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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충청도] 부석사, 선비촌, 소수서원,단양적성비

작은천국 2007. 2. 7. 13:07
여행지
부석사, 선비촌, 소수서원, 단양적성비
여행기간
2005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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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 스토리

부석사 :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화엄종찰 부석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5점, 보물4점, 도 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10대 사찰중 하나입니다. 사찰 앞으로 펼쳐진 자연경관을 품안에 끌어안은 모습은 마치 부처님의 온화한 자비심처럼 모든 이의 마음을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합니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으뜸 사찰입니다.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교학(華嚴敎學)을 펴기 위해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고 합니다.그런데, 이 절은 신라 화엄종의 도량道場임에도 불구하고 본전인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불(主佛)로 모셨고, 무량수전 앞에 안양문(安養門)을 세웠으니 『安養』은 곧 『極樂』을 일컬음이니 이 절은 바로 땅 위에 극락세계를 옮겨 놓은 격이 되는 것입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합니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7년(1358)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3년(1377) 조사당(祖師堂)이 재건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경내에는 신라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보물 제220호),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249호),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255호)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 조사당(祖師堂)(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祖師堂壁畵)(국보 제46호), 고려각판(高麗刻板)(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도유형문화재 제127호), 삼층석탑(三層石塔)(도유형문화재 제130호) 등이 있습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중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전시관(遺物館展示館)에 보관되어 있다.

 

선비촌 : 백두대간이 태백산을 지나 한바퀴 몸을 틀어 소백산을 부려 놓은 곳. 태백산과 소백산을 두른 경북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다. ‘선비’하면 안동이나 봉화를 떠올리지만 영주 선비가 빠질 순 없다. 기개는 산만큼 높고 학문은 골만큼 깊었다. 조선에 성리학을 소개한 유학자 안향이 영주 순흥 출신이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고등교육기관인 백운동서원()이 순흥에 세워졌다. 22일엔 영주의 고택 12채를 재현한 문화역사테마파크 이 개장했다.

#성리학자 안향의 고향
경북 영주시 순흥면, 부석사 가는 길에 소수서원을 보려고 들르는 고장이지만 조선 초기엔 이 일대의 중심지였다. 고려 충렬왕 등 세 왕의 태를 묻었다고 해 ‘도호부’로 지정됐다. 순흥 사람들은 “지금으로 치면 직할시쯤 된다”며 자부심이 대단하다.
순흥은 학문의 고장이다. 조선 최초의 ‘사립대학’인 소수서원이 있는 곳. 학문의 역사는 수백년을 거슬러 고려말로 올라간다. 순흥 사람 안향이 원나라를 오가며 주자학을 들여왔다. 주자성리학이 조선의 통치이념이 되면서 안향은 성리학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훗날 소수서원에서 학문을 닦던 퇴계 이황은 죽계에 들러 머리를 식히곤 했다. 은 한여름만 아니라면 지역 주민만 오가는 한적한 계곡이다. 소수서원 맞은편 에서 들어간다.
#주세붕·퇴계와 소수서원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이 공부하던 곳에 서원을 세우고 ‘백운동 서원’이라 이름지었다. 후일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가 임금에게 건의해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오리 이원익, 한음 이덕형, 미수 허목 등 조선 중·후기 학자와 정치인 4,000여명을 배출했다. 안동 사람들이 도산서원을 거론하며 퇴계 정통성을 내세우지만 순흥의 자부심도 뒤지지 않는다. 퇴계가 왕성하게 연구활동을 한 건 소수서원 시절이란 이야기다.
소수서원은 소박하고 아담하다. 명성만 떠올리고 가면 자칫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강의하고 토론한 강학당, ‘교수’ 집무실 겸 숙소 일신재·직방재, 학생 숙소 학구재·지락재 등 몇 채의 낡은 한옥이 전부다. 매표소 입구에서 서원 정문까지 짧은 소나무 숲길과 서원 뒤 죽계천이 좋다.
#고택 12채 재현한 선비촌
소수서원 옆에 한옥 기와지붕이 보인다. 7년여 공사를 끝내고 22일 개장하는 ‘선비촌’이다. 영주 일대 고택 12채를 원형대로 재현했다. 지역문화재인 해우당·두암고택 등 기와집과 선비가 살던 초가, 마을 공동공간인 정자, 물레방아, 곳집 등 전통 마을을 꾸렸다. 1만7천4백평에 부속건물까지 76채가 들어섰다.
‘선비’만 빼고 모든 게 있다. 사람이 살기라도 하는 듯 방마다 가구와 침구를 넣어 뒀다. 삼층장·자개장이 놓여 있고 벽엔 도포가 걸려 있다.
부엌엔 가마솥·주전자·놋그릇·목기가 가지런하다. 글 읽는 선비, 가야금 뜯는 선비, 자수 놓는 규수 등 양반가의 생활 모습을 인형으로 재현했다. 마을 구석의 대장간은 대장장이 유학자 배순을 기리기 위한 것. 공부하고자 하는 열정에 감복해 퇴계가 직접 가르친 제자다.
선비촌은 전시 및 체험 공간으로 활용된다. 선비촌 옆엔 순흥문화역사체험장 공사가 한창이다. 3년 예정으로 순흥도호부를 재현할 계획이다. 고문서·고지도 및 민속자료 2만여점을 모은 소수박물관도 22일 개관한다.
-선비촌의 이름난 고택 3곳-
선비촌엔 영주의 이름난 고택 12채(기와집 7채, 초가집 5채)가 재현돼 있다. 선비촌 송택동 기획관리실장은 “돌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세어 만들었다”며 “원래 고택과 1㎝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예안 김씨 해우당 고택, 두암고택, 인동 장씨 종택 등 선비촌에 재현된 반가 3채를 엿본다.
#해우당
조선 고종 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이 1876년 건립했다. 안마당을 둘러싸고 안채, 정지(부엌), 고방(창고)이 ‘ㄷ’자 모양으로 붙어 있고, 사랑채와 대문이 나머지 한쪽을 막아 ‘ㅁ’자를 이뤘다. 현판은 해우당과 친분이 두터운 흥선대원군의 글씨. 고택은 문수면 수도리에 있다. 영주의 대표적 반촌(班村)인 수도리 무섬마을엔 해우당 외에도 만죽재, 박재연가 등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이 9동 있다.
#두암고택
두암 김우익이 1590년 세운 400년 역사의 고택이다. 두암은 조선 광해군 때 영원군수·해미현감 등을 지냈다. 사랑채·안채·행랑채·사당을 고루 갖춘 ‘ㅁ’자형 한옥. 대문을 열면 오른쪽에 외양간이 나온다.
‘ㅁ’자 구조와 외양간은 경북 산간지역 반가의 특징이다. 선비촌에서 가장 큰 건물. 대문 건너편엔 하인이 숙식하던 초가가 재현돼 있다. 고택은 이산면 신암2리 위치.
#인동 장씨 종택
인동 장씨 영주 입향조의 맏손자 언상이 세웠다. 16세기 중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종손이 대를 이어 300년째 살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 건물로 분리돼 있다. 누각형으로 지어 올리고 마루에 난간을 두른 사랑채가 독특하다. 건물 뒤 사당엔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공신이 된 장말손의 영정(보물 502호)이 있다. 장수면 화기리 위치.
▲죽계구곡 : 퇴계가 계곡마다 붙여준 이름이 9개여서 ‘구곡’이라 부른다. 순흥면 배점리에서 초암사까지 펼쳐져 있다. 1시간 등산코스. 초암사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짓기 위해 초막을 짓고 머문 곳. 한국전쟁 때 파괴된 뒤 복원했다.
▲소수서원 : 학생 숙소인 학구재는 교사 숙소인 일신재의 대각선 방향에 놓여 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법도를 지킨 것. 입구 당간지주는 소수서원 자리에 있던 통일신라 시대 절 숙수사 유물이다. 입장료 1,000원. 22일부터 소수서원·소수박물관·선비촌 일괄 관람권을 판다. 어른 3,000원, 어린이 1,000원. (054)639-6693
▲금성단 : 제단과 비석 3개가 있다. 중앙이 금성대군, 오른쪽이 순흥부사 이보흠, 왼쪽이 무명의사의 비다.
▲선비촌 : 줄타기·풍물·농악 등 전통 공연을 관람하고 투호놀이·연날리기·탁본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22일엔 개촌 기념으로 순흥부사 행차와 인동 장씨 기제사를 재연하고, 전통혼례 시범 등을 보여준다. (054)638-7114

 

소수서원 :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현(儒賢) 안향(安珦)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다음 해에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그 후 1544년 여기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1633년(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였다.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과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私學)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서원 중의 하나로 지금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원의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이 걸린 강당, 그 뒤에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동북쪽에는 학구재(學求齋), 동쪽에는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또한 서쪽에는 서고(書庫)와 고려 말에 그려진 안향의 영정(影幀: 국보 111)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 보물 485)가 안치된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단양적성비 :충북 단양군 단양읍 하방리(下坊里)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축산성.
지정번호 사적 제265호 소재지 충북 단양군 단양읍 하방리 시대 신라 진흥왕(545∼551)
크기 성 주위 922m 종류 석축산성
사적 제265호. 신라 진흥왕 때(545∼551) 축성되었다. 성 주위 922m. 할석(割石) 및 자연석으로 축조되었는데, 성의 기반을 토석(土石)으로 다지고 그 위에 외벽은 자연석으로 고루 쌓았다. 남서쪽 끝의 산봉을 기점으로 하여 북동쪽으로 닫는 산등성의 외측(外側)을 돌아 축성되었고, 이 능선의 남쪽 저지(低地)는 밭으로 되어 있다.
유구(遺構)는 대부분 폐비(廢)되어 있고, 성벽의 상태가 가장 좋은 곳은 북동쪽 끝으로, 상후(上厚) 0.6m, 내고(內高) 1.8∼3.3m, 외고(外高) 2.0∼4.3m의 성벽이 남아 있다. 성문의 유지(遺址)는 남서쪽 끝과 남쪽에서 당고개로 이어지는 능선쪽, 그리고 남동쪽의 3곳에서 확인되었다. 신라가 한강을 건너기 직전의 전진기지(前進基地)로서 전략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성이었다.

 
부석사 안내간판                                          부석사입구에 있던 연못
자 드디어 부석사 입구에 도착

범종각에 도착

드디어 만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석불                                                            조사당
소수서원
선비촌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들러 휴게소 뒤로 올라가서 발견한 단양적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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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각한것 보다 훨씬 기대이상이었다.점점 무량수전에 가까워 올수록 보이는 경치는무아지경이 따로 없었고아직까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채 우리를 기다리는 무량수전은마음마저 고요하게 만들었다모든 걱정과 근심을 무량수전에 내려놓고 오는 하루였다.

그리고 선비촌은 신.구의 조화가 절묘하리 만치 괜찮은 곳이다. 각 각의 고택은 금방이라도 고대의 사람들이 튀어 나올것 같은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이제 꽃이 피기 시작하는 계절이라 야생화들이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지금은 철쭉과 목단꽃이 제철을 만났던만개하여 관광객을 맞이 하고 있었다..선비촌을 지나 소수서원으로 내려오니 소수서원의 오래된 고송이 우리를 맞이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곳에 앉으니 절로 시심이 동한다...어찌나 술술 말이 잘 나오던지..
정자에 앉아 한가로운 오후 여가시간을 즐기면서....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 단양휴게소 에 들러 단양적성비와 만난다. 이곳 언덕에 오르면 발아래 남한강이 적성을 주위로 굽이 돌아가고있다. 역사적으로 보존가치도 굉장히 중요한 듯이 보이고새로하고 있는 보수공사로 인해 기존에 있던 성벽과는 약간은차이를 보이지만 낯설은 고대 유물을 뜻하지 않은 곳에서만난 다는것은 우리에겐 크나큰 행운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