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s like traveling/Gyeonggi

[강화도] 벌거벗은 여인상을 볼 수 있는 '전등사'

작은천국 2010. 6. 28. 13:41

 

벌거벗은 여인상이 추녀를 받치고 있는 '전등사'

 

 

 두 달간 서울에서 여행중인 행커할아버지와 함께 강화도 전등사로 향했습니다.

혹시 가시겠다고 하면 경주, 혹은 안동을 같이 다녀올까 생각했지만 행커할아버지는 서울도 너무 볼 곳이 많다며 제주외 다른 곳은 가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대한 민국 역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강화도는 한 번쯤은 다녀오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고 대중교통으로 움직일 경우 다소 불편할수도 있는 곳인지라

지인이 강화도에 살고 있어 특별히 부탁을 드렸드니 흔쾌히 하루 안내를 해주겠다고 해서 강화도를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6월의 휴일...

전등사는 온통 초록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네요

 

 강화도를 한 번 가보고 싶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포기했던 곳이라하셔서 나름 뿌듯했네요

지인이 강화도의 지도가 새겨진 수건을 선물해 드렸드니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전등사 매표소를 지나 약  10분정도 가파른 경사를 따라 올라오면 전등사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삼랑성을 만나게 됩니다.

이곳은 정족산이 위치한 곳이라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는데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고 했다 합니다. 

 

처음에는 토성이었으나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등사는 이 곳 산성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가궐,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던 곳입니다.

또한 병인 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 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 과 왕실족보인 '선원보를 지켜낸 공적비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윤장대도 설치가 되었네요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어 놓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이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한 번 읽은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곳 전등사에는 사찰을 찾아오는 많은 분들이 자신의 삶을 한 번 되돌아 보고 희망하는 소원이 하루 속히 성취 되도록 하기위해

발원문을 작성한 후 윤장대 안에 넣고 돌리도록 성물을 조성하였다고 하니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 한번쯤은 윤장대를 돌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네요 

 

전등사는 다른 곳과 달리 일주문이나 불이문등이 없는데 이 대조루가 불이문의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입구에는 전등사란 편액이 걸려있고 안에서보면 대조루가 쓰여있습니다.

 

이렇게 대조루 아랫층을 통해 전등사로 들어가게되며

이곳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약 25도 쯤 상향으로 부처님을 바라보게 되는데 가장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게되는 각도를 고려해 지어진곳입니다.

원래 대조루는 기도를 하거나 법회를 열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불교서적과 기념을 파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등사의 대웅전의 모습입니다.

생각했던것보다 아담한 모습이지만 조선중기 건축물로는 으뜸으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전등사에 들어서자마자 할아버지께 추녀를 보라고 했고 신기해하면서 열심히 쳐다보고계십니다.

첫마디가... 어  원숭이네~~~~

 

원숭이처럼 보이는 벌거벗은 여인상이 추녀을 받치고 있습니다.

 

전등사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 조각된 벌거벗은 여인상은 전설에 의하면

절을 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위해 추녀를 받기게 하였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더보기를 누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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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던 것일까?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세히보면 네 귀퉁의 여인의 모습이 전부 다른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목수가 사랑했던 여인이 배신하고 떠나갔을 때 받았을 목수의 상처, 슬픔, 분노가

이 여인의 얼굴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건 아닐까생각해봅니다.

 

 

 전등사 대웅전은 조선시대 광해군때 지어진 절로 정면3칸, 측면3칸의 목조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인 공포는 다포양식으로 기둥은 가운데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여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대웅전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천장은 용, 극락조, 연꽃등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였고 부처를 모신 불단과 닫집의 장식 또한 매우 화려합니다.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데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데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고 하네요

 

닫집은 법당내부 불상 위에 화려하게 꾸며놓은 작은 집 모양의 장식으로 궁궐 임금의 자리인 용상위에도 닫집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자리의 주인인 임금과 부처를 좀더 귀하고 위엄있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 상대적으로 법당의 닫집이 훨씬 화려하다고 하는군요

 

불상아래에는 치우천왕이 조각되어있습니다.

 

절 앞마당에는 여름의 수련이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이렇게 소원을 적어놓은 기와가 줄줄이 있는걸 보고 뭐냐고 신기해하셨네요

기와장에 소원을 적어 절을 지을때 사용한다고 했더니 무척이나 신기해하면서도 재미있어하셨습니다.

외국인과 같이 다니고 있으니 절 관계자분이 오셔서 직접 어떻게 기와가 지붕으로 올라가는지 직접시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대중전옆에 위치한 향로전의 단청

 

향로전은 법당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상궁이나 나인들이 기도하던 곳이었다고 하네요

지금은 상임법사실로 쓰고 있는 곳입니다.

대웅전이 단정하고 단아하면서도 웅장함을 나타낸다면 이곳 향로전은 소박한듯하면서도 화려한 단청과 궁포들로 인해 눈을 사로잡습니다.  

 

그외 대웅전옆으로 약사전과 명부전과 극락암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은 행커할아버지 끊임없이 질문을 하십니다.~

 

진지하게 설명을 듣고 계십니다.

 

종루의 모습  

 

조식예불 때사물시연이되는데 운판-목어-법고-범종순으로 진행되어지며

말과 글로써 진리를 전달 할 수 없는 축생과 습생, 나는 짐승, 지옥의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합니다.

예전 저녁이 어스름하게 내리는 송광사에서 사물시연을 보고 들었을 때 그 진동이 몸을 타고 가슴을 울리는 느낌을 받았던지라

할아버지께 설명을 해드렸으니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하시네요

시간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이곳에서 해 저물때 사물시연을 보게해드리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 발길을 돌려야했기에 다소 아쉬웠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보게된 운판입니다. 사실 절에 가더라고 이렇게 자세하게 사물시연을 하는 것에 대해 보지 않았는데

외국인과 같이 다니고 있으니 절 관계자분께서 친절이 이곳저곳을 일일이 설명해주셔서 저도 새롭게 배우고 왔습니다.

 

운판은 청동이나 철로 만든 뭉게구름 모양의 판위에 구름과 달을 새긴 법구로 운판의 밝고 맑은 소리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조류를 제도하며 허공을 헤매는 영혼을 천도한다고 합니다. 

목어는 나무를 깎아 잉어모양을 만들고 속이 비게 파내어 안쪽의 양벽을 나무막대기로 두드려 소리를 내는 법구로

물속의 중생을 제도하기위해 치는 것입니다. 또한 눈을 감고 자는 물고기가 없듯이 항상 마음의 눈을 뜨고 수행하라는 의미로

항상 마음의 눈을 뜨고 수행하라는 의미로 게으른 수행자를 경책하는 뜻이 담겨져있다고 합니다.

법고는 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으로 북은 소리가 장중하고 무거워 부처님의 진리의 소리, 사자후를 상징합니다.

법고의 몸통은 건조가 잘 된 나무를 사용하고 양면의 가죽은 암소와 수소의 가죽을 사용해야 소리가 잘 난다고 하며

두개의 북재로 마음 심(心)자를 그리며 두드리게되며 축생, 즉 짐승을 비롯한 땅에 사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범종은 아침에 28번, 저녁에 33번을 치는데 이는 28천, 또는 33천의 모든 중생들에게 들려주는 것을 상징합니다.

범종의 '범'이란 우주만물의 진리를 뜻하며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이 범종이며 모든 중생이 종소리를 듣고

번뇌가 없어 지고 지혜가 생겨 악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고 지옥에 떨어진 중생까지고 구제한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합니다.   

 

휴일 오후 전등사 대웅전의 모습입니다.  

 

엄청난 세월을 자랑하고 서 있는 느티나무 

 

할아버지와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영어가 좀 더 유창했더라면 늘 아쉬움이 남네요 

 

 

 전등사의 또다른 전설을 확인할 수 있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전설이 궁금하신분들은 더보기를 누르시면됩니다.

 

더보기

전등사에는 두 그루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다.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한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스무 가마를 요구하니 관리들의 횡포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이 지시를 듣게 된 동승이 노스님께 고했다.
“스님! 정말 관가에서 너무들 하는 것 아닙니까요?”  “허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얘야,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미워해선 안 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
노스님은 이렇게 타일렀지만 자신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은행 스무 가마를 내놓을 수도 없었고 관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더 불교를 탄압할 것이

분명했다. 노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다.  곧 전등사 일대에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추송 스님의 3일 기도를 지켜보았다. 그 중에는 관리들도 섞여있었다.
“어떻게 은행이 두 배나 많이 열린단 말인가?”  “맞아! 추송 스님이 제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소용없는 짓이겠지.”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갑자기 추송 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버렸다.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추송 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비가 무섭게 내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게 되었다. 그 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전등사를 다 돌아보고 내려오는길 입구에 죽림다원이란 찻집에서 잠깐 휴식을 취했네요

 

 ★ 불교건축양식이 궁금하신 분들은 산사로 가는길 (http://www.korearoot.net/sansa/source/index00.html)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Posted by 작은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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