 원작의 내용이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아

십 수년전에 써 놓은 독서노트를 새로 꺼내어 보았다. ㅠㅠ

지금 내가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또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영화를 보고 나니 묘하게도 '상실의 시대' 원작이 다시 읽고 싶어진다.

 

※ 이글은 CGV 리뷰보기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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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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