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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조선시대 계획도시, '낙안읍성'

작은천국 2011. 2. 18. 08:30

조선시대 계획도시, 낙안읍성

낙안(樂安), 즐겁고 편안한 낙안에 머물다.

 

 

입장료 이 천원만 내면 현대 세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이번 낙안읍성을 돌면서 우리가 가진 전통이란 것에 참으로 인색하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면 그 곳에서 봐야 될 유적지에 대해서 족히 A4지 한 장 이상은 자료를 모으게 된다.

 그 나라의 역사, 유적지의 특징, 무엇을 중점으로 봐야하는지 등등..

그런데 우리나라를 여행할 땐 어떠한가?

대충 수박 겉핧기식으로라도 보고가는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우리 것이라 이미 다 안다고 짐작하겠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늘 그냥 한번 갔다왔다는 정도에 그치게 마련인것 같다.

 

그러나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둘러보면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 숨어있다.

그 즐거움을 찾는 것은 바로 여행을 하는 사람의 몫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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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은 늘 이맘때면 한번씩은 다니러 가게 되는 것 같다.

낙안읍성, 이번 여행까지 포함하면 벌써 세 번째 방문이 된다.

남들이 다 가는 곳이 추천하는 여행지니 나도 한 번 가보자 해서 오게되었고

이후의 방문에서는 지난 번에 왔던 곳이라고 해서 대충대충 훓고 갔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 방문을 통해 비로소 낙안읍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가치에 대해 알게 되었다.

 

현재 90세대 250명이 거주하고 있는 조선시대 계획도시

문화해설사 분과 함께 곳곳에 이야기나 넘쳐나는 낙안읍성을 돌아본다.

 

 

낙안읍성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세 면이 산(금전산, 오봉산, 백이산) 으로 둘러 쌓여있고 남쪽으로만 열려있다.

금전산의 계곡에서 흘러 내린 물은 낙안읍성의 해자를 이루고 들판으로 흘러가고 있다.

 

 낙안읍성을 외부에서 보면 배가 떠가고 있는 모양이라고 한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는 조형적으로 형상화 되는데

서쪽에 있는 빽빽한 대나무 숲은 뱃머리를 상징하며

읍성 중앙에 있는 옛날 장터의 은행나무는 돛을 상징한다고 한다.

 

지형적으로 배의 모양을 하고 있다보니 배에 물이 차면 치명적이기때문에

이 마을에서 우물을 파는 것은 금기시 되었으며 대신 얕은 샘의 물을 퍼냄으로써

배에 고인 물을 퍼낸다는 의미로 상징화 시켰다고 하니

 

이야기 치곤 그 신빙성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곳이다.

 

또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 서둘러 낙안읍성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동문을 통해 낙안읍성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해자를 건너기 위해 놓아진 돌다리 평석교위에

허름한 돌 조각상이 하나 눈길을 끈다.

 

너무 오래되어 원래 모양은 많이 훼손 되었는데 우리 전통개 삽살개라고 한다.

왜 이곳에 삽살개 형상을 만들었던 것일까?

그것의 해답은 삽살개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오봉산의 나쁜 기운을 막기위해서라고 한다.  

 

다섯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오봉산 너머로 왜가 위치하고 있어 그 나쁜 기운을 막기위해서라고도 하고

북쪽으로 위치하고 있는 진산인 금전산의 오른쪽의 위치한 오봉산이 육안으로 보기에 높이가 비슷해

진산의 기운을 해칠 수 있기에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해 삽살개를 조각을 세웠다고도 전해진다. 

어쨋거나 나쁜 풍수의 기운을 누르기위해 마을 조형물 하나까지에도 세심한 신경을 쓴 조상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읍성으로 들어가니 바닷가에서 자라고 있어야하는 해당화가 생뚱 맞아 보이는데

 지형적으로 예전에는 바닷였으리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번의 순천 방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2013년 순천에서 열리게 되는 정원 박람회 홍보를 겸하고 있어 그 일환으로 순천을 여행하게 되니 

이미 알고 있던 내용도 새롭게 인식되고 몰랐던 것에는 더욱 귀가 쫑긋해지면서 더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낙안(樂安), 말 그대로 즐겁고 편안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낙안의 여유는 골목 곳곳에서 묻어난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행복은 여유가 있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하더니 낙안읍성의 여유는 행복의 기운을 품고 있는 듯 하다.  

 

 

이 마을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낙안읍성의 군수로 부임해  성벽을 쌓았던 임경업 장군의 비석이 세워져있다.

낙안읍성의 주민들 사이에서는 임경업 장군이 15세에 축지법을 써서 하루 아침에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성벽을 쌓는 고된 노동에 동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그를 우상처럼 받들고 그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해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 한국의 전통 마을을 가다 한필원 저 참조 -

 

임경업 장군의 인간됨과 그 선정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사당을 지나

 

객사를 향해 걷는다.

 

객사앞에 있는 설명을 참고하자면 오늘날 청와대의 영빈관 같은 역할을 하던 곳이다.

 

객사는 전패를 모시는 본채와 숙소로 쓰이는 익사로 구성되는데

이는 의식과 숙소의 두 가지 건물 용도 사용되어졌기때문에 가운데가 돌출되는 특이한 모양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객사는 일반적인 한옥이 가진 일반적인 양식을 배제하고

단청, 겹처마, 이익공(기둥과 머리사이에 2개의 부재를 끼우는 것)을 사용하고 있으며

객사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이 새겨진 의자도 있는데

이는 매월 정월 초하루에는 임금께 인사를 드렸던 곳으로

왕을 상징하고 있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이 소중한 건물도 일제시대에 의해 식민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객사의 부지에 낙안초등학교를 새우고 객사를 교사로 이용하고 앞마당은 운동장으로 사용하게 했는데

백성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조성왕권의 권력을 지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현재는 복원작업을 통해 학교가 성 밖으로 이전되고 객사가 복원되어 있어 반가운 마음이 앞서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곳옆으로 아름드리 큰 나무는 이순신 장군이 숙박을 하고 심은 나무라고 한다.   

 

객사를 지나면 동헌에 이르게 된다.  

 

 

동헌은 객사보다는 작은 규모로 객사보다 높은 월대의 기단위에 놓여져 있어 일반인들이 고개를 높이 쳐들어야하도록 되어있다.

동헌이 가지는 권력의 힘을 강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동헌과 객사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두 건물 모두 완벽한 좌우 대칭이고 정면으로 시선이 모이도록  되어 있다.

또한 두 건물의 칸 수가 모두 홀 수 이며 가운데 칸을 중심으로 완전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양 옆에 있는 건물로 인해 더욱 강조가 되어 있다.

이러한 '정면성'은 권위를 상징하며 강한 정면성을 통해 객사는 완권을 동헌은 왕권을 대행하는 지방관의 권위를

건물의 구조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나타내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리얼한 송사의 장면이 담긴 조형물이 동헌에서 볼 수 있다.

 

지방관의 가족이 거주하는 사택인 내아의 공간이다.

동헌이라는 이름은 내아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 것을 왜 몰랐을까?

 

동헌을 둘러보고 나오니 눈 앞에는 낙민루가 자리하고 있다.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을 대표하는 누각으로 6.25때 불에 타 소실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해학이 가득 담긴 다양한 장승들이 관광객을 반긴다. 

 

추운 계절의 스산함보다는 고목에 잎이 나고 꽃을 피울 날을 더 기다리게 하는 봄이 코 앞인 듯하다.

 

읍성 중간즈음에는 주전부리를 할 수 있는 주막과 전통가옥 체험장등 있어 걸으면서 쉬어 갈 수 있다.

 

이 곳에서도 MBC 인기 사극 장금이가 촬영되었다.

 

큰 건물들을 둘러보고 낙안읍성을 둘러싸고 있는 서문 성벽으로 올라가 본다.

 

낙안읍성은 남북 길이가 약 310미터, 동서 길이는 남쪽에서 약 460미터 북쪽에서 약 340미터이며 성벽의 둘레는 약 1,420,미터로

상성안 면적은 약 4만 여 평으로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천천히 성벽을 걷는다고 해도 약 20분 정도는 걸리는 곳이다.

 

성벽을 걸으면서 보이는 읍성안의 굽이치는 돌담길 풍경이 정겹기만 하다.

 

특이한 나무가 눈에 뜨는데 멀겋다고 해서 멀구슬 나무로 불린다고 한다.

꽃은 어떤 모양일까?

 

한참을 걷다보니 지붕위에 사람이 올라 있어 설마 했는데

 

아니라 다를까 초가지붕을 새로 이고 있는 중이었다.

어릴 적 고향집이 초가라 2년 정도에 한번씩 초가를 이는 날은 온 동네 사람들이 전부 지붕위에 올라가

묵은때를 이고 있는 초가를 벗겨내고 있을 때 방 안의 유리를 통해 보이는 바깥 풍경은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리는 것 마냥 

굉음과 함께 요란한 먼지를 날리곤 했는데  이젠 이런 곳에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서문 성벽을 돌아 배의 머리를 상징하는 대나무숲을 돌면

누구나 아는 낙안읍성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바로 이 모습이다.

 

낙안읍성은 남문과 객사가 의식의 축으로 공간이 구성되어 진다고 한다.

그러나 아십게도 남문은 일상적으로 사용되어진 것은 아니며 새로 부임한 수령이 행차하거나 상여가 떠나는 등 공식적인 출입구이자

상여가 떠날때 와같이 특별한 의식이 있을 때 사용되었던  '의식의 축'인 곳이라고 한다.

또한 남북으로 정확한 대칭구도라기보다는 15도 정도 틀어져있는데 (동문의 그림이 직선이 아니고 사선이다)

이는 동향화의 구도 중심이 화폭의 중앙에서 약간 빗겨나 그리는 것처럼 우리나라 공간 미학의 특성이  이 낙안읍성에도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문과 서문은 일상 생활의 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문을 따라가면 순천이 동문을 따라가면 벌교로 이어지고 있어 읍성자체가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한 곳이었다고 한다.

 

 남문근처로 옹기종기 가옥들이 몰려있다. 

나트막한 담들이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들은 이 곳의 주민들이 위계질서에 의해 살던 씨족마을과 달리

여러 성씨들의 서민들이 비교적 평등을 위지하며 살던 공간임을 설명해주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남문을 향해간다.

 

마을 안에는 판소리 보존회가 있어 시간만 잘 맞추면 판소리 공연도 즐길 수 있다.

 

마을 풍경이 이런 정도까지의 시골은 아니었지만 어릴 적 살던 곳의 모습과 교차되어 어른그린다. 

 

 

성벽 옆으로는 향긋한 유자가 익어간다.

 

은은한 저녁 햇살이 드리우니  마을은 온통 가을빛으로 불들어 가는 중이다.

 

초가 지붕에도 내 그림자를 살포시 얹어 보았다.

 

몇 개 남지 않은 감나무의 까치밥도 정겨움을 더해준다.

 

다닥 다닥 맞닿아 있는 초가의 지붕을 보니 적당하게 가까우면서 적절히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마저도 비를 피하게 할 수 있었던 곳으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삭막한 도시와는 비교가 되는 주거공간이다.    

 

 

장대를 꽂아 만든 빨래줄에도 시골의 정취는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읍성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남문에 도착했다.  남문앞에는 지척으로 연못과 공동샘, 빨래터가 보인다.

 

공동샘과 빨래터에서 두드렸을 방망이 소리와 여인네들의 수다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저 멀리 웬지 어울리지 않는 기와집 한 채가 보인다. 

 

이 건물은 옥사로 마을 안 주거공간에 옥사가 위치하고 있는데  일상 생활 공간과 옥사가 어울려 있는 묘한 구조이다.

이렇게 관아에게 죄를 벌하고 옥에 가두는 생생한 현장을 사람들이 보게되니 

범죄 예방 효과면에서는 탁월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공간배치에 감탄, 또 감탄을 하게된다.

 

그러나 이런 효과도 때론 역효과가 있기마련인데 바로 절대 권력이 휘두르고 있을 때는

무고한 사람들이 잡혀들어 가면 민심은 동요될 수 밖에 없어 근대로 들어오면서 감옥은 생활공간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격리되어 멀어진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지금은 물이 말라 버리고 없는 연못에는 연꽃이 심어져 있어 여름에는 연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연못에는 원래는 미나리가 심어져 있었으며 미나리가 있는 곳은 지형적으로 성안에서 가장 낮은 곳이라

성 안의 빗물과 하수는 자연 경사를 타고 미나리가 있는 곳으로  모이는 구조였다.

미나리 꽝에서 정화된 물은 하수구를 통해 성 밖으로 배출되어지고 금전산을 따라 내려 마을을 휘감고 있는 물과 만나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나리꽝의 관리가 힘들어  전부 캐내고 주거지에서 발생한 하수의 유입을 차단시키고 연을 심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후의 생활화수는 어떻게 처리 되고 있을까 몹시 궁금해 진다.

그저 단순한 미나리조차도  조상들의 슬기와 지혜가 묻어 있는 낙안읍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엄마 손을 잡고 마실 나온 동네 주민 마냥 모녀 지간이 정겨워 보인다.

 

초가집 위에 드리운 나무그림자도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낙안읍성이 가장 생동감있게 느껴질때는 바로 지금처럼 초가지붕을 새로 이었을 때라고 한다.

즉, 황갈색의 담과 회갈색의 땅이 환한 초가 지붕의 색깔을 더욱 밝아보기에 하는 효과때문에

스산한 겨울임에도 보는 이로 하여금  겨울이 웬말이냐 싶게 따스함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살았던 낙안읍성엔 그 세월의 높이만큼  나무가 하늘 향해 가지를 뻗어가고 있는 중이다. 

 

성곽을 따라 한바퀴 도는 것도 끝이 날 즈음  흰 눈이 내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무언가 하얀것들이 몽글 몽글 맺혀있다. 바로 목화밭이었다.

실지로 목화 흰 송이가 이렇게 핀 것은 처음 보았는데 꽤나 신기하게 보였다.

 

옛날에는 한 겨울 따뜻한 솜 옷으로 만들기도 했다고 하지만 

왜 난 뜬금없이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같이 ' 하던 쌍 팔년도에나 불렀을 법한 동요가 생각나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하여튼 계란처럼 터지는 흰 솜털을 보니 신기한 물건 본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낙안읍성 홈페이지 : http://www.nagan.or.kr/site/home/

 

 

시간과 여유를 두고 충분히 낙안에서 즐기는 것도 한 방법이 될 듯하다.

 

낙안읍성을 돌아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사는 곳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고 주거공간이 발달하였고

그 공간에는 마을 사람들의 삶의 지혜와 사상과 철학이 담길 수 밖에 없었다.

즉, 조상들은 사람이 사는 거주지만으로 한정한 것이 아니라 주변 자연환경에 일부가 되도록 구성을 했던 것이다.

낙안읍성의 사례만 보아도 익히 알수가 있다.

세상은 점점 문명화되어가고 우리 것은 점점 사라지고 서구화의 표준에 맞추어지고 있있다. 

똑같은 장소에 층층이 사람들이 누워있는 아파트가 현실인 것이다.

 

현실적인 편리함으로 인해 우리네 고유의 주거공간마저 내 줄 수 밖에 없었지만

마을의 공간배치에도 철학과 사상을 답고 자연환경의 일부가 되도록 구성을 했던

조상들의 슬기는 어쩌면 모든 것이 속도전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것에서 부터

조금이나마 여유를 주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한옥이 더 사랑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포스팅의 일부 글들은 낙안읍성 문화해설사 분의 설명과 더불어

<한국의 전통마을을 가다> 한필원 의 책을 참조하고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전통마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들은 책을 보시면 굉장한 도움이 될듯합니다.

 

다음 포스팅은 정말 아는 만큼 느끼게 된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했던 송광사로 이어집니다.

송광사 구석구석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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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