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o Yong Pil/YPC history

음악가 조용필의 모든것

작은천국 2008. 1. 26. 22:45

※ 네이버 검색 [아이디:limsohyuk, 2004.3.17 '조용필' 검색]에서

 

80년대의 신화, 조용필
▶ 무명가수에서 위대한 탄생으로

조용필은 현재 '민족혼을 부르는 가수'라고 하거나 모든 세대를 아우르던 '80년대의 가왕'이라고 불리는 것과 달리 앞에 나서서 노래 부른 기억이 거의 없는 평범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그는 맹인가수 레이 찰슨의 「당신에 대한 사랑 멈출수없어」(I Can't Stop Loving You)의 목소리에 감명받아 팝음악광이 되었고, 내한공연을 한 벤처스의 「상하이 트위스트」「파이프라인」「불독」등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기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음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염전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경기도 화성군의 송산 중학교 설립자로 교육자 집안에 연예인이 나오는 것을 몹시 반대했다. 그러나 반대가 심할수록 그의 결심은 굳어져갔다. 대입준비 대신에 음악학원을 드나들던 그는 졸업하자 마자 뜻을 같이한 친구들과 가출해 파주의 기지촌을 기웃거렸다. 오디션에 합격해 무대에 설 수있었지만 단 하룻만에 해고되었다.

 열댓곡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것으론 어림없었다. 45분씩 하루 6차례이상 서야하는 무대라 100여곡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대로 물러설수 없다며 연습에 열중한지 얼마지 않아 부모들이 찾아와 멤버들은 모두 흩어지고 만다.
혼자가 된 조용필은 다시 문산근처 기지촌에서 무명밴드에서 연주를 시작한다.그러다가 69년초 '파이브 핑거스'에 스카웃 돼 미8군무대에 서게 된다. '파이브 핑거스'밴드는 A클라스의 평가를 받고 있는 유명한 팀으로 실력있는 그룹의 집합장소였던 이태원까지 진출한 팀이다. 그러나 1년반동안의 활동은 집에서 형이 그를 찾아오는 것으로 마감됐다. 그러나 '파이브 핑거스'의 활동은 제임스 브라운, 윌슨 피케트, 템테이션 등 흑인음악에 심취하는 등 조용필에게 뮤지션으로서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

이즈음 기타리스트로 연주하던 조용필이 가수로 변신하게되는 계기가 생긴다.다시 두번째 가출을 감행한 조용필은 친구의 부탁으로, 한 무명 밴드에서 대타로 노래까지 하게 되었다. 평소 주로 「점핑 잭 프레쉬」(Jumping Jack Fresh)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때」(When a Man Loves a Woman) 「아이 필 굿」(I Feel Good)등 소울풍 노래를 주로 불렀는데 어느날 한미군병사가 생일 축하곡으로 재즈뮤지션 바비 블랜드의 「리드 미 온」(Lead Me on)을 부탁해 노래를 불렀다. 이후 이곡은 조용필의 주요 레파토리가 되었다.


70년 말 조용필은 '에드훠' 출신 드러머 김대환과 이남이 등과 함께 '김트리오'로 활동한다. 그는 후에 김트리오에 합류한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과 투 기타 시스템으로 기타나 보컬면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며 실력을 쌓아갔다. '김트리오'는 수준급 밴드로 인정받았고 이듬해 '사랑의 자장가','하얀모래의 꿈','님이여'등 6곡이 담긴 앨범을 출반했으나 발매가 되지않아 기념음반이 되었다.

이때 그는 프리재즈를 하던 강태환에게 '청음'(곡을 듣고 채보하는것)을 배우기도 했다. 72년 이미 세상은 고고취향으로 바뀌어 팀의 색깔과 다른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매니저격이던 김대환이 재즈를 하겠다며 손을 떼면서 팀이 해체된다.
그후 조용필은 브라스팝밴드였던 초기 '시카고'의 음악에 매료되어 처음으로 독자적으로 그룹을 결성한다. 그것이 트럼본 둘, 트럼펫 둘, 건반, 기타, 베이스, 드럼 등 시카고와 동일한 편성의 8인조로 이뤄진 '조용필과 그림자' 이다. '조용필과 그림자'는 서울 일류 고고클럽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군복무를 마칠때쯤 킹레코드사로부터 취입 제안을 받는다.그래서 발매된것이 76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이다. 이곡은 72년초 '김트리오' 시절 이남이와 함께 통기타를 연주하며 불렀던 곡이었는데 당시 4분의 2박자 '뽕짝'이었던 것을 젊은취향의 4분의 4박자로 편곡, 국내 최초의 트롯고고를 시도한 것이었는데 처음엔 반응이 시원찮았다. 그러다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마침 재일동포 모국 방문으로 그 인기를 더했다. 그렇게 부산에서의 인기가 서울로 올라오며 전국을 휩쓸었다. 조용필이란 이름이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얼마지 않아 조용필이 대마초 가수라는 투서가 들어왔고 소문이 돌았다.

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이 연예가를 휩쓸었을 때 조용필 역시 구속되었다. 과거에 뭔지도 모르고 피우다가 알레르기 반응이 생겨 곧 중단하긴 했어도 대마초를 몇차례 피웠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무명이었고 죄가 경미해 활동금지는 면했었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기가수 대열에 서자 과거 경력이 다시 문제가 되었고 결국 다른 가수들처럼 79년 완전 해금까지 활동금지가수로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조용필은 '한 오백년'을 우연히 듣고는 그길로 그야말로 피나는 발성연습에 들어갔다. 반년 가까이 전국 각지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수차례 피를 토한 끝에 3옥타브 5음계까지 음폭을 넓혔고 진성에 탁성과 가성까지 겸비하여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창법을 개발했다. 득음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과거에는 도저히 되지 않았던 허스키 보이스로 로드스튜어트의 노래를 맘껏 부를 수 있었고 흥보가의 한장면인 '흥부가 놀부에게 구걸하는 장면'도 원래 판소리보다 멋들어지게 불러제낄 수 있었다.

대마초 사건은 조용필에게 그의 음악인생이 끝난것이라는 생각으로 좌절하게 하였지만 음악적 수련의 시간을 마련해주었고 결국 그의 가수로서의 새로운 능력을 쌓게 하기도 했던 것이다.
78년4월 대마초 가수들의 활동 완화 조치가 발표됐다. 방송을 제외한 무대에 설 수 있게된 조용필은 바로 멤버들을 모아 클럽에서 활동하며 죽기살기로 연습에 몰입한다. 엄청난 연습에 지쳐 멤버 교체가 몇차례 있었고 대마초가수 이미지를 벗기 위해 외국곡만을 고집하는 그룹이었지만 꾸준한 연습으로 음악인들 사이에서 '완전한 그룹' 알려졌다. 그러나 79년 10.26이 터지고 계엄상황에서 야간 업소가 어려워지자 이들의 활동 역시 어려워 졌고 곧 멤버들은 흩어졌다. 혼자가 된 조용필은 그해 12월 해금을 맞는다.

그리고 얼마 후 동아방송 라디오 주제가 였던 '창밖에 여자'를 만들고 전속이던 지구레코드에서 앨범 준비에 들어간다. 그룹이름도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어두운 이름 대신 '위대한 탄생'으로 바꾸먀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했다. '위대한 탄생'은 완벽한 레파토리를 구사하는 록그룹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지옥훈련과도 같은 연습을 하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현악기나 관악기를 배제하고 신세사이저를 적극 사용했던 그룹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진보된 사운드에 세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 가 들어간 1집은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며 대히트를 하고 완벽한 조용필의 시대를 연다.

1980년 조용필은 무명의 그림자를 지우고 위대한 탄생을 하게 된다.

▶ 조용필과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조용필은 1집을 발표하기 전부터 핑크 플로이드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그 영향은 3집부터 5집까지 그의 앨범에 깊게 반영되어있다.

물론 1집의 타이틀 곡 '창밖의 여자'도 핑크 플로이드의 영향이 짙게 베어있는 곡이다. 신세사이저로 시작해서 곡 전체에 깔리는 이 곡은 핑크 플로이드를 곧 바로 느낄 수 있다. 진중한 느낌의 기타솔로 역시 그러하다. 3집에서 5집으로 가면 갈수록 그들의 화려하고 웅장하면서 충만한 느낌의 사운드로 채워가고 있다
조용필은 핑크 플로이드의 영향하에 있었다.


그들의 사운드를 그가 구사하고자 한다는 것은 조용필의 음악이 본질적으로 록을 지향한다는 말이다. 즉, 그가 하고자 하는 록은 웅장하고 메시지 강한 깊이있는 사운드인 것이었다. 바로 그가 구사했던 신세사이저 올겐, 기타, 베이스 등의 사운드는 그것은 핑크 플로이드에 영향받은 것들이다.
조용필은 여러 인터뷰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했다.한 인터뷰에서는 좋아하는 음악인으로서 REO 스피드웨건과 핑크 플로이드를 지목하기도 했다. 아래 핑크 플로이드의 노래들을 들어보자.

one of these days shine on you crazy diamond run like hell
'one of these days' 에서는 '못찾겠다 꾀꼬리'의 모태를 찾을수있으며 'shine on you crazy diamond'의 사운드는 조용필 1집에서 5집까지의 음악에 기본 베이스가 되는 곡이라는 것을 알수있다. 이곡은 그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곡 이다.

또한 그들의 대표곡인 'the wall'의 기타사운드도 조용필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나는 기타 만큼이나 키보도의 웅장하고 화려한 세계를 사랑한다. 그래서 그냥 달리는 심플한 록 보다는 플로이드 같은 사운드 메시지가 충만한 록을 좋아한다. (리뷰, 조용필VS강헌 가왕 조용필)

조용필의 5집까지의 웅장한 사운드는 그가 말하는 핑크 플로이드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는 핑크 플로이드를 얘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얘기이기도 하다.

iii) 1집 창밖의 여자(80년3월) side A

창밖의 여자(배병숙 사/조용필 곡)
돌아와요 부산항에(황선우 작사, 곡)
잊혀진 사랑(김중순 사/김희갑 곡)
돌아오지 않은 강(임택수 작사,곡)
정(조남사 사/김학송 곡)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오사랑 사/허영철 곡)

side B
단발머리(박건호 사/조용필 곡)
한 오백년(민요)
대전 브루스(최치수 사/김부해 곡)
너무 짧아요(윤철 사/조용필 곡)
슬픈 미소(유현종 사/조용필 곡)
(군가)너와나

79년 조용필은 해금을 즈음해서 지구레코드와 10년 전속 계약을 맺는다. 한해에 앨범 하나씩이라는 불문율로 인해 그는 10년동안 최소한 10개의 앨범을 내어야 했다.
조용필은 지구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80년 3월까지 녹음을 마친다. 이것은 그가 해금을 기다리며 1집에 대한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집은 그가 반드시 상업적으로 성공해야하는 앨범이었으며 성공을 위해 다양한 음악적인 고려를 하고있음을 알 수 있다.

- 윤시내의 '열애'와 '창밖의 여자'
'창밖의 여자'는 윤시내의 '열애'를 조용필 스타일로 만든 곡이다.
79년도에 윤시내는 가요제 스타일의 곡 '열애'로 대히트를 했다. 이곡의 핵심은 윤시내의 핏발서는 가창력과 현을 주로쓰는 팝 오케스트라 편곡의 스케일이 큰 곡이라는 점이다. '열애'는 이후 80년대초 주류성인가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큰 히트곡이던 '창밖의 여자', '잊혀진 계절', '사랑의 미로', 'J에게' 등의 사운드와 곡의 스타일은 모두 '열애'를 바탕으로 한것이었다.

조용필도 당연히 가장 주류이던 스타일을 지나칠 순 없었으며 '창밖의 여자'를 통해 가요계의 주류스타일에 접근했다. 당시의 이런 곡들은 대부분 현이나 피아노에 바탕을 둔 사운드였으나 조용필은 'shine on you crazy diamond'에 쓰인 스타일의 신세사이져를 현대신 과감하게 도입했다. 또한 독특한 핑크 플로이드 스타일의 기타 솔로도 선보였다.
조용필은 이때에 '창밖의 여자'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80년대 초만 해도 생악기가 아니면 안�쨈募� 편견이 지배적이었지만 나는 신시사이저의 전자음악이나 ..(리뷰)

80년대 초에 '창밖의 여자' 같은 스타일의 노래는 바이올린 선율이 깔리는 게 기본이었지만 조용필은 그것을 거부하고 신세사이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주1)
그리고 대중들은 그 사운드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열애(윤시내) 잊혀진 계절(이용) 사랑의 미로(최진희) J에게(이선희)

'사랑과 평화', '들고양이들', 조용필 등 소수만이 신세사이져 위주의 사운드를 선보였다.
그들은 당시 최첨단의 사운드를 구사하는 몇 안되는 음악가들 이었다. 첨단 악기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것은 악기가 엄청난 고가이고 귀한데다 당시의 아날로그 신세사이저는 후에 보편화된 FM방식의 신세사이저 처럼 사용하기 편리한 악기가 아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단발머리'
'단발머리'는 사랑과 평화가 보여줬던 최이철의 트레이드마크인 와우와우를 쓴 펑키풍의 리듬기타사운드와 김명곤 식의 화려한 신세사이저 편곡이라는 가요의 가장 대표적인 펑키스타일을 도입한 곡이다. 조용필은 여기다가 일렉트릭 드럼의 멋진 사운드를 선보였다.

'단발머리'의 첫 부분의 신세사이져 멜로디와 뒤에 곧 바로 등장하는 일렉트릭 드럼의 소리는 전국민을 열광시켰다. 그것은 80년대를 맞으며 모든사람들이 갈망하고 꿈꾸어왔던 바로 그 사운드였다. 그리고 조용필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것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는 모두 70년대 막바지에 만든 곡이다. 전자가 과거와 기존의 세대들의 갈망을 대변한다면 후자는 이제 시작하는 미래와 다음세대의 갈망을 담으려고 했다.(중략)
이에 비하면 '단발머리'는 하나로 가는 음악이다. 그러나 그냥 가는데 나무가 무수히 많다. 나는16마디에서 A-B-A로 반복하는 당시 우리 대중음악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첫앨범으로 간주하는 80년 앨범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똑같이 원하고 있었음을 절감할수 있었고, 이제는 마음대로 만들고 펼쳐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80년대초만 해도 생악기가 아니면 안된다는 편견이 지배적이었지만 나는 신세사이져의 전자음악이나 '단발머리'에서 사용한 메이저 세분같은 당시로선 낯선 코드를 과감하게 썼다. 하지만 그것은 60년대말에서 70년대 말에 이르는 10년간의 음악 훈련의 축적물일 뿐이다. 내음악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의 이면엔 음악까지 장악하고 있는 통행금지 시대에 대한 분노가 암묵적으로 들어있다고 본다.(리뷰)

- 그밖의 곡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조용필이 무척 싫어하는 노래였다. 녹음할 당시에도 그 노래는 기억하기 싫은 노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상업적 성공을 위해 1집에 그 노래를 넣었다. 어쨋던 이 곡은 1집을 대표하는 노래였다.이 노래는 원래 트로트고고로 편곡된 곡이었다. 1집에는 트로트펑키로 편곡되어 있고 신세사이져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이때에는 펑키가 최 첨단이고 가장 신나는 리듬이었다. '잊혀진 사랑'도 트로트곡이며 역시 펑키스타일로 편곡했다.

'너무 짧아요'는 트로트곡이지만 다른 곡에 비해 가볍고 경쾌하다. 음악을 들어보면 들고양이 식으로 편곡되어있음을 알수있다.
'한오백년' 역시 조용필을 대표하는 곡이며 모두 알다시피 민요이다. 민요는 당시 가요계에서 주류스타일중의 하나였으며 조용필의 입장에서는 외면할 수 없는 장르였다. 그러나 이 민요를 조용필은 천편일률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핑크 플로이드에 영감을 얻은 시세사이져 선율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조용필은 이 곡에서 득음단계의 목소리로 열창을 보여주어 사람들을 감명시켰다. 그는 그 이후에도 국악과 가요를 접목하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

조용필은 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얼마지 않아 대마초 파동으로 가수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각고의 노력끝에 목소리를 만들어내고 80년 음반을 내었다. 그에게는 무명의 10여년의 정리하는 도약의 앨범이 되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의 자신의 음악적 노력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또한 더불어 성공을 염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상업적 성공과 음악적 성취 양자를 조화시키려고 했고 그것은 멋지게 성공했다.

10.26으로 마감된 유신통치와 함께 들려온 조용필의 새로운 사운드는 사람들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미래에 대한 갈망과 일치되었고 조용필은 그의 노래를 통해 갈망을 정확하게 표현해 내었다. '창밖의 여자'가 잠들어야 할 어두운 과거를 노래 한 것이었다면 '단발머리'는 80년대라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 설레임을 표현한 것이었다.

결국 80년대는 조용필의 새로운 음악과 함께 시작되었고 스스로 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가 되었다. 이제 그 성공을 바탕으로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좋아하게 되었다.

대마초 파동이 없었더라면 80년대의 나는 없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정말이지 애증이 교차하는 노래이다. 그땐 이노래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어디 공연가면 전부 외국노래만 불렀다. 하지만 이 노래는 내 운명을 바꾸어버린 노래가 아닌가? 3년이 지나 박대통령이 죽고 나서 다시 컴백 했을때 그때서야 이노래가 좋아졌다. 왜? 미우나 고우나 내 데뷔곡이니까. (리뷰)

창밖의 여자(배명숙 사/조용필 곡)
단발머리(박건호 사/조용필 곡)
단발머리LIVE(영11)

▶ 2집 촛불(80년12월)
92년 서태지가 '난 알아요'를 성공시키고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돌연 방송중단 선언을 했다. 다음 앨범을 준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지금은 이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서태지 이전에는 이런 관행이 없었다. 방송 활동이 가수 생명과 직결되는 상황에서 가수들은 방송국에서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갔다. 
서태지 이전에는 젊은 취향의 가수들은 대부분 '반짝이'였다. 사람들은 단발 가수들을 보고 '반짝이'라고 비웃었다. 그리고 서태지도 단명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태지는 일회성 단발 가수가 아니었다. 그는 다음 앨범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대중에게 다시 선을 보였다. 서태지 이후에 젊은 취향의 가수들은 단명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조용필은 1집 성공 이후에 방송을 모두 장악했다.
1집에 담긴 대다수의 곡들이 히트 했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방송에서 히트곡 한곡을 달랑 부르는게 레파토리의 전부인데 반해 조용필은 몇십분동안 적어도 서너곡은 불렀으며 자주 쇼프로그램의 전체를 맡기도했다. 그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에 여자', '단발머리', '한오백년'까지 트로트에서 민요, 신세대 취향의 곡과 팝송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를 티비앞으로 모이게하는 유일한 완전한 가수 였다.

게다가 그의 밴드 위대한 탄생은 조용필이 1시간 이상의 완벽한 무대를 보여줄수있게 하는 힘이되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조용필을 찾았고 방송은 그를 세우기에 바빴다. 방송국은 마치 조용필의 독무대 같았고 다른 가수들은 그만큼 입지가 좁아져갔다. 이은하 혜은이등 몇몇 가수만이 틈새시장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80년대 초 조용필은 가요계를 장악했다.

부르는 곳이 많고 그가 서야 할 무대가 너무나 많았다. 조용필은 한시도 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덧 1년이 흘렀다. 그는 10년에 10장을 매해마다 내야 하는 지구레코드와의 계약이행을 위해서 2집을 발표해야 했다. 또한 조용필은 음반회사의 보이지 않는 압력속에서 트로트곡을 앨범마다 삽입시켜야 했다. 그는 지금도 2집의 녹음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한다. 

2집 타이틀인 '촛불'은 물론이고 '인물 현대사', '간양록'등이 드라마 주제곡이었다. 1집만큼은 히트하지 못했지만 촛불이 인기를 얻었고 '잊기로 했네'등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결국 2집은 음반회사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음반이 되었지만 조용필은 2집은 정규앨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용필은 연일 방송이라는 살인적인 스케줄 상황하에서도 자신의 음악성을 계속해서 유지 발전시켰다. 그것은 그의 대단한 음악성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촛불(이희우 사/조용필 곡)

▶ 3집이후, 록으로 선회하다
조용필은 1집 성공 이후 이제는 자신이 하고싶은 음악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2집의 연속 히트로 조용필을 찾는 곳은 더욱 많아졌지만 그는 81년 3월 돌연TV출연을 거부했다. 다음앨범을 낼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주2) 그렇게 3집을 준비했고 81년 7월 3집을 발매했다.

3집 미워 미워 미워(81년7월) 주3)

3집에서부터는 그가 꿈꿔왔던 사운드를 구현하기 위해서 정진하기 시작한다. 비록 1,2집에서 트로트곡을 히트시켰지만 3집에서는 트로트는 넣지 않겠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그의 고집을 억지로 꺽어 결국에는 '미워 미워 미워'를 부르게 했고 그곡은 히트됐다. 주4)

그가 원래 하고 싶었던 음악은 록이다. 3집에서 선보인 '고추잠자리', '여와남', '물망초' 등의 곡들은 1집의 것들보다 자신이 목표로 했던 사운드에 진일보 한다. 1집에서의 핑크 플로이드의 특징적 요소를 가져다 쓰는 어설픈 모방에서 나아가 자신이 목표로 하는 핑크 플로이드 풍의 웅장하고 화려한사운드에 한발더 접근한 것이다. 또 사운드 뿐 아니라 메시지도 보다 충실히 담기 위해서 노력한다.

고추잠자리(김순곤 사/조용필 곡)
여와남(김형윤 사/조용필 곡)

4집 못찾겠다 꾀꼬리(82년5월)
4집에서는 'one of these days' 에 영양받은 자신의 가출시절을 노래한 '못찾겠다 꾀꼬리'와 '생명', '자존심', '비련' 등이 담겨있다. 4집은 3집에 비해 앨범이 보다 록적인 색체를 띄게 된다. 조용필은 3집에서 '고추잠자리'를 통해 하고싶은 음악이 먹히는가 슬쩍 실험해 보았다. 물론 경쾌한 댄스비트를 섞는 형식으로 록에 대한 의지를 감춘상태로. '고추잠자리'는 기성세대까지 휘몰아치치는 못했지만 그에게 록에 대한 가능성에 희망을 갖게 했다. 그는 록색체를 가미해가면서 그는 자유를 느꼈다고 한다. 그것의 연장선상에 '못찾겠다 꾀꼬리'를 놓고 한걸음 더 몰아쳐갔다.


'고추잠자리'가 모든 세대에게 먹히지는 않았다. (중략)내가 엄마를 부르고 고추잠자리를 부르는 것은 하나의 절규였다. 내가 노래하겠다고 하자 호적에서 지워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우리 집안이나 독재로 얼룩졌던 우리 사회나 얼마나 보수적인가? 엄마와 고추잠자리를 찾았을 때 나는 나의 자유를 만끽했고, 그 힘이 4집의 '못찾겠다 꾀꼬리'로 이어졌다. 분노가 자신감으로 확장되었다고 할까? 이 노래는 집을 뛰쳐나와야 했던 내 마음을 그대로 밀어버린 곡이다. '등꾸따가 등꾸따가'로 나가는 흥분의 리듬을 먼저 설정했고, 첫 대목의 보컬에서 느낄 수 있듯이 아주 건방지게 불렀는데 그것은 나는 당돌하게 살아야 겠다는 의지와 같았다. (리뷰)

'고추잠자리'가 록으로 갈것인가를 고민한 것이었다면 '못찾겠다 꾀꼬리'는 자신감의 획득이다.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록을 자신의 음악으로 밀어붙여 목표로하는 사운드를 이루어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조용필은 4집의 목표를 그룹음악으로 삼았다. 주5) 그가 말한 것은 이제 록 음악을 목표로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3집을 잇는 '못찾겠다 꾀꼬리', '자존심' 등으로 흥겹고 밝은 색깔로 한 축을 마련해 놓고 또 다른 한축으로는 보다 본격적인 록넘버 '생명'을 통해 광주학살의 분노를 노래한다.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록의 모습인 장엄함과 진진한 메시지와 깊은 사운드를 가진 '생명'을 만들었다. 그는 방송에서 이곡을 부르며 대중을 향해 록의 가능성을 재차 질문한다. '생명'은 조용필이 보다 충실한 록 사운드를 만들고자 한 것이엇고, 대중들은 그 음악을 받아들였다. 이제 그는 보다 전진할 수 있게 되었다. 
조용필은 이렇게 점점 록적인 색체를 강화시켜나갔지만 위대한 탄생의 멤버들의 연주실력은 조용필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생명'으로는 미흡했다. 보다 웅장하고 스케일이 큰 록정신이 충만한 사운드를 5집에서는 선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5집에서는 멤버 전원이 교체되게 된다.

못찾겠다 꾀꼬리(김순곤 사/조용필 곡)
생명(전옥숙 사/조용필 곡)

5집 산유화(83년6월) side A
산유화(정광우 사/조용필 곡)
친구여(하지영 사/이호준 곡)
한강(김순곤 사/조용필 곡)
여자의 정(임석호 작사, 곡)
나는 너 좋아(김순곤 사/조용필 곡)

side B
이별의 뒤안길에서(임석호 사/이호준 곡)
황진이(장두익 사/조용필 곡)
비오는 거리(정욱 사/정풍송 곡)
선구자(가곡)

5집에서는 이호준과 송홍섭을 중심으로 위대한 탄생의 멤버가 모두 갈렸다. 4집의 '생명'의 사운드가 그가 하고자는 것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용필은 4집에서 '생명'을 만들었으며 이제는 그가 원하는 스케일이 큰 멋진 록사운드를 구사할 방법을 찾아내었다. 4집은 본질적으로 록음악을 목표로 했지만 조용필은 4집의 사운드를 록이라고 분명히 말할 자신은 없었다. 그저 그룹의 음악이라고 말할 뿐이다.

이제는 실력있는 새멤버를 갖추었으며 조용필도 제대로된 록 사운드를 펼칠수있는 기량을 갖추게 된다. 그는 5집 '산유화', '한강', '황진이'를 통해 그가 데뷔초부터 꿈꿔왔던 록사운드를 현실로서 구현할수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를 현실의 음악으로 바꿀수있는 방법을 찾아내었으며 핑크 플로이드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음악을 펼칠 수 있게 된것이다. 그는 5집을 만들고나서 이후 음악이 그의 최고의 음반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조용필은 5집을 통해 자신의 목표로 했던 사운드를 자신의 것으로 이루어냈다. 그러나 그는 핑크 플로이드 사운드를 흉내낸 것이 아니다. 5집의 조용필 음악을 들어보면 그것들이 멋진 사운드에 록음악임에도 불구하고 듣는사람은 그것을 서구적인 음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판소리를 듣는것 같은 전통한국음악의 느낌을 받는다. 그의 음악은 그만큼 친근하다. 그것은 조용필이 서구지향적인 록음악을 한국적인 정서로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즉, 그는 서양음악 어법에 한국인만의 정서를 담기위해 오랫동안 애쓴 결과이다. 그것은 5집의 대표곡들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

친숙하다는 것은 그것의 소중함을 간과하게 한다. 그는 피를 토하며 목소리를 갈고 닦았으며 록에 한국적인 정서를 노래로 담아냈다. 그러나 그 노력은 그가 달성한 깊이를 오히려 가리는 역할을 하게된다. 사람들은 조용필의 친근함이 그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루어졌음을 간파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가 록적이지 못함을 지적 한다.
혹자는 5집이 주제의식이 깊어져 다른 앨범보다 시들했던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렇지 않다. 가곡풍의 '친구여'와 더불어 '나는 너 좋아가' 크게 히트를 기록했고 '산유화' , '한강', '황진이'등도 인기몰이를 했다. 조용필은 1집부터 5집까지 앨범을 통째로 히트시키며 최고의 자리를 놓은 적이 없었다.

산유화(정광우 사/조용필 곡)
한강(김순곤 사/조용필 곡)
황진이(장두익 사/조용필 곡)

▶ 7집 조용필 사운드의 완성

6집 눈물의 파티(84년2월)

6집은 앨범 스케줄 상 기성 작곡가의 곡으로 채워졌다. 즉, 트로트 앨범이다. 조용필은 5집을 만들고 다음 앨범이 자신의 역작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때 결혼시기와 맞물려 앨범을 낼 만한 상황이 못되었다. 또 우리 가요계의 여건상 앨범에 1년에 하나씩 내야하는 상황에서 조용필은 6집을 다른사람에게 곡을 맏기는 징겁다리 전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자신은 시간을 벌며 7집을 준비하고 있었다.

2집이 그러했드시 6집 역시 살인적인 스케줄과 1년에 앨범 하나이상을 내어야 하는 음반사의 관행에 시간이 버텨내지 못했다. 그것은 85년 상반기 7집의 폭발이후 연이어 하반기에 나온 8집도 마찬가지이다. 이러다간 자멸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압박감 아래서 다른 사람의 곡으로 6집을 만들때 이미 7집의 곡을 쓰고 있었고, 하나에 집중하고 하나를 건너뛰는 징검다리 배팅이랄까, 비지니스의 룰 속에서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킬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리뷰)

7집 들꽃(85년4월) side A
눈물로 보이는 그대(양인자 사/조용필 곡)
어제 오늘 그리고(하지영 사/조용필 곡)
프리마돈나(이성만 사/이범희 곡)
나의 노래(양인자 사/조용필 곡)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엔(조용필 작사,곡)
그대여(하지영 사/조용필 곡)

side B
들꽃(하지영 사/이범희 곡)
사랑하기 때문에(유재하 작사,곡)
미지의 세계(하지영 사/조용필 곡)
아시아의 불꽃이여(소수옥 사/조용필 곡)

여행을 떠나요(하지영 사/조용필 곡)
진짜사나이(건전가요)

7집은 위대한 탄생 사상 가장 화려한 멤버로 녹음되었다. 7집은 핑크 플로이드 스타일의 사운드에서 벗어나서 80년대 주류 팝 음악의 감성을 담은 록 사운드로 구성되었다. 지구 레코드에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첫곡은 '눈물로 보이는 그대'가 트로트 사운드로 앨범의 흠집을 내고 있지만 나머지 곡들은 조용필의 야심적인 새로운 록 사운드로 가득차 있다. 과거 조용필은 웅장한 사운드로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다면 7집에서는 최고의 멤버들과 함께 세련되고 현대적인 사운드로 미래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5집에서 조용필은 자신이 원했던 음악을 만들고는 신진의 새로운 인물을 찾았다. 이제 조용필의 사운드를 만들어야 했고 그것을 위해서 가장 실력있는 음악인들이 필요했다 이때 위대한 탄생 멤버로는 미국 버클리대 출신인 정원영, 김광민, 젊은 나이에 요절한 유재하, 사랑과 평화의 송홍섭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6) 조용필은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다고 말한다.

나는 운이 좋았다. 당시 위대한 탄생에 유재하, 김광민, 정원영 같은 젊은 친구들이 쟁쟁하게 포진하고 있었으니까. 7집의 수록곡 '사랑하기 때문에'를 만든 유재하는 당시 한양대 음대 재학중이었는데, 미국 순회 공연을 앞두고 학장의 허가가 안나 도중하차했다. 지금도 나는 저 친구들 때문에 내가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리뷰)

조용필은 자신만의 록 사운드를 완성했고 그의 음악은 젊은이를 하나로 묶을수 있는 사회적 장르였다. 그는 한국 젊은이의 대변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록이 좋다. 젊음이 좋다. 이 시대를 음악으로 얘기하고 싶다. 그것을 불만, 흥미, 거짓, 사랑을 얘기하며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이 시대의 가장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제, 오늘 그리고' 와 '미지의 세계' '여행을 떠나요' 같은 노래를 만들 때 나는 더 이상 젊지 않았지만 난 젊음의 대변인 이라고 생각했다.(리뷰)

아시아의 불꽃(소수옥 사/조용필 곡)
어제 오늘 그리고(하지영 사/조용필 곡)
미지의 세계(하지영 사/조용필 곡)

▶ 85년 가요계의 변화와 조용필의 선택
8집 허공/킬리만자로의 표범(85년12월)
9집 마도요(87년4월)

8집은 성인을 위한 서비스 앨범이며 동시에 음반회사에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징검다리 앨범이다. 그런데 원래 이 앨범에는 '한국의 애가'라는 제목이 붙을 예정이었다. 조용필은 사랑의 노래, 슬픈노래, 인간의 노래란 의미를 함축한 '애가'를 한국 가요의 대명사로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애가'론은 완강한 반대의 벽에 부딪쳤다. 우리가요가 왜 슬프기만하고 사랑타령만 하느냐는 이유였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그의 8집에는 '한국의 애가'라는 명칭이 붙지 않았다. 그러나 트로트 계열의 곡이 압도적으로 많이 실린 점으로 보아 8집은 분명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듯하다.
('조용필' 음악세계 86년 2월호 별책부록)

7집에서 조용필은 자신의 사운드를 완성하며 젊음이들을 그의 음악아래로 모이게 했다 사람들은 그의 음악적 힘을 느꼈고 그에게 오피니언 리더가 되어줄것을 부탁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과제가 우리가요에 대한 명칭 문제였던 것이다. 명칭문제를 사상하고 또 그가 작곡한 곡이 없었다 하더라도 8집은 상당히 신경써서 만든 트로트 앨범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트로트 앨범이 85년 12월에 발표되었고 인기가 있었다는게 조용필에게는 불행이었다.

85년 말은 들국화가 앨범을 발표하고 신촌에서부터 들국화 붐을 만들어가고 있던 시기였고 또 다음해인 86년 3월에는 시나위가 1집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발표해 록팬들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조용필이 '허공'을 히트시킬때 그의 커다란 세력인 젊은이들은 모두 들국화나 시나위에 열광해 있었다. 그가 아무리 7집에서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해도, 이제 '허공'을 부르고 있던 그는 여전히 인기 가수일지언정 더 이상 젊은이의 대변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86년을 쉬고 87년에 나온 9집은 매우 실망스러운 앨범이었다. 그것은 조용필의 음악속에서 과거와 같은 치열함을 발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86, 87년은 그에게 있어 가장 힘든 시기였다. 86년 3월 부인은 음독자살기도 했다. 조용필을 향해 세상사람들은 온갖 추측과 비난을 퍼부어댔다. 그는 세상사람들이 싫어졌다. 자기가 죽도록 투쟁하여 훌륭한 음반을 내봐야 그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인기를 유지하는 것은 조용필이란 이름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조용필은 수입마저도 그의 것이 아니라 지구의 몫이었고 주제넘게 조용필 음악에 간섭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싫어졌다.

그리고 86년을 건너뛰고 87년에 4월이 되서야 9집을 발표한다. 조용필은 이혼 등 개인적 불행과 87년에 3김의 대권을 향한 분열과 그 지역감정으로 세상에 대한 혐오가 가득했고 음악적으로도 들국화와 시나위의 등장으로 세상은 바뀌고 있는데 조용필은 7집의 성과를 잇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삶에 대한 확신을 노래한 것이다. 확신이 없는 삶은 무가치하다. 운동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투쟁은 외로운 것이다. 하려면 죽을 때까지 해야한다. 한때 투쟁했다 그만두면 안 한것보다 못하다. 그래서 나는 한번도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아마도 동연배가 아닐까 하는데, 김민기가 대단하고 멋있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음악으로 투쟁은 아무나 할 수있는 것이 아니다. 87년, 9집을 발표할때 나는 개인적인 불행과 맞물려 정신적으로 방황을 거듭했다.

 쉬어야 되는거 아닌가? 나란 인간은 뭐냐? 회의가 회의를 물고 맴돌았다. 그런 가운데 '청춘시대'의 기타 솔로가 잉베이 맘스틴의 표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타를 맏았던 당시의 멤버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그 노래의 홍보를 그만두었다. 가장 힘든 시기였다.(리뷰)

사랑해요(하지영 사/조용필 곡)
청춘시대(하지영 사/유영선 곡)

10집 서울 서울 서울(88년5월)
11집 Q(89년4월)

조용필은 80년대 최고의 가수였으며 모든 세대의 우상이었다. 이제 20년 음악인생을 살아온 조용필은 인기를 넘어서고 세대를 초월해 자신의 음악의 원숙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용필이라는 이름의 가치를 보여주고자 한다.

(10집은) 애초에 더블앨범으로 출반될 예정이었으나 조용필의 워낙 바쁜 스케줄 때문에 두 장으로 나뉘어져 먼저 록적인 '파트 원 앨범'이 선보이고 있다. 이 앨범을 단적으로 얘기한다면 올해로 음악 생활 20년을 맞는 조용필의 음악성과 보컬이 흥망 성쇄를 거듭하는동안 오늘날에 이르러 무르익은 원숙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대중을 의식한다거나 인기, 시류에 영합하는 아마추어적인 단계를 벗어났다. 차트에 랭크가 되든지 말든지, 레코드가팔리든지 말든지 오로지 조용필 의 '자존심'과 '긍지'를 갖고서 레코딩에 임했다는 게 역력히 드러난다. (중략)

조용필 역시도 이번 10집 앨범에서 정통 재즈는 아니지만 록 보다는 휴전 재즈쪽에 가까운 사운드를 선보이고 있어 이제는 그가 대중성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다. 10집 앨범을 구태여 휴전재즈 뮤지션과 비교한 다면 키보드 주자 데이브 그루신의 사운드와 흡사하다. 그러나 조용필 나름대로 휴전재즈에 미국적인 록과 가요적인 멜로디를 융합시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또한, 일반 국내 가수들이 멜로디와 가사에 치중하는데 비해 이 앨범은 첨단 전자악기를 동원하여 사운드와 편곡에 중점을두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키보드와 베이스를 전면에 내세워 업비트를 강조한 휴전 재즈적 스케일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조용필의 보컬은 예전의 격정적인 열창보다는 절제된 원숙의 보컬로서 편하게 표현된다.
(뮤직 라이프 1988년 7월, 인 명관 주간, 유 진모 기자)

10집은 조용필의 음악생활 20주년을 기념하는 앨범으로 두장으로 제작할 예정이었다. 하나는 조용필 음반으로 또 하나는 성인을 위한 트로트 앨범으로. 결국 먼저 재즈적 색체를 가진 록적인 앨범이 먼저 나왔고 성인을 위한 10집의 파트 II앨범은 후에 나와 11집으로 불리고 있다. 조용필은 11집을 자신의 한 축이기도 한 트로트 앨범으로 만들기로 했고 김희갑-양인자 콤비부부에게 맡기기로 한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은 지구를 떠나 화려하게 90년대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11집은 10년간 자신을 잡아두었던 지구와의 마직막 앨범이다. 이곡의 타이틀 'Q'에서 그는 지구와의 이별을 이렇게 말한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 램프가 켜져있는 작은 찾집에서 나홀로 우리의 추억을 태워버렸다...'

자신의 음악에 간섭하고 수입의 대부분을 챙기던 음반회사와 결별하고 이제 조용필은 새로운 출발을 할수있게 되었다.

서울 서울 서울(양인자 사/조용필 곡)
회색의 도시(안헤란 사/조용필 곡)

▶ 지구와의 결별과 새로운 조용필의 시작
12집 추억속의 재회(90년1월)
13집 꿈(91년4월)

90년을 맞이하는 즈음 조용필은 더이상 젊음의 대변자가 아니었다. 그가 86년 12월 '허공' 이후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대발길 머무는 곳에', '서울 서울 서울', 'Q'등의 히트곡들은 대부분 기성가요로 취급되는 곡들이었다. 그가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다시 젊음의 대변자가 되어야만 했다.

조용필은 11집을 다른 작곡가에게 맡기고 시간을 벌면서 지구와의 계약기간 완료후 발표할 음악에 대한 구상을 했다. 1990년 그는 드디어 사슬에서 벗어났으며 80년대를 그가 열었듯이 90년대도 그가 열어보이고 싶었다. 그는 12집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90년대... 무엇보다도 80년대의 옷을 벗어야 했다. 하물며 톤까지도. 12집 '추억속의 재회'부터 사운드가 강렬하고 무거워졌으며 (특히 13집의 B면이 그렇다) 무엇보다 진지해졌다. 대중의 반응에 사로잡히지않고 록을 바탕으로... 80년대엔 사실 탁성도 그리 많이 쓰진 �訪年�. 그리고 음반사로 부터 독립도 했으니 내가 하고 싶은 음 악을 해야하 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 가득 찬 소리가 나왔는지도 모른다.(리뷰)

조용필은 7집에서 자신의 사운드를 완성했다. 그것은 당시 세계적인 조류였던 팝록의 사운드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해냈었다. 7집의 '조용필식 사운드'는 이후 조용필 음악의 핵심이 되었으며 거기에 변화하는 시대의 조류를 흡수하며 항상 변화하면서 발전되는 음악을 선보이게 된다. 그래서 그는 7집이 그의 음악인생에있어 중요한 앨범이고 그것을 함께 이뤄냈던 젊은 친구들을 항상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후반 가요계는 록을 기저로 한 팝발라드의 시대였다. 이문세를 선두로 변진섭, 신승훈이 팝발라드의 독주를 선도했고 그 뒤를 윤상이 이어가고 있었다. 조용필은 음반 회사를 옮겨 90년 1월 12집을 내면서 이런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팝록 스타일에 윤상 등의 신진음악 스타일을 구현해냈다. 그리고 '추억속의 재회', '해바라기' 등 히트곡을 내며 그의 정상을 확인시켜주었다.

후배들이 펼치고 있었던 팝발라드는 신선하고 감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반면 그의 음악은 다른 어떤 후배들 보다 완성도가 높았지만 사운드가 묵직하고 멜로디나 보컬이 무거워 감각적인 팝발라드의 느낌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점은 13집에서 해소된다. 91년에 발표된 13집은 키보디스트 톰 킨과 공동 프로듀스하면서 신선한 감각을 살렸다. 역시 조용필식의 팝스타일의 록을 바탕으로 라틴계열의 리듬을 사용하는등 다양한 접목으로 감각을 새롭게 했다. 또 보컬의 변화 역시 눈에 띄는 점인데, 탁성을 쓰는데도 간결하고 바이브레이션 없는 깔끔하게 처리하며 탁성의 거친 느낌을 상쇄시켰다.
13집은 '꿈', '장미꽃 불을 켜요' 등이 히트되었다. 신진음악인들을 좇는 듯한 인상을 주는 12집과 달리 이 앨범에서는 신선한 노래들을 선보였다. 보컬을 변화와 더불어 사운드 역시 감각적인 부분을 살려내면서도 강렬한 느낌과 진지함을 잃지 않으며 12집에서 진일보 하였다. 그러나 세대를 휘어잡고 시대를 여는 힘은 없었다.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박주연 사/조용필 곡)
해바라기(이건우 사/조용필 곡, 이상 12집)
꿈(조용필 작사곡)
꿈의 요정(김선진 사/조용필 곡,이상13집)

14집 슬픈 베아트리체(92년10월)
15집 남겨진 자의 고독(94년7월)

조용필에게 위기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것은 14집부터 이다.

하지만 위기의 분위기는 14집 홍보를 할 때 피부로 느꼈다. '슬픈 베아트리체'에 이어 '고독한 러너'를 내보냈는데 92년 가을의 모든 채널은 랩 댄스뮤직으로 몰려갔고 그 노래는 제목처럼 더 이상 힘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위대한 탄생에게 대게의 트랙을 맡겨본 후속 앨범 15집까지 최악의 실패를 기록했다고 해서 나는 슬퍼하거나 노할 까닭이 없었다. ...나는 끝까지 도전하고자 했고 앞으로도 도전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생각한다.(리뷰)

14집은 92년 10월에 발표되었다. 우리는 92년을 잊을 수 없다. 바로 서태지가 92년 초에 '난 알아요'로 세상을 뒤바꾼 해이기 때문이다.

92년에 서태지가 등장하면서 가요계는 샘플러와 시퀀서를 주축으로 한 디지털 댄스리듬을 선보이기 시작했고 정신없이 �P아지는 래핑과 랩댄스, 테크노, 힙합, 하우스 등 최신 댄스리듬은 태풍처럼 휩쓸면서 지나갔다. 어찌 조용필이 주목 받을 수 있겠는가. 그는 이제 구시대 인물이 된 것이다. 조용필이 90년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테크노, 하우스, 힙합 같은 주류 댄스비트나 강렬한 기타리프 둘중의 하나라도 정확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조용필이 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사실 14집을 준비할 때 조용필은 매우 두려웠다. 이미 서태지가 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14집을 발표한 92년 가을 이미 그때는 랩댄스 음악이 모든 것을 휩쓸며 세대교체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80년대 중반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우리도 그렇게 갈 것이라는 예언은 이미 한 것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갈 길을 가야한다. '고독한 러너'를 쓰면서 겁이 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세계적인 스타도 밀려나는 릴레이게임이며 스타는 언제나 신인한테 죽는 법이다. 이것은 필연이다. 하지만 내가 잘한다면 남을 수는 있지 않겠느가, 자기 하기 나름이다. 무서워하지도 말고 겁내지도 말자... 이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했다(리뷰)

이제 시대는 바뀌고 그는 잊혀져가기 시작한 것이다. 조용필은 다음 15집을 자신이 아닌 위대한 탄생 멤버들에게 일임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있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상업적 패배를 안겨준 최악의 앨범이 되버렸다.

슬픈 베아트리체(곽태요 사/조용필 곡)
고독한 러너(곽태요 사/조용필 곡,이상 14집)
남겨진자의 고독(이현규 사/최태완 곡,15집)

16집 바람의 노래(97년5월)
17집 친구의 아침(98년10월)

그러나 조용필은 97년 98년 16,17집을 발표하면서 꾸준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는 16집은 중용의 마음으로 자신이 꼭 정상이어야 한다는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이번 16집의 핵심은 무리를 하지 않는 것, 가장 중용적인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다. 승부를 내는 것은 내년의 30주년 17집이라고 보았고, 따라서 히트를 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내년의 앨범에선 나는 16집과 다른 전략의, 30년전의 초심으로 달려간 음악을 선보일 것이다. 즉, 내 나름대오 록을 정리할 것이며 슬로우 곡 또한 그 기조에서 정리할 것이다.(리뷰)

그는 아직도 훌륭한 음악인 이고 최고의 음악을 선보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의 노래(김순곤 사/김정욱 곡,16집)
친구의 아침(박주연 사/박강영 곡,17집)

▶ 위대한 아티스트 조용필

조용필은 80년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를 통해 사람들이 갈망하던 바로 그 노래들을 선보였다. 사람들은 그 이전에 듣던 노래와 전혀다른 80년대를 예감케하는 그 소리들에 열광했다. 그리고 그 노래들은 80년대를 열었다. 
조용필은 그가 원하던 최고의 가수가 되었지만 그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음악의 약점을 알고있었으며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얻기위해 과감히 록으로 전환했다. 그는 자신이 목표로 하는 최고의 사운드를 얻기위해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한다. 결국 5집에서 조용필은 그가 원하던 사운드와 메시지를 얻어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은 외국 그룹이나 음악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판소리 창법 등 한국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서양의 록을 친숙한 록으로 만들어갔다. 록을 듣으면서도 누구나가 이질감 없이 즐길 수 있는 한국적인 것으로 하기까지 조용필은 엄청난 노력을 한것이다. 
흔히들 한국 가요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서구 지향을 극복하고 '한국적인 음악'을 해야한다고 한다. 바로 그것을 조용필은 80년대 초반에 이루었다. 그는 명백히 5집에서 한국적인 서양음악을 만들었으며 그 음악으로 모든 세대를 하나로 묶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얻었다고 자만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 시점에서 새로운 자신만의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또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조용필은 80년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록사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80년대의 감성을 얻기위해 최고의 멤버로 작업했고 7집에서 그것을 완성한다. 7집의 사운드 그것은 바로 '조용필 사운드' 이다. 7집에서 완성한 그 음악들은 이후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기는 하지만 조용필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바로 그것이되었다. 조용필은 7집의 위대한 탄생이 없었으면 자신은 없었다고까지 얘기한다.

그 이후 조용필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한다. 8집에서 성인가요들이 대 히트한 이후 그에게 닥친 개인적 불행과 맞물려 그의 록넘버들은 힘을 잃었고 젊은 세대보다는 기성세대에 어필하는 곡들이 인기를 이어갔다. 
그가 부진을 보이기 시작하던 80년대 말은 들국화, 시나위, 그리고 발라드와 신진 댄스 가수들이 물밀듯이 가요계에 들어오던 시기였다. 그것은 젊은 세대 진영이 조용필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알고있는 조용필은 지구와 결별한 후 당시 최고의 유행 스타일인 팝발라드와 자신의 주요 스타일인 록을 바탕으로 다시 시대의 선두에 서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를 대표하지 못했으며 80년대의 선두자리에서 이제는 한 걸음 물러서고 있는 자신을 지켜봐야만 했다.

조용필이 다시 14집으로 선두를 노리고 있던 92년 초 서태지가 등장한다. 세상은 온통 테크노, 하우스, 힙합 등 랩댄스뮤직의 물결 이었다. 시대가 또 한번의 세대교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조용필은 그가 가야할 방향들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자신의 길을 가야했으며 그의 선택은 발라드였다. 그러나 시대는 그를 더욱 멀리 밀어냈으며 위대한 탄생 멤버에게 일임한 15집의 참패로 그는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진다.

그 후에 조용필은 16집 '바람의 노래'와 17집 '친구의 아침' 으로 우리 곁에 다시 다가왔다. 비록 시대를 대표하진 못했지만 90년대에도 많은 히트곡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언제나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용필 그는 80년대 척박한 가요계에 누구도 다가서지 못할 만큼의 앞선 음악을 하며 시대를 이끌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슈퍼스타나 트로트 가수라는 이미지에 가려 올바로 평가받고 있지 못하다. 이제 그의 위대한 음악이 재평가 되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