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eign Country/Cambodia

[스크랩] 캄보디아 앙코르왓 여행정보

작은천국 2009. 4. 5. 13:34
 

♥ 캄보디아Cambodia와 앙코르와트Angkor Wat 여행을 위한 정보 ♥


1. 지도

 

2. 캄보디아 지역 정보 - 씨엠립(Siem Reap)

 

씨엠립은 규모가 아주 작은 도시이지만 캄보디아 내에서는 가장 활발한 도시이다. 오히려 수도인 프놈펜보다 더 활기가 넘치는 느낌이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앙코르 유적이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개발붐이 일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반면 관광 산업의 발전 이면에는 빈부의 격차도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씨엠립 기본 정보  


 씨엠립(씨엠리업, 씨엠 레아프, Siem Reap)은 캄보디아 북서부지역에 속하는 지역으로 인구는 85,000명 가량 거주하며 지역 전화번호는 063이다. 수도인 프놈펜과는 6번 국도를 따라 311㎞ 정도 떨어져 있고, 서쪽 방향에 위치한 씨소폰과는 103㎞, 포이펫과는 152㎞ 정도 떨어져 있다.

씨엠립은 작은 도시 규모에 비하면 매우 활발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앙코르 유적(Ankor Ruins)이 시내 근처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시내의 대부분의 건물이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실제 일반 주민이 거주하는 주택은 매우 초라한 편이다.


▶ 국제전화, 우편, 인터넷

국제전화는 시내의 편의점(칼텍스 스타마트) 등에서 카드를 구입하여 이용하면 된다. 카드의 종류는 3$, 10$, 20$, 50$ 짜리가 있다. 카드를 이용한 수신자부담통화(콜렉트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구시장(Psar Chaa) 근처 등지에는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국제전화를 이용할 수 있는 가게(여행사)들도 있다. 이 곳에서는 국제전화 뿐만 아니라 팩스의 이용도 가능하다. 우체국은 시내 중심을 흐르는 강(Stung Siem Reap)의 왼편에 자리잡고 있다. 우편 업무 뿐만 아니라 국제전화도 이용 가능하다.

씨엠립에서의 인터넷 이용은 보편화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게스트하우스가 밀집한 곳에서는 손쉽게 이용 가능하다. 속도는 그리 빠른 편은 아니나 그런대로 이용할 만하다. 한글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한글 입력기(IME)의 지원 여부를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 은행, 환전

씨엠립은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므로 은행(환전) 이용이 용이한 편이다. 구시장(Psar Chaa) 아래 남서쪽 방향에 위치한 카나디아은행(☎ 964808)에서는 마스트카드(MasterCard)의 사용, 여행자 수표의 환전, 머니그램 서비스 등이 가능하다. 구시장 동쪽 부근에 위치한 캄보디아 상업은행(Cambodian Commercial Bank, CCB, ☎ 380154)에서도 여행자 수표의 환전(수수료 2%), 신용카드의 사용(수수료 2%, 최소 5$)이 가능하며 은행업무는 08:00~15:30까지 한다. 구시장(Psar Chaa) 북서쪽 방향의 시바타 거리(시와타, Phlauv Sivatha)에 위치한 메콩은행(Mekong Bank, ☎ 964417)에서는 비자(VISA)카드로 현금 서비스(수수료 5$)를 받을 수 있다. 메콩은행은 업무 마감후에도 부쓰에서 월-토요일은 오후 15:30~20:00까지, 일요일은 08:00~13:00까지 이용 가능하다. 구시장 근처의 사설 환전소에서도 환전(달러, 밧, 엔)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돈도 환전이 가능하지만 환율 면에서 엄청난 손해다.


씨엠립 관광 정보 


씨엠립에서의 가장 큰 볼거리는 뭐니뭐니해도 앙코르 유적(Ankor Ruins)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캄보디아를 찾는 관광객들은 모두 앙코르 유적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앙코르 유적 외에는 아시아 최대의 호수인 톤레삽 호수도 충분한 볼 거리를 제공한다. 그 외 볼거리로는 왓 트마이, 지뢰박물관, 씨엠립 구시장, 중앙시장 등이 있다.


앙코르 유적(Ankor Ruins) : 세계 최대의 거석 문화 유적인 앙코르 유적은 씨엠립의 북쪽에 주로 위치하고 있다. 앙코르 왓, 앙코르 톰, 롤루스 유적군 등을 비롯한 수많은 유적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좀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발에 채이는 것은 모두 유적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앙코르 유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앙코르 유적 정보] 메뉴를 참조하기 바란다.


톤레삽(Tonle Sap) 호수 :  톤레삽 호수(Tonle Sap Lake)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호수이다. 특히 계절에 따라 메콩강의 수위를 조절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 캄보디아인들의 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톤레삽 호수에서의 볼거리는 현지인들의 생활모습, 수상가옥(오른쪽 사진) 등이 있다. 그리고 보트를 타고 호수 내에서 투어를 즐길 수도 있다. 다만 국내에서와 같은 유원지 시설은 전혀 없기 때문에 화려한(?) 물놀이에 대한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것이다.

    톤레삽 호수에서 보트(배)를 탈 경우 12인승 정원 한 대당 8$ 정도이고 1인 추가시 1$씩 추가된다. 즉 인원이 8명이라면 16$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비용이 변동될 수도 있고, 또 바가지를 씌울 수도 있으므로 사전에 게스트하우스 등에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왓 트마이(Wat Thmei), 왓 보(Wat Bo) : 왓 트마이(왓 트메이, Wat Thmei)는 "새 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캄보디아 내전 당시 사망한 사람들의 유골을 봉안하고 있다. 프놈펜의 킬링필드에 가 볼 여유가 없다면 이 곳을 들러 캄보디아의 아픈 과거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앙코르왓 가는 길 왼쪽에 위치해 있다.

    왓 보(Wat Bo)는 현대적인 사원으로 씨엠립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 19세기의 부처 벽화가 있다. 시내 동쪽(Stung Siem Reap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지뢰 박물관(Landmine Museum) : 지뢰 박물관은 지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주기에 충분한 곳이다. 규모는 화려하진 않지만 지뢰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볼수 있다. 입장료는 없으나 기부금은 받고 있으므로 적은 돈이라도 의미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어로 된 안내 팜플렛이 준비되어 있다.


중앙시장, 구시장 : 중앙시장(프싸 르, Psar Leu)은 시내에서 6번 국도를 따라 동쪽 방향으로 1.6㎞ 정도 떨어져 있다. 글로벌에서 걸어서 간다면 30분 좀 넘게 걸린다. 규모는 약간 큰 편이며 시장 분위기는 우리나라의 재래시장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중앙 건물 내에는 수많는 잡화점, 의류점, 시계점, 환전소 등이 들어서 있고, 건물 바깥에는 야채상, 어시장 등이 있다. 건물의 앞쪽에는 노점 식당이 있어 저렴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

    구시장(프사 짜, Psar Chaa)은 씨엠립 시내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글로벌에서 걸어서 간다면 30분 정도 소요된다. 시장의 규모는 좀 작은 편이며 환전소, 현지식당, 야채상, 잡화점 등이 즐비하다. 저렴한 식사를 할 예정이라면 이 곳에서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식당을 이용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시장 주변에는 수많은 여행사가 위치하고 있어 티켓 예약, 국제전화, 인터넷 등을 즐길 수 있다.


압사라(Apsara) 댄스 : 압사라(압살라, Apsara) 댄스는 캄보디아의 전통 무용이다. '압사라'라는 말의 의미는 '천상의 무희'를 뜻하며 춤의 내용은 인도 흰두 신화 라마야나(Ramayana)를 주제로 한 것이다. 태국에도 이와 유사한 춤이 있는데 이는 앙코르 왕조 멸망시 태국에서 압사라 춤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물론 캄보디아 측에서 본다면 자신들의 춤을 훔쳐갔다는 표현도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일을 거치면서 오히려 캄보디아에서 자신들의 전통을 태국으로부터 재수입했다는 관점도 나올 법하다. 그 이유는 전통과의 단절이 증명할 수 없을만큼 길었고, 폴폿의 지배 당시 철저히 유린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유일한 전승자에 의해 지금은 계승되고 있지만.

    씨엠립에서 압사라 댄스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일부 호텔과 게스트하우스에서 가능하다. 특히 바욘(Bayon) 2 레스토랑, 쿨렌(Kulen) 2 레스토랑, 짜오프라야(Chao Praya) 레스토랑 등에서 저녁 식사를 포함하여 10~11$ 정도의 비용으로 관람 가능하다. 그리고 압사라 극장(Apsara Theatre)에서도 관람할 수 있는데 디너쇼 형태로 되어 있다. 사전에 예약(식사 포함 20$)해야 하며 영어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씨엠립 숙박, 식당 정보 


▶ 숙박 정보

씨엠립은 관광지답게 고급 호텔에서부터 저렴한 게스트하우스까지 매우 다양한 숙소를 갖추고 있으며 최근 계속적으로 호텔 신축이 진행되고 있다. 도시의 규모에 비하면 숙박 시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 중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는 지금 현재 3곳이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의 경우 좋은 얘기뿐만 아니라 안좋은 얘기도 많이 나돌고 있다. 대다수의 한국 여행객들은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기대를 하지만, 이들 게스트하우스 역시 다른 게스트하우스와 마찬가지로 영업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운영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이들 한국인 운영 게스트하우스에 대해 먼저 소개하고, 다른 게스트하우스,호텔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 주의 : 아래 소개된 숙박업소는 본 운영자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서비스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으므로 착오없기 바란다.)


<숙소명 및 내용>

◆ 글로벌 홈스테이(Global Homestay) - 한국인 권국근씨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로 꽤 유명한 곳이다. 숙소는 새로 지은 것이라 상당히 깨끗한 편이다. 포이펫(국경)↔씨엠립간 미니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그리고 씨엠립↔프놈펜간 스피드보트 티켓 예약이 가능하며, 압사라댄스 관람시 티켓 예약도 가능하다.

○ 위치 : 6번 국도상에 위치. 씨엠립에 막 들어서면 오른쪽에 간판이 보인다. ☎380189

○ 숙박비 : 팬싱글/트윈 5/7$. 에어컨트윈 15$. 도미토리 2$. 아침식사(빵,음료) 무료제공.

○ 참고 : 기본 모또비가 5$로 정해져있는 등 유적관람시의 교통요금이 정형화되어 있다. 


◆ 걸리버 앙코르(Gulliver Angkor) - 프놈펜에서 걸리버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홍덕기씨와 친구분 이찬씨가 함께 2002년 말 경에 씨엠립에 오픈한 게스트하우스이다. 근처에는 앙코르왓 게스트하우스, 마미 게스트하우스 등이 있다. ☏ 012-637715

○ 위치 : 6번 국도상에 위치.스타마트를 끼고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가면 된다.

○ 숙박비 : 싱글 5$. 트윈 7&. 트리플 8$. 객실 모두 욕실, TV 완비. 도미토리 2$(8인).

○ 식사 : 라면, 정식 백반, 된장찌게, 냉면, 콩국수, 비빔밥, 삼겹살, 불고기 등 2~5$. 


◆ 서울 가든(Seoul Garden) - 캄보디아에서 10여 년간 생활한 최장길씨가 2002년 12월 오픈하여 운영하고 있다. 국경 포이펫↔씨엠립간 미니버스를 운행하고 있으며 공항 픽업(5$)도 하고 있다. 또한 최장길씨는 웹사이트도 운영하고 있다.

○ 위치,연락처 : 6번 국도상에 위치. 프린세스 앙코르 호텔 바로 앞. ☏ 012-912005

○ 숙박비 : 도미토리, 싱글/더블/트윈룸

○ 식사 : 라면, 정식 백반, 된장찌게, 냉면, 콩국수, 비빔밥, 삼겹살, 불고기 등 2~5$. 


☞참고: 태사랑 사이트의 한인업소 메뉴에서 인터넷 예약(숙소, 국경 픽업)이 가능하다.

        http://www.thailove.net



숙소명 내용 (숙박비는 변동가능성 있음)

◆ Smiley Guesthouse -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으로 깨끗하며, 스타마트 골목 안쪽에 위치해 있다. 프놈펜의 나린 게스트하우스와 연계되어 있어 씨엠립↔프놈펜 육로 교통편 예약이 가능하다. 싱글 6-8$, 더블 7-9$, 온수 샤워시 15~20$ 정도이다. ☏ 012-852955

◆ Paradise Guesthouse - 스타마트 서쪽 방향 수십미터 부근의 골목 안쪽에 위치해 있다. 파라다이스 및 헬로 게스트하우스 간판이 보인다. 싱글 공동욕실은 2$, 욕실 포함된 싱글/더블룸 3/4$ 정도이다.

◆ Naga Guesthouse - 구시장 북서쪽 방향 Ph Sivatha 서쪽 골목 안쪽 100m 지점에 위치에 있다. 싱글/더블 2/3$ 정도이며, 욕실 포함시 3/4$ 정도이다. ☎ 963439

◆ Orchidae Guesthouse - 구시장 북서쪽 방향 Ph Sivatha 서쪽 골목 안쪽 50m 지점에 위치에 있다. 욕실 포함된 싱글/트윈룸은 4/5$, 에어컨룸은 10$ 정도이다. ☏ 012-849716

◆ Ivy Guesthouse - 구시장 아래쪽에 위치하며, 레스토랑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싱글/더블 5/6$, 개인욕실 포함 더블룸 8-10$ 정도이다. ☏ 012-800860

◆ Popular Guesthouse - 시내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프놈펜의 까피톨 게스트하우스와 연계되어 있다. 싱글/더블 2-3/4$이며, 개인욕실 포함시 더블룸 5-7$ 정도이다. 레스토랑도 운영하고 있다. ☏ 012-916165

◆ Mom's Guesthouse - 시내 동쪽 왓보 거리(Phlauv Wat Bo)에 위치해 있다. 개인욕실 포함된 팬/에어컨룸은 10/15$ 정도이다. 공동욕실은 5$이다. ☎ 964037

◆ Golden Angkor Hotel - 6번 국도와 시와타 거리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호텔이다. 팬룸 12$, 에어컨룸 15$ 정도이다. ☎ 964039


숙소명 내용

◆ Grand Hotel d'Angkor - 싱가폴 래플스의 체인 호텔로 씨엠립 최고의 시설을 자랑한다. ☎ 963888  http://www.raffles.com

◆ Sofitel Royal Hotel - 앙코르왓 가는 곳에 있다. ☎ 964600  http://www.sofitel.com

◆ Pan Sea Hotel - 씨엠립강 동쪽에 위치해 있다. ☎ 963390  http://www.pansea-angkor.com

◆ Angkor Hotel - 6번 국도상에 위치해 있다. ☎ 964301  http://www.angkor-hotel-cambodia.com



식당 정보

씨엠립은 다양한 숙소뿐만 아니라 먹거리도 매우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크메르 음식 뿐만 아니라 베트남, 태국, 중국, 서양 요리 등 선택의 폭이 넓은 편이다. 그리고 바욘 2 레스토랑, 쿨렌 2 레스토랑, 짜오프라야 레스토랑 등에서는 압사라 댄스도 관람할 수 있다.


식당명 내용

◆ Bayon Restaurant - 씨엠립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이다. 크메르 음식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바욘 2 레스토랑에서는 매일 저녁 압사라 댄스 공연을 관람(식사 포함 10~11$)할 수 있다.

◆ Samapheap Restaurant - 대형 음식점으로 유명하며, 크메르 음식, 서양 음식 등을 제공한다. 시내 동쪽(6번 국도 아래) 씨엠립강 근처에 위치해 있다.

◆ Chivit Thai - 씨엠립에서 태국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왓 보 거리의 Mom's Guesthouse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 Deadfish Tower - 태국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다. 종전의 구시장에서 시와타 거리로 이동해서 영업중이다. ☏ 012-630377

◆ Soup Dragon - 베트남 음식을 전문적으로 즐길 수 있으며 특히 쌀국수(Pho)가 유명하다. 중국, 사양음식도 제공한다. 구시장 위쪽에 위치해 있다.

◆ Chao Praya - 크메르, 태국 등의 음식을 제공하는 뷔페식 레스토랑이다. 시내 북쪽 앙코르왓 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 저녁에는 압사라 댄스 공연을 한다.

◆ Kulen 2 Restaurant - 뷔폐식 레스토랑으로 저녁에 압사라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식사 포함하여 10$ 정도이다. 참고적으로 숫자 2는 캄보디아어로 "삐"로 발음한다.

◆ Red Piano - 구시장 북쪽 방향에 위치해 있다. 크메르, 서양 요리 등을 제공한다. 게스트하우스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영화 툼레이더 촬영시 안젤리나 졸리가 들렀던 곳이라고 한다.


씨엠립 교통 정보 


씨엠립을 드나들 수 있는 교통편으로는 항공, 미니버스, 배, 택시 등이 있다. 캄보디아에서 가장 활발한 도시라는 점에 비춰본다면 교통편이 아주 좋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캄보디아 국내 교통수단의 개괄적인 안내 및 관련 이동 정보는 아래 링크 [교통수단]과 [캄보디아 드나들기] 메뉴를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서 누락된 관련 정보는 이 메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 항공(AIR)

⑴ 씨엠립 공항은 프놈펜의 포첸통 공항과 마찬가지로 캄보디아의 국제공항이다. 공항은 시내 북서쪽 방향 약 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6번 국도 위쪽)해 있으며 모또로 이동시 1$, 택시로 이동시 5$ 정도의 비용이 든다. 국내선의 경우 현재 "씨엠립↔프놈펜" 구간만 취항중이다. 로얄 프놈펜 항공(Royal Phnom Penh Airways), 씨엠립 항공(Siem Reap Airways) 등에서 하루 10회 정도 운항하고 있으며 요금은 편도 50~60$ 내외, 왕복 90~130$ 정도이다. 공항의 국내선 이용료는 5$이다.

⑵ 국제선의 경우 씨엠립↔방콕(태국), 씨엠립↔호치민(베트남), 씨엠립↔비엔티엔(라오스)구간을 운항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과도 연결된다. 이 중 가장 일반적인 노선은 "씨엠립↔방콕" 구간으로 태국의 방콕항공(Bangkok Airways)에서 노선을 운항중이다. 요금은 편도 160$, 왕복 310$ 정도이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Siem Reap Airways, Royal Phnom Penh Airways에서는 씨엠립↔호치민 구간을 운항하고 있다. 베트남의 Vietnam Airlines에서도 씨엠립↔호치민 구간(편도/왕복 110/220$)을 운항하고 있다. 그리고 라오스의 Lao Aviation에서는 씨엠립↔비엔티엔(위앙짠) 구간을 주 4회 정도 운항하고 있으며 편도 요금은 145$ 정도이다. 간혹 팍세(Pakse)를 경유한다는 정보도 있다. 이외에도 태국 푸켓과 수코타이, 베트남의 다낭,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등의 구간도 운항중이라고 한다. 씨엠립공항의 국제선 이용료는 20$이다.

[항공사 / 전화번호 / 위치]

 Royal Phnom Penh Airways  ☏ 012-825754  구시장(프사 짜, Psar Chaa) 근처에 위치.

 Siem Reap Airways  ☎ 380192  시내 북서쪽 6번 국도(NH6) 상에 위치.

 President Airlines  ☎ 964338  시바타(시와타) 거리(Phlauv Sivatha)에 위치.

 Bangkok Airways  ☎ 380191  시내 북서쪽 6번 국도(NH6) 상에 위치.

 Lao Aviation  ☎ 963283  구시장(Psar Chaa) 근처 북서쪽 방향에 위치.

 Vietnam Airlines  ☎ 964488  시내 북서쪽 6번 국도(NH6) 상에 위치.


◑ 미니버스, 픽업트럭, 택시

씨엠립과 주변 지역간의 이동시 가장 효과적인 교통수단은 미니버스와 픽업트럭, 그리고 (자가용)택시이다. 정규노선 버스는 현재 운행되지 않고 있다. 차후 도로 여건이 좋아진다면 프놈펜과 정규 노선이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가장 교통편이 활발한 구간은 씨엠립↔포이펫 구간이다. 이 구간의 교통수단은 현지의 게스트하우스나 여행사 등에서 섭외가능(주로 미니버스)하며, 또한 이들과 연계되지 않은 교통수단을 섭외(주로 픽업트럭)하는 것도 가능하다. 먼저 씨엠립→포이펫(Poipet) 구간의 미니버스 요금은 4$ 정도이며 오전 7시 경에 출발한다(4~5시간 소요). 씨엠립→방콕(태국)까지 연결하는 것도 가능한데, 이 경우 국경에서 갈아타야 하며 요금은 10$ 정도이다. 게스트하우스와 연계되지 않은 교통수단(픽업트럭)은 프싸 르(Psar Leu) 주변에서 섭외가능하다. 픽업트럭의 요금은 4~5$ 정도이다. 그리고 택시는 4명 정도 모아서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데 이 경우 택시 한 대당 25$ 정도이다. 그리고 포이펫→씨엠립 구간은 "[여행정보] → [캄보디아 드나들기]" 메뉴를 참조하기 바란다. 비용은 씨엠립→포이펫 구간과 비슷하다. 다만 씨엠립 현지의 게스트하우스에 국경 픽업을 요청하지 않고 국경에서 직접 삐끼들과 흥정할 경우 어려움이 따를수 있다.

씨엠립↔프놈펜 구간은 과거 도로 여건이 좋지 않아 주로 배를 타고 이동하곤 했다. 그러나 최근 도로 여건이 조금씩 좋아지면서 육로(6번 국도)로 이동하는 여행객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미니버스의 경우 씨엠립과 프놈펜 현지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서로 연계하여 직접 운행하고 있다. 예를들면 씨엠립의 Popular Guesthouse와 Capitol Guesthouse가 연계되어 있다. 요금은 4$ 정도이며 오전 07:00시에 출발한다. 이동하는 데에는 대략 8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런데 이렇게 게스트하우스에서 연계된 미니버스를 이용할 경우 해당 게스트하우스에만 숙소를 정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픽업트럭을 섭외하는 것도 가능하나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씨엠립↔바탐방 구간은 먼저 씨소폰을 경유해야 한다. 따라서 바로 씨엠립-바탐방 구간을 연결하기 보다는 우선 씨소폰까지 이동한 후 씨소폰에서 다시 바탐방으로 가는 교통편을 섭외해야 한다.

그리고 이 외에도 안롱벵, 꼼퐁톰, 꼼퐁참 구간도 픽업트럭 등을 섭외해서 이동할 수 있다. 씨엠립→꼼퐁톰 구간의 픽업트럭 요금은 15,000/7000R(인사이드/아웃사이드) 정도이며 약 4시간 정도 소요된다.

◑ 배(보트)

씨엠립↔프놈펜 구간은 아시아 최대의 호수인 톤레삽 호수를 통해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많은 여행객들이 이 구간을 이용하고 있다. 이동하는 데 대략 4-5시간 정도 소요되나, 건기에는 다소 더 걸릴 수도 있다. 배(스피드보트)의 요금은 25$ 원칙이나 현재 게스트하우스 등에서 22$ 정도에 구입할 수 있다. 그런데 배의 선착장은 씨엠립에서 남쪽방향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다. 글로벌 홈스테이에서는 보트 요금과 선착장까지의 픽업트럭 요금을 합쳐 23$(배 22$ + 픽업트럭 1$) 정도를 받고 있다. 만약 다른 곳(여행사 등)에서 좀 더 저렴하게 배표를 구입했다면 선착장까지의 픽업 요금이 포함되었는지 등의 조건을 상세히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선착장까지의 픽업 요금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개인적으로 모또(1$), 혹은 택시(5$)를 섭외해야 한다. 배는 오전 07:00에 출발하므로 숙소에서 05:30~06:00경에 출발해야 한다.

씨엠립↔바탐방 구간도 톤레삽 호수를 통해서 이동 가능하다. 다만 바탐방에 이르는 상커 강(Stung Sangker)의 길목이 좁은 관계로 배의 규모는 좀 작은 편이다. 프놈펜행과 마찬가지로 같은 선착장에서 오전 07:00에 출발하며 요금은 13~15$ 정도이다. 이동하는 데에는 3~4시간 정도 소요(수위가 높을때 기준)된다. 그러나 수위가 낮은 시기에는 배의 규모도 6인승 정도만 운행되며 시간도 오래 걸린다.

씨엠립 주변 지역 

씨엠립 지역은 앙코르 유적(Ankor Ruins)과 톤레삽(Tonle Sap) 호수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외에도 씨엠립 동쪽 방향에는 벵 메알리아(Beng Mealea) 사원이 있으며, 이 사원 북쪽 6.5km 지점에는 프놈 쿨렌(쿨렌 산, Phnom Kulen)이 있다.


▶ 벵 메알리아 Beng Mealea

벵 메알리아(Beng Mealea) 사원은 씨엠립의 유적과 마찬가지로 앙코르 시대의 유적(12세기)이다. 씨엠립 동쪽 방향 60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가는 데 적어도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이 사원은 수리야바르만 2세 때 건립(1112-52 재위. 왕실 자료에 의하면 1113-1150)되었으며, 씨엠립의 앙코르 왓과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 프놈 쿨렌(Phnom Kulen)

프놈 쿨렌(쿨렌 산, Phnom Kulen)은 Beng Mealea 사원 북쪽 방향 6.5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산(山)으로 높이는 487m 정도이다. 이 지역 주변이 대체로 저지대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래도 높은 편에 속한다. 현재 이 지역은 국립공원(Phnom Kulen National Park)으로 지정되어 있다. (LAST UPDATE: 2003.11.19 - 16:56)


■ 여행 출발 전 준비 사항

우선 날이 덥다는 것에 대하여 철저한 준비와 유적지 이해를 위한 정보책자 그리고 최소한 볼거리에 대한 메모와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카메라 및 메모장을 준비 하도록 한다.

물 / 썬 블럭 크림 / 카메라 / 모자 / 선글라스 / 안내서 / 메모장


 ■ 입장료

앙코르 왓트 유적군의 요금은 한번에 구입하여 전체 유적군을 볼수 있도록 되어 있다. 날짜에 따라 요금이 다르니 일정에 따라 알맞은 패스(입장권)을 구입하도록 하자


- 1일권 : 미화 20달러 / 3일권 : 미화 40달러 / 7일권 : 미화 60달러

   

2일을 관람할려면 1일권을 두번 끊던가 아니면 3일권을 끊고 2일을 사용하여야 하며, 4~6일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티켓팅하여야 한다.

1일권은 사진이 필요없으나 3일권 이상은 사진 한장이 필요하다. 사진 규격은 2.5cm x 2 cm이다. 사진이 없는 경우에는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는데, 4명이 모여야만 현상을 해주고, 가지고간 사진보다는 사진의 질이 훨씬 떨어지므로 사진을 가지고 가는게 좋다.


3. ■ 앙코르 유적의 이해

  앙코르 왓트, 앙코르 톰, 바이욘 사원, 따 프롬, 니악 뽀안, 프레아 칸, 쁘레 룹, 톰마논, 

반티아이 끄데이, 쓰라 쓰랑, 프놈 바켕, 따 케우, (반티아이 쓰레이, 반티아이 쌈레, 롤루오스 유적군)


  앙코르 왕국 유적지 세부 지도 보기


 

  아마도 몇 번이고 앙코르 왓트를 다녀와도 앙코르 왓트가 주는 신비감에 따른 비밀스러운 부분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유적지의 규모와 예술성을 떠나서라도 그 시기에 그러한 곳에 상상하기 힘든 왕국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유적지를 보고 난 후에는 오히려 더더욱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앙코르 왓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앙코르 왓트는 역사적 접근보다는 종교적 접근과 문화적 접근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토속신앙을 바탕으로 한 힌두교와 대승불교 그리고 소승불교가 어우러져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데 기본적인 종교적 이해만 있어도 앙코르 유적군을 이해하는데는 상당한 도움이 된다. 또한 앙코르 유적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힌두교에 대한 이해와 그들이 당시 가지고 있었던 우주관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으로 보인다.

 크메르 역사에 대한 연대기를 논한다면 이렇게 정리하면 좋을 듯 싶다.


- 앙코르 왓트 왕국 이전 시대

- 앙코르 왓트 왕국 시대 :    롤루우스 유적군의 프레아코 양식 : 875년-893년

                             바켕양식 : 893년 이후 - 925년

                             쁘레 룹 양식 : 947년 - 965년

                             반띠아이 쓰레이 양식 : 967년 - 1000년

                             클리앙 양식 : 965년 - 1010년

                             바푸온 양식 : 1010년 - 1080년

                             앙코르 왓트 양식 : 1100년 - 1175년

   바욘양식 : 1177년 - 1230년

- 앙코르 왕국 이후 시대

(1) ■ 앙코르 왓트의 이해

 

언어적으로 앙코르는 '도시'를 뜻하며 와트는 '사원'을 뜻한다. 당시의 도시는 추정컨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도시라는 개념보다는 국가의 개념이 더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즉 앙코르는 '도시사원'이라고 제한적인 해석보다는 한 국가의 거대한 사원으로 보는 것이 옳다. 앙코르 왓트는 앙코르 유적지 중 가장 큰 사원이며 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동시에 크메르 건축 예술의 극치를 이루는 역사적인 예술품이다.

 이 앙코르 왓트 사원의 구성, 균형, 설계 기술, 조각과 부조 등의 완벽함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앙코르 왓트는 그 구성 내용의 의미를 살펴보면 석조 건축물로 만들어진 우주의 축소판이며 지상에 있는 우주의 모형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앙코르 왓트의 외형적 규모를 간단히 살펴보면 앙코르 왓트는 길이 1.3키로미터에서 1.5키로미터의 인공 호수로 둘러 싸여져 있으며 그 폭은 200미터에 이른다. 과거 로마제국의 전성기 시대 때의 인구가 50만이었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이 앙코르 제국의 당시 추정인구를 100만 명 정도로 추정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겠으며 그 규모에 걸맞게 지금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이 되어 있다.

 

앙코르 왓트의 유적지를 큰 틀에서 구성내용을 살펴본다면 성곽이 있고 그 안에 사원이 있으며 성곽 밖으로 해자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는 당시의 우주관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성곽 안의 사원은 불교의 중심지인 메루산(수미산)을 의미하여 성곽은 히말리야산맥을 그리고 성곽 주위의 해자는 대양(큰바다)를 의미한다고 한다.

앙코르 왓트 유적지가 묘지가 아니었는가 하는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또한 각종 양각 부조물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며 조각되어 있다는 점도 당시의 힌두교의 장례식 절차에 의한 법도임에 따라 그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단지 추측일 뿐이며 한편으로는 여기에 대한 반론도 상당한데 이 사원을 무덤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규모가 크며 사원의 구성으로 보았을 때 무덤의 구성이라기보다는 외곽의 벽등여러 상황을 볼 때 왕궁의 형태라는 점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에 이 사원에 있던 수많은 목조건물들이 있었음을 감안할 때 무덤이라는 설은 아무래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듯 싶다.

과거 캄보디아에서는 왕이란 지상에서 신을 대신하여 신의 능력을 부여받아 국가를 보호하고 국민을 통치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것은 이 사원이 지어진 동기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왜냐하면 입구의 참배도로로부터 들어가기 시작하면 입구에 영원불사의 뱀신인 '나가'가 있는데 이 '나가'는 인간과 신들을 연결시켜 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의 왕이 결국 인간에서 신으로 승격되고자 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져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바침하듯 당시의 크메르인은 왕을 신격화하였고 그 바탕으로 크메르인은 뭉쳤으며 왕은 왕권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캄보디아 정세를 보면 캄보디아는 당시 이웃나라인 베트남(당시는 참파왕국)의 잦은 침공으로 나라가 황폐해지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1113년에 수리야바르만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나라를 평정하고 강대해져 외부의 침입을 막는 것은 물론 오히려 외부로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앙코르 왓트는 이 시기에 건설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의 석조건물로서의 규모로 본다면 세계 최대의 석조 건물로 간주되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대규모의 공사로 추정된다. 추정하건대 이 앙코르 왓트를 세우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몇 십 년을 공사했을 것이다.

 

  ▣ 앙코르 왓트 자세히 살펴 보기

 

앙코르 왓트의 내부에는 무엇이 있으며 무엇을 볼 것인가! 앙코르 왓트는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전체가 제1회랑(주벽), 제2회랑, 제3회랑이 있다. 이 회랑에는 힌두교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부조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러한 내용을 모르고 앙코르 왓트를 감상한다면 한낱 앙코르 왓트는 돌조각에 불과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앤 처음 앙코르 왓트는 서문(입구)으로 입장을 하게 되는데 서쪽의 입구에서 성곽입구까지는 500여미터에 달하는 참배도로를 걸어 들어가야 한다. 입구에는 일곱개의 머리를 가진 뱀신인 '나가'가 기다리고 있다. (오른쪽 사진) 

'나가'는 힌두교에서는 절대 죽지 않은 뱀신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나가'는 인간과 신을 연결시켜주는 무지개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에 따라 인간이 신으로 다가가는 과정을 담기 위하여 앙코르 왓트에서는 이러한 나가신을 참배도로 입구에 세워놓지 않았나 싶다.

앙코르왓트의 구조는 전체적으로 보면 세 개의 회랑으로 쌓여 있는데 각 회랑의 볼거리와 주요 내용을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회랑

위치

번호

주요 볼거리

제1회랑

서면 남쪽 (입구부분)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의 내용에 대한 부조

남면 서쪽

수르야바르만 2세 군대 행렬

남면 동쪽

천국도와 지옥도

동면 남쪽

힌두교의 천지창조와 관련된 유해교반(우유의 바다 휘젓기)

동면 북쪽

악마를 쳐부수는 비슈누신

북면 동쪽

크리슈나와 바나의 전투

북면 서쪽

선신들과 악신들의 전투

서면 북쪽 (입구부분)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의 내용에 대한 부조

제2회랑

회랑안쪽 서남쪽

 

다섯명의 여신상

제3회랑

중앙사당

 

입불상 및 열반불상

  * 방향잡기 : 씨엠리업기준으로 앙코르왓트는 북쪽에 위치하며 입구는 서쪽에 위치함.


▶ 라마야나 이야기

이 부분은 태국의 에메랄드 사원에도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인도의 대서사시로, 내용은 선과 악이 싸워 선이 이긴다는 내용이다. 내용을 보기 전에 등장인물부터 살펴보면,

  - 라마 : 비슈누신의 화신으로서 이상적이고 용맹한 왕의 전형

  - 시타 : 라마의 왕자비로 라바나에게 잡혀 갖은 수난을 당한다

  - 하누만 : 바람의 신의 아들이며 라마를 뽑는 원숭이왕

  - 라바나 : 열개의 머리와 20개의 팔을 가진 악마이며, 신에 의해서는 죽지 않는다.

예전에 라바나라는 악마가 살고 있었다. 그 악마는 신들에 의해서는 죽지 않는다는 천명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라바나는 한없이 오만해져서 신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를 보다 못한 신들이 신들에 의해서는 죽지 않지만 인간이나 원숭이에 의해서는 죽으므로 인간과 원숭이로 화신하여 라바나를 죽이기로 한다.

하여, 비슈누는 코살라국의 왕자인 라마로 화신하고 다른 신들은 원숭이로 화신한다. 라마가 성인이 되어서 시타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을 하는데 라바나가 우연히 시타를 보고서 반하게 되어 시타를 납치한다. 그리고 라마는 원숭이 왕인 하누만과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라바나가 사는 땅인 랑카를 쳐들어가서 아내인 시타를 되찾아 온다는 이야기다.

이 과정 중에 정말 많은 일들이 추가가 되어서 인도의 대서사시를 만들어 내는데, 역사적 인물인 라마를 힌두교의 주신의 하나인 비슈누신의 화신으로 설정해 놓아 이 역사시에 종교적인 의의를 부여하고 라마 숭배를 왕성하게 하여 후세의 문학과 종교 및 사상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영향으로 말미암아 '라마야나'는 주변국인 자바 ․말레이 ․타이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에 전해져 번역 ․번안되는가 하면, 그것을 극화 ․무용화하고 그림자극에까지 수용하게 되었다. 나중에 태국에서는 이를 번안하여 에머랄드사원에 '라마키나'라는 내용으로 옮겨 놓았으며 이 서사시에 나오는 이상국인 아요디야(인도의 바르나시 북쪽에 있다고 함)는 나중에 아유타야 왕조가 이름을 지을 때 이 서사시에 나오는 이상적인 도시의 이름을 따서 아유타야를 나라명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태국의 방콕왕조가 각자의 이름보다는 '라마'라고 하는 호칭을 사용하는데는 이 서사시에 나오는 라마를 본 따 가장 용감하고 덕이 있는 군주로서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라고 한다. 

 

▶ 유해교반(우유의 바다 휘젓기)


유해교반은 앙코르 왓트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서 꼭 봐야 될 것이며 힌두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유해교반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천지창조의 내용을 담고 있는 관계로 힌두교 사원이 있는 곳이면 어렵지 않게 이 유해교반에 대한 내용을 쉽게 접할 수가 있다. 주된 내용은 신화에 나오는 신과 악마들이 영원 불사의 영약을 만드는 과정을 표현한 것인데 그 방법이 1000년 동안 우유의 바다를 휘젖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내용의 부조물을 앙코르와트 제1회랑에서 볼 수가 있다.

신들의 세계에서 악과 선의 신들이 쉬지 않고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승부가 안나자 힌두교의 3주신중의 하나인 비슈누신에게 이 싸움을 해결해 달라고 한다. 그러자 비슈누신은 싸움보다는 서로가 오랫동안 죽지 않고 살수 있는 영원불사의 약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선신과 악신이 그 방법을 따라 하기 시작하는데 그 방법이 커다란 뱀 '바수키'의 몸을 밧줄 삼아서 젖의 바다를 젖는 것이었다.

이때 악마들은 '바수키'의 머리 부분을 잡았으며 신들은 꼬리부분을 잡았는데 무려 1000년 동안 이렇게 바다를 휘젓자 힘에 부친 뱀 '바수키'는 독을 뿜어내게 되는데 바수키의 독이 세상에 퍼지면 세상이 멸망하기 때문에 비슈누는 시바신에게 이 독을 마셔 달라고 한다.

하지만 바수키의 독이 너무 독해서 시바신의 목이 파랗게 타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림에서 시바신의 목은 파랗게 표현된다.

오랜 시간의 휘저음에서 메루산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자 비슈누가 거북이로 화신하여 메루산을 떠받친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천상의 무희 압살라, 백마, 사랑과 미의 여신 락슈미 등이 태어나고 제일 마지막에 영원불사의 묘약으로 알려진 '암리타'를 끝내 얻게 된다.


<2차 자료>

앙코르 왓(Angkor Wat) 


앙코르 시대의 역사적 자료는 산스크리트어나 고대 크메르어, 소승불교의 경전을 기록하는데 사용된 팔리(pali)어로 비문에 새겨저 있으나 발굴된 자료가 많지 않고 기록된 내용 또한 부분적이고 단편적이며 한정적인 것들인 데다 지배층에 국한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자료적 한계 속에서도 숲속에 잠자던 앙코르왓을 세계 속에 알린 것은 18세기 이후 동양문화를 탐험하려는 프랑스의 동양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1세대의 선구자인 아벨 레뮈사(Abel Remusat)는 왕립도서관에서 중국 관련 목록을 편찬하면서 크메르의 고대사 연구에 중용한 단서를 찾아냈는데, 그것이 바로 주달관의 견문록 <진랍풍토기>였다. 그는 이 기록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는데 초창기 동양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가치를 제공했다. 이후 폴 펠리오, 조르쥬 세데스가 후속 연구를 이어받아 캄보디아사 연구에 한 획을 긋게 된다.

앙코르 왓(Angkor Wat, 맞춤법 표기상 왕코르 와트가 정확하나 이곳에서는 앙코르 왓이라고 표기함)은 수리야바르만 2세(1113-1150)가 비슈누신에게 바치기 위해 지은 사원이며 그가 죽은 후에도 부분적으로 부조가 조각 되는 등 37년 이상의 세월 속에서 건축되었다. 앙코르 왓은 남북의 길이가 1.3km, 동서 1.5km에 이를 만큼 광대한 피라미드형 사원이며 개방형으로 건축되어 좌우 대칭미와 뛰어난 시각성을 자랑한다. 출입구가 서쪽을 향해 있고 건축의 중심축이 서~동으로 전개되어 있는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앙코르 왓은 중앙에 있는 신전을 세 겹의 회랑(回廊)이 감싸고 있으며 바깥쪽에는 주벽(周壁)을 만들고 그 외부에 저수지(해자,垓字)를 배치했다. 또 사원 안에 40m의 작은 연못을 남쪽과 북쪽에 한 개씩 만들고, 주벽을 4.5m의 높이로 쌓아올려 사원을 속세와 구분 짓는 공간 개념을 반영했다. 저수지는 대양을 뜻하고, 중앙의 신전은 신왕(神王)의 권위를 상징한다.

앙코르 왓은 사면(四面)에 출입문이 있다. 출입문은 주벽의 동, 남, 북에 각각 하나씩 있으며 정문의 서쪽에는 다섯 개나 된다. 서쪽 정문의 출입구 가운데 두 개는 코끼리 부대와 기마 부대인 주력군이 출입할 수 있도록 군사용으로 활용되었으며, 나머지 세 개는 바라문을 비롯한 출입자들이 사용했다.

앙코르 왓은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사원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기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앙코르 왓이 신들을 위한 사원인지, 왕의 장제전인지 건축용도를 둘러싸고 학자들간에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다. 캄보디아의 전설에 의하면 앙코르 왓은 원래 왕궁이었으며, 왕의 사후에는 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조르쥬 세데스는 앙코르 왓의 성격에 대해서 비뉴수신에게 바쳐진 신전이었으나 수리야바르만왕의 사후에는 왕의 묘가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설에 의하면 앙코르 유적 사원의 대부분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데 반해, 앙코르 왓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그 이유로 묘지라는 설도 있다.

앙코르 왓의 회랑은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중앙의 탑을 기준으로 장방형 형태에 세겹으로 둘러쌓여 있다. 중앙의 첨탑이 있는 회랑을 제1회랑, 가운데 제2층의 회랑을 제2회랑, 바깥에 있는 회랑을 제3회랑이라고 한다. 물론 세 개의 회랑 가운데 가장 뛰어난 시각성과 회화성을 자랑하는 것은 제3회랑이다. 참고적으로 앙코르 왓을 소개하는 많은 책들은 바깥을 제1회랑, 안쪽을 제3회랑이라고 부르고 있다(서규석씨는 만다라의 원리상 이를 반대로 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3회랑의 부조 가운데 주요 장면은 대략 열 개 정도이다. 제3회랑을 田 형태로 분할하고 이를 서쪽 정면에서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쿠루평원의 전투(서쪽벽 남측문), (2) 시바신(남서쪽 모서리), (3) 수리야바르만왕의 행진(남쪽벽 서측면), (4) 천국과 지옥(남쪽벽 동측면), (5) 유유바다 젓기(乳海攪拌, 동쪽벽 남측면), (6) 비슈누신과 아수라(동쪽벽 북측면), (7) 크리슈나와 아수라인 바나의 전투(북쪽벽 동측면), (8) 21명의 신과 21명� 아수라(북쪽벽 남측면), (9) 비슈누신(동서쪽 모서리), (10) 랑카의 전투(서쪽벽 북측면) 순이 된다.

제3회랑에서 제2회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수 십 개의 기둥이 서 있는 다주실(多柱室) 건물을 통과해야 한다. 이 곳이 십자회랑이다. 제3회랑과 제2회랑 사이에 황금으로 덧칠한 기둥이 십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십자회랑이라 부르는 이 곳은 앙코르 왓에서 유일하게 넓은 공간이다. 여기서부터 지상계가 끝나고 신의 세계가 시작된다. 역사적인 부조장면을 장식한 지상의 세계는 제3회랑에서 끝나며 십자회랑에서부터 비슈누신의 만다라산으로 올라가는 신의 세계가 시작된다.

제2회랑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건축으로 표현한 곳이기 때문에 회랑 내부가 어둡다. 우선 서쪽에는 하나의 창문만 있고 남쪽 75m 길이에는 9개의 창문이 나있다. 반면 동쪽에는 26개(북측 14, 남측 12개), 북쪽은 32개의 창문이 나있다. 이들 창문은 달의 주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회랑에는 1500여 명이 넘는 압사라, 여신들이 조각되어 있어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중앙신전이 있는 제1회랑은 어두컴컴한 제2회랑과는 대조적으로 장엄한 곳이다. 제1회랑으로 올라가는 것 또한 쉽지 않다. 70도로 경사진 중앙신전은 당시에 왕과 최고의 사제들만이 출입하도록 제한했을 만큼 성스로운 곳이다. 따라서 중앙탑을 오르는 데는 계단을 손으로 잡고 한발자국씩 움직여야 한다. 즉 인간의 접근을 쉽게 허용치 않는 곳이다. 제1회랑은 우주의 중심 메루산(수미산), 혹은 우유바다 젓기의 중심축을 상징하며, 비슈누신이 거주하는 장소다. 이와 같은 상징은 12, 28, 108(54/54), 365 등과 같은 숫자를 통해서 풀이할 수 있다. 중앙신전에는 네 개의 탑과 중앙탑이 있는데, 이 중앙첨탑은 높이가 약 60m이다(프랑스 학자 나필리앙의 조사에 의하면 정확한 높이는 58.08m라고 한다). 이 곳이 신들이 거주하는 우주의 중심 메루산이며, 비슈누신이 강림하여 왕과 신이 일체화하는 장소이다. 중앙신전은 새로운 왕이 등극할 때마다 엄숙한 의식을 거행하여 국민들에게 신왕사상을 주입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만다라 세계를 이루어 나가려 했다. 만다라는 중앙에서 시작하여 바깥으로 세계를 구성해 간다. 최고의 신이 사방과 주변의 신을 창조하여 만다라를 채워간다. 즉 앙코르왓은 바로 우주의 중심 메루산을 중심으로 우주적인 만다라를 이루고 바깥을 향해 시간과 공간을 채워가는 형식의 비슈누 사원이다.

* 메루산(Meru) : 대륙의 정 중앙에 있다고 하는 세계의 중심산. 힌두교에서 메루산은 8만4천 요자나   (126만km)의 정상에 인드라신을 비롯하여 주요 신들이 거주하는 성스러운 산으로 만다라산과 카일라사산 등 네 개의 봉우리가 감싸고 있다. 소승불교에서는 수메루(Sumeru)로 불리며 흔히 수미산(須彌山)으로 번역된다. 크메르의 사원은 메루산을 형상화하여 피라미드 형으로 짓거나 산 위에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 만다라(Mandala) : '에워싸다'는 mand에서 유래한 만다라는 동서남북으로 문이 있는 불탑(stupa)의 평면도에서 그 개념이 출발했다. 만다라는 원, 구(球), 차륜 등 완전무결과 무수한 원심을 가진 원을 상징한다.

* 진랍(眞臘) : 점랍(占臘)이라고도 한다. 진랍(chenla, zenla)은 <수서(隨書)>에서, 점랍은 <송사(宋史)>의 진랍전(眞臘傳)에서 나온다.

 (2) ■ 앙코르 톰의 이해

 앙코르 왓트가 '도시 사원'의 의미라면 앙코르(도시)톰(큰)... 커다란 도시라는 뜻이다.

다른 앙코르 유적군과 다른 점은 다른 곳은 한곳 한곳이 유적지인 반면에 이곳은 나름대로 또 다른 앙코르 톰 유적군을 내부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볼거리가 산재해 있으며 앙코르 유적군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앙코르톰이 세워진 배경은 다음과 같다. 한때 전성시대를 달리던 앙코르 왕국은 수르야바르만2세이후에 쇠퇴기를 맞이하게 된다. 결국은 지금의 베트남(당시의 참파왕국)에게 정복당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후 새로운 지도자 자야바르만7세가 나타나 참파왕국을 몰아내고 단시간에 앙코르왕국은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때 자야바르만7세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보다 강력한 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 성이 바로 앙코르 톰인 것이다.


이제 앙코르 톰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자! 앙코르 톰은 앙코르 와트와 함께 앙코르 유적군중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낼수 있는 곳으로 앙코르 왓트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져 있다. 한변의 길이가 3km의 정사각형 모양인 앙코르톰은 높이가 8m의 성벽과 너비 약 10m의 수로로 구성되어 있다. 앙코르 톰의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는 총 다섯개로서 북대문, 서대문, 남대문, 동쪽으로 승리의 문과 사자의 문이 있다. 일반적으로 여행자가 이용하게 되는 문은 남문이 된다. 당시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에는 죄인과 개는 출입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대승불교 신봉자였던 자야바르만 7세의 의해 건축된 앙코르 톰은 12세기 말-13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앙코르 유적지 중에서는 유일한 불교 건축물이며 특히 바욘에 있는 200여 개의 얼굴은 부처의 얼굴이기도 하고, 자야바르만 7세의 자신의 얼굴이기도 하다고 전해진다.

앙코르왕조의 마지막 도읍지인 앙코르 톰은 말 그대로 큰 성곽도시로 왕궁은 물론, 종교 건물과 관청 건물도 있었던 앙코르 제국의 중심지였다. 앙코르 톰은 동일한 시기 유럽의 어떠한 도시보다도 큰 도시였고, 인구도 많았는데 거의 100만에 이르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앙코르 톰의 구조는 사방 약 3km인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라테라이트로 쌓은 성벽의 높이는 약 8m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성벽의 바깥에는 폭 100m의 수로를 파서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도록 했으며 이로서 성곽국가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방어적 개념의 건축물임 우리는 쉽게 알 수 가 잇다. 국토의 70%이상이 평야며 산이 거의 없는 캄보디아에서는 외적의 침입에 대하여 방어가 무척이나 취약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성곽 밖으로 넓은 해자를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풍부한 나무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지은 석조 건축물 자체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배려였을 것으로 보인다.

성내의 왕궁과 사람이 살았던 건축물들은 주로 목조 건물이었으나 거의 다 썩어 없어져 버렸고 남아있는 석조물들도 많이 파손되어 남아 있지만 그것으로도 우리는 과거의 웅장했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앙코르 톰(Angkor Thom) 안에 있는 유적 

 

 앙코르 톰은 1177년 참파군의 침략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왕도를 요새화하기 위해 자야바르만 7세(1181-1219)가 건축한 것이다. 앙코르 톰에 높은 성벽을 세우고 다섯 개의 성문을 만들어 출입을 통제하는 한편 도성밖에 환호(環濠)를 만들어 이중의 견고한 방어막을 만들었다. 그 이후 앙코르 톰은 1431년 태국의 세력이 침입하여 도성을 함락시킬 대까지 2세기 동안 영광의 빛을 간직하였다.

앙코르 톰은 한 변이 3km, 높이 8m의 라테라이트로 성벽을 쌓은 성곽 도시로 한 가운데에 국가사원인 바욘이 위치해 있고 바푸온 사원을 비롯하여 왕궁, 코끼리 테라스, 나왕의 테라스, 텝 프라남, 프레아 파릴라이, 프레아 피투, 크레앙과 같은 수많은 유적이 모여 있다.

앙코르(angkor)는 산스크리트어로 왕궁도시를 뜻하는 나가라(nagara)에서 파생된 단어로 '도시국가'를 지칭하는 말이며, 톰(thom)은 형용사 '커다란' 뜻으로서 앙코르 톰은 곧 '대도시 국가'의 의미가 된다.

앙코르 톰의 성벽에는 다섯 개의 성문이 있다. 바욘 사원을 축으로 남문, 동문, 서문, 북문이 있으며 왕궁 앞 광장에서 동쪽을 향해 '승리의 문'이 하나 더 있다. 정문은 남문(남대문)이며, 동문은 '사자(死者)의 문'으로 불리었고, 승리의 문은 700km 떨어진 참파로 향하는 출발점인데 자야바르만 7세의 영토확장과 과거 앙코르의 함락에 대한 복수의 의미가 깔려 있는 곳이다.

성문은 높이가 20m로 사암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문 꼭대기에는 약 3m에 달하는 사면불(四面佛)로 조각된 관음보살상이 있다. 또한 성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다리 난간에는 좌우로 54개의 석상(石像)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이 조각은 앙코르왓(Angkor Wat) 회랑에 부조된 것처럼 힌두신화에서 신과 악마들이 장생불사의 영약을 만들기 위해 바수키 뱀의 꼬리를 축으로 천년동안 우유바다를 휘젖는 장면을 상징한다.


* 라테라이트(Laterite) : 철분과 알루미늄을 함유하여 붉은색을 가진 홍토석. 햇볕에 건조하면 시멘트     이상으로 재질이 단단하여 기둥이나 주춧돌로 많이 사용된다.

* 바수키(Vasuki) : 우유바다 젖기에서 신과 아수라가 바다를 회전시키는데 로프로 이용된 성스러운 뱀.    세샤뱀(Sesa)으로도 불린다.

* 프레아(Preah) : '성스러운, 존경하는' 뜻의 형용사. Pra, Prah도 같은 뜻이다. 프레아 산(Preah San)은    승려, 프레아 코(Preah Ko)는 성스러운 소, 프레아 칸(Preah Khan)은 성스러운 칼을 뜻한다.



앙코르 톰 자세히 살펴보기

 

앙코르 톰은 그 자체가 유적 하나가 아니라 그 안에 다시 세부적인 유적지가 있다는데 특징이 있다. 앙코르 톰의 세부 유적지를 살펴보면 우선 입장을 하게 되는 남대문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건축물이 있는데 그 내용을 미리 이해하도록 한다.

- 남문

- 앙코르 톰의 중심에 있는 사원인 '바이욘사원'

- 바이욘의 북서쪽에 자리잡은 바푸온,

- 왕궁터

- 코끼리의 테라스

<앙코르톰 남문>

- 문둥이왕의 테라스등이 주요 볼거리이다.


  [남문]

앙코르 톰에는 위의 약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총 5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여행객이 입장하는 문은 앙코르 왓트 유적지와 길이 연결되어 있는 남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남문은 높이가 25미터로서 높이가 3미터인 보살의 얼굴이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있는데 햇빛이 비치는 것에 따라 그 표정이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 남문을 통과하여 다시 1.5키로미터를 들어가야 앙코르 톰의 중앙부인 바이욘에 다다른다.

남문에 들어서기 전에 유의해서 봐야 할 것 한가지는 남대문 다리의 난간으로서 앙코르 왓트에서 나와 있는 유해교반(우유의 바다휘젓기)를 나타내는 조각상들이다. 

 

<유해교반(우유의 바다휘젓기)>

그림1).바푸온(Baphuon)


 

[바푸온(Baphuon)]

바푸온은 앙코르 유적지중에서는 세번째로 지어진 사원인데 앙코르 톰 바이욘의 북서쪽으로 있다. 수미산의 상징으로 3단의 피라밋 구조로 지어 졌으며 인도 파괴의 신인 쉬바신에게 바쳐진 힌두교 사원이다. 바푸온이 가지고 있는 뜻은 '숨긴 아이'라는 뜻인데 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과거 샴 왕국(지금의 태국)의 왕과 크메르의 왕은 형제 지간이었는데 샴의 왕이 자기의 아들을 이곳에 맡겼다고 한다. 이를 두고 크레르의 신하들은 크레르를 차지하려는 모략으로 여기고 샴의 아들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화가 난 샴의 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크메르를 쳐들어 오자 크메르의 왕비는 크메르의 왕자들을 이곳에 숨겼다고 한다. 여기에서 숨긴 아이라는 뜻의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바푸온(Baphuon)

바푸온은 '아들을 숨긴 사원'이란 뜻이다. 두 형제가 태국과 캄보디아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는데 태국 왕의 아들을 크메르 왕이 길렀다. 그러나 조카가 자라면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신하들의 충고를 듣고 왕이 그를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국 왕이 쳐들어오자 크메르의 왕비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이 사원에 숨겼다는 일화가 있다.

우아야디티야바르만 2세(1050-1066)때인 1060년에 지은 이 사원은 바욘 사원과 피미아나카스 사원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입구는 코끼리 테라스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변경이 있었다.

동쪽 탐문에서 사원 입구까지 200m에 달하는 참배길은 육교형식으로 설계되어 '공중 참배길'로 불리며, 1층은 120x100m, 2층은 70x65m, 3층은 50x45m의 규모다. 2층은 크리슈나의 어린 시절을 묘사한 부조가 있고,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의 부조가 있다.

주달관의 〈진랍풍토기〉에 바푸온 사원을 동탑(銅塔)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아 청동으로 만든 중앙탑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중앙탑은 허물어져 있는데, 학자들은 인근 사원을 건축할 때 바푸온은 석재를 가져다 활용한 때문으로 보고 있다.

건축사적으로 바푸온은 하나의 양식을 이루고 있는데 '바푸온 양식'은 첫째 코끼리나 나가 상(像)이 장식의 모티브로 등장하지 않으며, 둘재 회랑은 있으나 부조되어 있지 않고 탑문과 파풍(破風)에 부조를 해 넣은 방식이 주로 이용되었다. 셋째 주벽에 처음으로 부조가 새겨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소재는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였다. 넷째 인간을 소재로 한 조각은 가슴 윗부분이 누드로 표현되었으며 여신들의 스커트 길이는 발목까지 내려온다. 스커트는 완전한 주름을 이루고 물고기 꼬리모양(fish-tail type)으로 드레이핑(draping)하여 우아한 곡선미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1908년부터 1918년까지 코마유와 마르샬에 의해 복원되었고, 2002년에도 복원작업을 거쳤다.


* 라마야나(Ramayana) :인도의 시인 발미키(Valmiki)가 쓴 대 서사시로 전체 24,000송(1송은 16음절로 2행으로 되어 있다)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학자들에 의하면 기원전 4세기경부터 서기 200년 사이에 현재의 형태로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요드야 왕국의 라마왕자와 그를 돕는 원숭이 왕국의 하누만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악마의 왕 라바나의 전쟁을 그린 서사시로 라마왕자를 통하여 제왕이 따라야 할 정의, 도덕률, 규범을 제시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태국, 탐보디아 등 고전기 동남아시아의 궁정문학과 드라마, 연극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 마하바라타(Mahabharata) : 인도의 비야사(Vyasa)라는 성인이 기원전 5세기 경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대 서사시다. 인도 델리 북방의 쿠루평원에서 카우라바군과 판다바군 18사단이 18일간 벌이는 전쟁을 주제로 하여 전체 18편 10만송(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서사시 안에는 고대 인도의 종교, 신화, 도덕, 역사, 철학, 법률 등 수많은 자료가 들어있다. "마라바라타 안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들어 있으며, 이 안에 없는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인두 힌두교의 종교철학, 사상이 깃든 경전이다. 비슈누 신의 화신 크리슈나에게 아르쥬나가 정의와 도덕률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바가바드 기타>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그림 2) 피미아나카스

[왕궁터]

과거에 있었던 왕궁들이 대부분 목조건물로 이루어졌었는데 계속되는 아유타야왕조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모두 불타 소실 되어 버렸다. 지금은 그러한 흔적만이 남아 있는 곳으로서 바푸온위쪽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은 당시의 왕실의 힌두교 사원이었던 '피미아나카스'가 있으며 그 앞으로 코끼리의 테라스와 문둥이왕의 테라스가 자리 잡고 있다


피미아나카스(피메아나카스, Phimieanakas)

황금의 탑에서 국왕의 머리가 아홉 달린 뱀왕의 딸(nagi)과 밤바다 잠을 잤다는 설화를 간직한 이 사원은 자야바르만 4세(?) 때부터 건축이 시작되어 라젠드라바르만 2세, 수리야바르만 1세에 의해 성문과 성벽이 완성되는 등 후대의 왕들에 의해서 설계 변경이 이루어졌다.

사원의 이름은 '천상의 궁전, 공중누각'(산스크리트어로는 vimanaakasa)이란 뜻을 가졌지만 왕궁이 아니라 사원이다. 라테라이트로 지었으며 1층은 35x28m, 최상층은 30x25m에 이르나 회랑의 폭은 1m에 지나지 않는다. 사원 북쪽에는 125x45m의 남자의 연목, 동쪽에 40x20m의 여자의 연못(srah srei)이 있다. 1944년까지 네 차례나 복원되었다.


  [코끼리의 테라스]

왕궁터에 '피미나아카스' 앞에 세워져 있는 테라스로서 코끼리의 테라스는 실제 코끼리 크기만큼으로 코끼리가 새겨져 있고 그 테라스의 폭은 14미터 길이는 300미터나 된다. 과거 이곳에서는 각종 왕실행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특히 군대의 열병식 때 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은 코끼리의 테라스에서부터 뻗어져 있는 큰 길이 앙코르 톰의 승리의 문까지 연결되어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 테라스는 12세기 후반인 자야바르만7세 때 건축되었다


코끼리 테라스(Elephant Terrace)

왕궁 광장 앞에 위치하며 자야바르만 7세 때 건축되었다. 바푸온 사원에서부터 나왕의 테라스까지 약 300m 길이에 실물 크기의 코끼리, 가루다, 말, 폴로게임과 유사한 추각 게임 장면 등이 부조되어 있다.

이 곳은 자야바르만 7세가 군사행진을 하던 곳이며, 각종 행사가 열렸던 광장이었다. 1911년, 1916년 앙리 마르샬에 의해 복원되었다.


[문둥이왕의 테라스]

문둥이왕 테라스는 코끼리 테라스에서 북쪽편으로 7m 위쪽에 위치한다. 문둥이왕 테라스의 윗편에 나체의 문둥이 왕이 앉아 있는데 이 문둥이 왕은 성별을 구분할 수 있는 성적인 상징이 없다.(이것은 앙코르 유적의 또하나의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볼 수 있는 문둥이 왕의 석상은 진품은 아니고 진품은 현재 프놈팬 국립 박물관에 소장중이다. 유적에 있는 문둥이왕의 석상은 복원품이다.

문둥이왕 테라스는 벽이 이중벽인데 외부벽은 라테라이트로 되어 있고 안의 벽은 사암으로 부조들이 조각이 되어있다. 이 부조들은 상당히 보존 상태가 뛰어나다. 그러나 이렇게 벽이 두개인 것의 정확한 이유는 아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문둥이 왕 테라스의 '문둥이'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문둥이 왕의 석상이 성별이 구분이 되지 않아서 문둥이라는 설, 원래는 문둥이가 아니었는데 왕 앞에 엎드리지 않는 신하의 목을 벨 때 신하의 피가 몸에 튀어서 문둥이가 되었다는 설, 문둥이왕 테라스 아래에 보면 벽과 벽 사이에 수많은 부조들이 있는데, 그 부조에 왕의 살결이 물결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병을 앓은 왕이 아니었을까 하는 설, 문둥이 왕의 테라스의 원래 용도를 왕궁의 화장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왕궁의 화장터를 지키는 상이라면 죽음의 신인 야먀이므로 문둥이 왕의 석상은 야마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중에 무엇을 믿던지는 자신의 마음이다.

 

나왕(癩王)의 테라스(문둥이왕 테라스, Leper King Terrace)

자야바르만 7세 때 건축한 것으로 코끼리 테라스 옆에 위치하며 나가 상과 수많은 신들이 부조되어 있고 테라스 위에는 약 1m 크기의 나왕의 좌상(座像)이 있었다(현재 이 조각은 프놈펜의 국립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나왕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엇갈린다. 코마유는 시바신이라고 주장하며, 에이모니에는 야소바르만 1세라고 하고 조르쥬 세데스는 야마신이라고 주장하는 등 이견이 많다. 1911년, 1917년 앙리 마르샬에 의해 복원되었다

 


▶ 바이욘 사원의 이해 (앙코르 톰)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톰의 중심에 있는 사원으로서 앙코르톰을 건축한 자야바르만 7세가 건축한 사원이다. 사원의 모양은 거대한 바위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앙코르 왓트 유적군중에서 우물을 갖추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래 그림과도 같은 사면에 조각된 관세음보살상인데 이는 자야바르만7세를 나타낸다고 한다. 바욘은 전체적으로는 크고 작은 약 50여개의 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른 앙코르 왓트의 유적지가 대부분 힌두교를 바탕으로 한 신화의 내용을 주로 전달하고자 부조로 나타나는데 비해 이곳은 당시의 크레인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전쟁을 위주로 하여 조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추정하건대 아마도 당시의 왕이었던 자야바르만7세가 힌두교보다는 불교를 더욱 신봉하는데서 기인한 듯 싶다.바이욘 사원은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에 지어진 불교사원이다. 당시의 왕이었던 자야바르만7세는 캄보디아 최초로 힌두교를 멀리하고 대승불교(호국불교)를 가지고 왔는데 이는 스스로 참선을 통한 자기해탈의 목적을 얻기 위한 소승불교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즉 나라를 구하기 위한 불교로서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야바르만7세는 당시에는 획기적인 빈민구제시설을 설치하는 등 여러 사원들을 건립하였다. 그러한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자야바르만7세는 왕을 계승할 적통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신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왕권을 계승하다 보니 정통성의 왕권이 아닌, 즉 힌두교가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계급질서보다는 자연스럽게 백성을 대상으로 하여 직접 마주하는 대승불교를 선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불교의 관세음보살상으로 자칭하면서 대승불교를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런 배경이 그의 재임중에 많은 사원을 건축하게 되는데 바이욘 사원, 앙코르 톰, 프레아칸, 닉뽀안, 따 프롬 등의 사원이 그 실례이다.

 

 자야바르만 7세는 외교적 능력으로서는 1200년대 초 앙코르 왕국을 항상 노리고 있었던 베트남(당시는 참판 왕국)을 점령하였으며 저 멀리 태국 북부지역까지 영토를 넓혀 나갔다고 한다. 그런 흔적은 라오스의 비엔티안에서도 그의 비문이 발견 될 정도라고 하니 그 당시의 앙코르 제국의 영화와 힘을 상상할 수 있겠다. 자야바르만 7세는 탁월한 군사력과 정치력, 그리고 자신을 관세음보살과 일치시키며 신격화시킬 정도로 능력있는 왕이었으며 앙코르 왕국을 번영시킨 위대한 왕으로 남아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시 바이욘 건설 직후에는 황금빛으로 찬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앙코르의 유적지가 그렇하듯이 이 바이욘 사원도 어떤 목적으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이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톰의 중심에 있는데 아마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이욘사원은 크메르 우주론의 메루산을 상징한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처음 바이욘을 대하면 네면에 관음보살상이 있는 이 사원에 대하여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곳에 그렇게 큰 돌로서 관세음보살상을 만들어 놓은 이유를 묻는다면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흔히들 사람들은 바이욘 사원의 관세음보살상의 미소를 '앙코르의 미소'라고 표현하고 있다.

바욘(바이욘, Bayon)

바욘은 앙코르 톰의 동서남북 각 대문으로부터 1km 지점에 위치한 중심 사원으로 왕이 신봉하는 관음보살상인 4면불(四面佛)을 총 196개나 조각해 놓았다.

이 사원은 동쪽이 정문이며, 제1회랑은 동서 160m, 남북 140m이며 회랑 중앙에 제2회랑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제1회랑 벽면에는 민중의 생활상, 자야바르만 7세가 톤레삽 호수에서 참파군을 물리치는 해전장면이 부조되어 있다. 특히 톤레삽 호수에서 어망을 던져 고기를 잡는 장면, 시장에서 물건을 매매하는 장면, 장기를 두거나 닭싸움과 개싸움하는 장면,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장면 등 서민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물론 왕비를 비롯한 궁중여인과 귀족들의 생활상도 있다.

제2회랑은 동서 80m, 남북 70m에 달하는 데, 이 곳은 제1회랑과 달리 대부분 크리슈나, 시바신, 가루다를 탄 비슈누 신 등 힌두교 신화와 전설이 부조되어 있다.

한편, 상부 테라스에는 사면불인 관음보살상이 부조되어 있으며 회랑은 둥근 형태로 만들어졌다. 흔히 '크메르의 미소'로 평가되는 관음보살상 조각은 휴먼 모티브를 특징으로 한다. 얼굴은 보통 2m 내외이며 머리에는 연꽃 모양으로 장식을 둘렀다. 상층부의 중심탑 높이는 약 64m이며, 원형의 중심탑 주위에는 16기의 첨탑이 순례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 첨탑은 소위 '바이욘의 미소'로 불리는 것첨 은은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관음보살상이 4면으로 조각되어 있고, 첨탑 내부에는 전국 각지의 수호신이 모셔져 있어 기존 힌두교 세력을 개혁하기 위한 혁신적 사상이 반영된 승원이다.


* 크리슈나(Krishna) : 비슈누신의 여덟 번째 화신. 원 뜻은 비뉴수신의 검은 머리카락에서 파생되어 '                       검은 것'을 의미한다.

* 가루다(Garuda) : 비슈누신이 타고 다니는 새. 몸과 다리는 사람, 머리는 독수리 형상을 하고 있다.

* 크메르(Khmer) : 캄보디아 민족, 언어를 지칭한다.


▶ 따 프롬의 이해

 

앙코르 왓트의 유적지중에서 아마도 따 프롬처럼 인상적인 곳은 없는 듯 싶다. 물론 앙코르 왓트의 모습이나 앙코르 톰의 모습, 그리고 거기에 부속된 각종 부조물, 건축물이 불가사의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따 프롬이 주는 느낌은 어떤 면에서는 신비로운 감마저 느끼기도 한다. 그것은 따 프롬으로 가는 길이 앙코르의 유적군중에서 가장 고대의 냄새와 느낌이 나는 곳이며 자연앞에서 얼마나 인간이 나약한가를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 프롬(Ta Prohm)은 1186년경에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에게 헌정하기 위해서 지은 불교사원이다. 이곳은 앙코르 유적중에 몇 안되는 비문이 있는 사원이기도 하다. 앙코르 유적군 중에서 가장 정글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수백년 동안 방치되어온 따 프롬의 모습은 아래의 그림처럼 나무의 뿌리에 의해 파괴되어 앙코르 왓트의 유적군의 상징적인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러한 모습은 이곳을 방문할 때면 마치 막 돌기둥과 천장이 무너질 것과도 같은 느낌속에서 어찌 보면 고색 창연한 느낌마져 감돌고 있다. 

  

따라서 이곳은 앙코르 유적군중에서 가장 신비로운 맛을 풍기는 곳으로 꼭 들려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따 프롬으로 가는 길은 다른 어느 길보다도 고대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고 하는데 이곳으로 가늘 길을 캄보디아에서 이렇게 개발을 하지 않고 두는 이유는 자연이 어떻게 사원을 무너뜨렸으며 그 과정과 결과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라고 한다.


따 프롬에서 발견된 비문의 내용을 보면, 당시의 규모와 화려함을 알 수 있을 듯 싶다. 돌에 새겨진 기록에는 타 프롬은 당시 3140개의 마을을 통치하였고, 79,365명이 이 사원안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8명의 고승과 2,740명의 관리들과 2,202명의 인부들과 615명의 압싸라(무희)들, 그리고 일반 서민들이 1만여명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보는 타프롬은 그 규모를 상상하기 어려울 수가 있는데 과거의 타 프롬의 외벽은 길이가 동서로는 1키로미터, 남북으로는 600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원에 남아 있는 재산 중에는 500Kg이 넘는 황금 접시 한쌍과 35개의 다이아몬드, 40,620개의 진주, 4,540개의 보석, 876개의 중국에서 온 커튼, 512개의 비단 침대 그리고 523개의 양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숫자가 비록 왕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과장된 것들이기는 하지만 Ta Phrom 사원의 중요성과 의미를 잘 말해주고 있다. 


▶니악 뽀안의 이해

 

영문으로는 Neak Pean이라고 하는데 캄보디아어로 니악 뽀안은 '또아리를 튼 뱀' 이라는 뜻이다. 힌두교에서는 '나가'라는 뱀의 신이 나오는데 이 신은 영원불사의 뱀신으로 부처를 지키는 신으로 표현된다. 니악 뽀안은 12세기에 지워진 불교 사원인데 여기서 니악은 '나가'를 뜻하고 있다. 뱀신인 '나가'가 일곱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의 뱀도 실제 7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은 물이 없지만 원래는 커다란 연못의 한가운데에 이 니악 뽀안이 있었으며 이것은 우주의 꼭대기에 있는 즉 히말리야의 맨 꼭대기에 있는 아나파타파 호수를 상징하며 전설에 의하면 이 호수는 이 세상의 네개의 커다란 강의 근원지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이 호수는 그리 크지 않은 자그마한 인공호수라고 하는데 당시에 이 곳을 지었을 때 사원으로 가고자 하였을 때는 인공호수로 말미암아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호수의 중간에 보면 말을 잡고 있는 사람들의 조각이 보이는데 이 조각은 도굴 때문에 현재는 말의 형태와 사람들의 발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니악 뽀안 사방에 있는 4개의 동물이 조각된 조그마한 암자가 세상에 있는 네개의 강의 근원지를 의미한다. 아나파타파 호수를 인도에서는 풍작을 기원하는 의미로 숭배했는데 니악 뽀안은 아마 세상에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온 석가에게 바쳐진 것으로 추정된다. 1935년까지 니악 뽀안의 중앙 탑은 뱅골보리수 나무가 그 위에 자라고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니악 삐얀(닉펜, 니악 뽀안, Neak Pean)

자야바르만 7세 때 지은 이 사원은 자야타타카(북 바라이) 한 가운데 섬처럼 서 있는 불교사원이다. 이 곳은 왕이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온천장으로 개방하였으며, 사람과 말 모양의 급수구를 통해 물이 흘러가도록 해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곳은 '똬리를 튼 뱀'의 뜻으로 두 마리의 커다란 뱀이 중앙사당의 기단을 감싸고 있으며 나가와 신마(神馬)상이 조각의 주제다. 관음보살의 화신인 말(馬)이 난파한 어부를 구해줬다는 〈본생담(本生譚)〉을 간직한 곳인데, 물에 빠져죽지 않기 위해 말의 머리와 다리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과 자세가 생생히 부조되어 있다.

조르쥬 세데스에 의하면 이곳의 중앙연못은 병을 치유하는 불가사의한 물이라는 전설이 있고, 사람과 동물의 머리 모양으로 장식된 급수구에서 물이 흘러가도록 한 것은 히말라야에서 발원하는 4대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4개의 동물 조각 : 남자 얼굴>

연못

<4개의 동물조각 : 코끼리 머리>

중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작은 연못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곳은 남북 3.5km, 동서 0.9km의 저수지로 약 10만㎥의 물을 저장했던 곳이며 기능이 정디죈 동 바라이를 대체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4개의 동물 조각 : 말머리>

 

<4개의 동물조각 : 호랑이 얼굴>

  

 

▶ 프레아 칸의 이해

 

프레아 칸이란 "신성한 검"이란 뜻으로서 앙코르 유적군에서는 꼭 봐야 할 곳중의 하나이다.

신성한 검은 자야바르만 2세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왕자에게 주었다는 보검으로 그 이후 이 신성한 검에 의해 나라가 지켜진다은 전설의 검이다. 그러나 이 사원을 지은 이유는 자야바르만 7세가 자신의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지은 불교 사원이라고 하며 자야바르만 7세 재위시절인 12세기 경에 지어졌다. 이 사원은 힌두교와 불교의 혼합된 양식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전체적으로 일부는 보존이 양호하지만 다른 일부는 심한 파괴 흔적을 볼수 가 있다. 이는 자야바르만7세는 불교를 신봉하였지만 왕비는 힌두교를 신봉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불교와 힌두교의 혼합형태의 건축물이 탄생되었으며 후에 불교유적 성격의 건축물이 많이 파괴되었다. 힌두교 건축의 흔적으로 뱀의 신 '나가'가 그려져 있으며, 반인반조의 전설의 새 '가루다'에 의해 잡힌 모습이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 하나 이 사원의 특징으로는 사원의 중앙으로 다가 갈수록 문의 높이가 낮아지는데 이는 왕에게 다가 갈수록 머리를 숙이고 존경심을 표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프레아 칸(Preah Khan)

자야바르만 7세 때인 1191년에 지은 불교사원으로 56.7ha에 이르는 광대한 사원이다. 이 사원은 앙코르 톰을 짓기 전까지 자야바르만 7세가 잠시동안 왕궁으로 사용했다.

이 사원은 3중의 주벽(700x800m)을 환호가 감싸고 있으며 도로에서 서쪽 문까지 150m 거리에 링가를 모방한 석주기둥 96기가 서 있으며, 석주가 끝나는 지점에 신과 아수라들이 바수키 뱀을 잡고 우유바다를 젓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사원 북쪽 끝에는 그리스식 둥근 기둥으로 지은 2층 건물이 있는데 고행승과 불상이 조각되어 있었으나 자야바르만 7세가 죽은 후에 힌두교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1939년 이 사원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나가라 자야슈리(Nagarajayacri)라는 태국어가 등장하는 데 그 뜻은 성스러운 칼을 뜻한다. 이 때문에 선조로부터 전해오는 성검(聖劍)은 태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또한 이 승원에는 97,840명의 승려, 일꾼, 1000명이 넘는 압사라가 있었으며 700x800m의 주벽 바깥에는 0.9x3.7km의 환호와 6.5ha의 넓은 공간에 10만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 아수라(Asura) : 신들에게 적대적인 악마의 종족. 원래의 뜻은 '호흡하다(asu), 존재하다(as),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쁘레 룹의 이해

 

10세기 중기 혹은 후반에 건축된 사원으로서 라젠드라바르만 2세때 건축 되었다. 이 탑이 다른 유적지와 조금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면 건축물을 지을 때 벽돌을 쌓아 올린 전탑형식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벽돌의 사용은 붉은 색을 띠고 있어서 해가 뜨는 일출 혹은 일몰시간에 보는 사원의 모습이 매우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탑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몸을 변화 시킨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사원이 갖는 의미에 따라 캄보디아 사람들은 이 사원을 장례의식을 치렀던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사원의 동쪽 입구에는 사람을 화장할 때 사용 되었음직한 직사각형의 벽돌 구멍이 있다.쁘레 룹은 동쪽 호수에서 관개수로로 공급된 물로 농사를 짓는 거대한 평원에 우뚝 솟아 있는데, 인공으로 만든 산 위에 라테라이트와 벽돌로 사원을 건설하였으며, 구조는 사각형으로 두개의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탑의 위쪽에는 벽돌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성소가 있는데 이곳에는 놀라운 상인방이 있다. 이 상인방에는 비슈누가 반은 사람으로, 반은 사자로 분한 모습의 조각이 그대로 보존 되어 있다.

중앙 사원은 사각형의 사방에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사자석상이 지키고 있다. 1층과 2층은 라테라이트로 건축 되었고, 3층은 사암으로 건축 되었다. 12개의 조그마한 탑들이 1층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으며 그 안에는 링가가 모셔져 있다. 최고층의 5개의 탑에는 문이 모두 동쪽으로 만들어져 있고 남쪽 코너의 동쪽에는 브라흐만신의 아내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 톰마논의 이해

 

톰마논(Thomanon)은 앙코르 유적지중에서는 비교적 오래된 곳이다. 톰마논은 앙코르 왓트가 세워지기 직전에 세워진 힌두교 사원으로 사원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으나 규모에 비해 조각이 상당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테바다(여신)신의 부조가 상당히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에 비해 사람들은 많이 찾지 않는 듯 싶다. 톰마논은 정면으로 바라 보고있는 차우 싸이 떼보다와 비슷한 모양과 구조로 건축 되어져 있으나 차우 싸이 떼보다 보다는 보존 상태가 좋다.  

중앙사원의 기단의 조각은 보존상태가 아주 뛰어나다. 각 면에 한개씩 4개의 현관이 있다. 테바다(여신상)는 특히나 조각이 훌륭하고, 동쪽 상인방에는 가루다를 탄 비쉬누가 조각되어 있고 내부의 문 위에는 수그리바와 사우다 죽은 발리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톰마논은 동쪽으로 문이 달린 중앙 신전이 있으며 사각형의 구조이다. 주변은 해자로 두르고 두개의 입구탑이 있는 담벽으로 싸여있다. 동쪽 입구탑은 십자형 바닥 구조이며 도서관이 남쪽 벽에 붙어있다. 담벽은 라테라이트 기초만 남아있다.

 


▶ 반티아이 끄데이의 이해

 

반티아이 끄데이란 뜻은 '작은 방들의 성'이라는 뜻으로 당시에는 수도원으로 사용되었던 유적이다.

불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반티아이 끄데이는 자야바르만 7세때 부드러운 사암으로 건축 되어졌다고 하나 부드러운 사암으로 건축된 이유로 발견 당시 많은 훼손이 있었고, 몇번의 개보수를 거치다 보니정확한 건축 시대를 알아내기 어려운 상태이다. 12세기 중엽에서 13세기경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반티아이 끄데이에 관한 비문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용도로 건축이 사용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구조가 따 프롬과 비슷하지만, 따 프롬보다는 덜 무너졌고, 또 덜 복잡하다. 이곳에는 1960년대에 위험한 야생 동물이 살게되어 사람이 접근하지 못했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계속 승려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원의 동쪽 출입문으로 들어가면, 자야바르만 7세가 지은 다른 건축물인 바이욘 사원과 같은, 사면상으로 되어 있는 관세음보살이 있으며 앞에 커다란 테라스가 나오는데, 이곳은 춤추는 소녀들의 홀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은 이 테라스에 조각된 춤추는 압사라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이 테라스의 북쪽에는 큰 기둥들이 보이는데, 이 기둥들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집 기둥의 잔해라고 한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중앙 탑과 회랑들이 있는데, 많이 무너져서 구분이 힘든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가치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탓인지 다른 곳과는 달리 복구되지 않고 있는 곳이다.

 

▶ 쓰라 쓰랑의 이해

쓰라 쓰랑은 반띠아이 끄데이의 맞은편에 정면으로 보이는 큰 호수를 말한다. 12세기 말 자야바르만 7세때 돌을 기초로 하여 건축 되었다. 호수의 크기는 동서가 800미터 남북이 400여미터의 인공호수이며 과거에는 이곳이 왕의 목욕탕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호수 앞쪽에는 이를 증명하듯이 사자상과 나가상이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왕들의 목욕탕치고는 상당히 큰 편이라서 현재는 씨엠리업 사람들의 야유회 장소로 이용되고 있는 곳이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쓰라 쓰랑은 돌계단 밑으로 수초가 우거진 거대한 연못인데 이 곳을 내려다 보는 돌사자의 위풍이 아름답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이 근처에서 크메르 루즈의 끔찍한 학살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앙코르 유적에서는 많은 유적에 해자나 호수가 등장한다. 이것은 전쟁에 대비한 방어적인 준비라는 목적이외에 건기에 용수를 확보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고 한다. 캄보디아 곳곳에서 발견되는 이런 현상은 캄보디아가 저지대이기 때문에 방어적 개념에서는 대단히 불리하고 따라서 땅을 돋우는 일은 반드시 중요한 국가의 사업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타솜(Ta som)

자야타타카(북 바라이)를 지나면 나무뿌리가 탑문과 여신상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사원이 타솜이다. 원래 이 사원은 프레아칸, 자야타타카, Neak Pean과 더불어 유기적인 관계를 갖도록 일직선상으로 설계되었다.

자야바르만 7세가 아버지를 위해 헌사한 보리사(菩提社)인 타솜은 세 겹으로 만든 라테라이트 회랑이 있고, 서쪽으로 출입한다. 중앙사당의 벽면에는 가짜창의 공법을 볼 수 있고 무너진 회랑의 벽공에는 나가 상이 조각되어 있다. 1930년 앙리 마르샬에 의해 복원되었다.


프레아 피투(Preah Pithu)

수리야바르만 2세 때 지은 힌두사원. 왕궁 앞 도로의 북단에 있는 텝 프라남(Tep Pranam) 사원 옆에 나란히 서 있으며 두 개의 십자형 테라스와 다섯 개의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가짜 문과 나가 상, 라마야나나 부조되어 있다. 1908년, 1918년에 각각 코마유, 마르샬에 의해 복원되었다.


크레앙(끌리앙, Kleangs)

크레앙은 '창고, 저장고'의 의미다. 승리의 문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하나씩 서 있는 이 건물은 일종의 창고로 사용되었으며, 12개의 탑인 수오르프랏 뒤에 위치해 있디. 북 크레앙(North Kleang)은 라젠드라바르만 2세 때 목조로 건축된 후, 자야바르만 5세와 수리야바르만 1세 때 사암을 이용하여 다시 지은 것이다. 1908년부터 1920년까지 코마유와 앙리 마르샬에 의해 복원되었다.


프라삿 수오르 프랏(Prasat Sour Prat)

크메르인들은 정월이 되면 탑과 탑 꼭대기에 밧줄을 연결하여 그 위에서 줄타기를 했는데, 국왕은 왕궁 앞의 테라스에 앉아 이 광경을 구경했다고 한다. 사원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하여 '밧줄 타는 탑'(Tower of Cord Dancer)이다.

13세기에 이 곳을 다녀갔던 주달관은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 이 탑에 올라서 일종의 신판(神判)으로 죄를 가렸다고 기록했다.

앙코르 톰 왕궁 광장에서 시작되는 승리의 문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각각 6개 씩 12개의 탑이 나란히 서 있는 곳이며, 라테라이트로 지은 탑과 탑 사이의 거리는 35m이다.


* 프라삿(Prasat) : 남인도 사원에서 테라스가 있는 피라미드형 사원을 지칭하며 원어는 프라사다(prasada).



4. ▣ 앙코르 톰(Angkor Thom) 밖의 사원들 


끄라반(프라삿 크라반, Prasat Kravan)

아름다운 연와(煉瓦)로 만든 작은 힌두교 사원으로 하르샤바르만 1세가 921년에 지었다. 중앙의 탑에는 비슈누 신이, 북쪽의 탑에는 락슈미 여신상이 조각되어 있는 5탑형 사원이다.

그러나 중앙탑만 온전히 보존되어 있고 나머지는 파괴가 심하다. 관광객들의 발김도 뜸한 편이다.


쓰라 쓰랑(왕의 목욕장, Sras Srang)

12세기말 자야바르만 7세 때 만든 700x300m의 목욕장. 나가 상(像)과 사자 상(像)이 테라스에 조각되어 있으며, 학자들은 이 곳을 '앙코르의 정원'으로 칭한다. 연못 가운데는 라테라이트로 만든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반테아이 크데이(반띠 크데이, Banteay Kdei)

자야바르만 7세 때 지은 이 사원은 '승방(僧房)의 성채'란 뜻으로 기존의 힌두교 사원을 불교사원으로 개조한 것이며, 힌두교와 불교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사암을 주로 사용하여 지었기 때문에 사원 여러 곳에서 탈구가 일어나 황폐한 상태에 있다. 고고학자에 의하면 중앙신전과 회랑, 회랑과 회랑을 연결하는 참배길, 네겹의 주벽, 700x500에 이르는 환호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중앙신전은 사암과 라테라이트로 쌓은 주벽이 감사고 있으며 회랑은 십자회랑으로 구성되었다. 1920~22년 앙리 마르샬에 의해 복원되었다.


프레 룹(프레 럽, Pre Rup)

라젠드라바르만 2세 때인 961년에 3층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국가사원. 중앙에는 5탑형으로 건축되었다. 귀메미술관의 큐레이터 슈테른 박사는 이 사원을 '동쪽의 도시'로 불렀다. 대담한 건축 디자인, 규모와 각 부분이 완전히 조화를 이룬 사원으로, 크메르인들은 이 곳에서 장례식, 다비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사원 외부는 환호로 둘러져 있으며, 신체를 변화시킨다는 뜻에서 Pre Rup으로 명명했었다고 전해진다.


동메본 사원(East Mebon)

라젠드라바르만 2세 때인 952년에 건축된 힌두교 사원으로 5찹형이며, 왕이 조상에게 헌사한 사원이다. 동메본과 Pre Rup 사원은 같은 왕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조각이나 구성이 유사하다.

동 메본 사원은 동바라이 한 가운데 위치하여 배를 타고 접근해야 한다(현재 바라이는 땅으로 메워져 있다). 라테라이트와 사암으로 지었으며 외벽을 칠하기 위해서 석회를 사용하였다. 1935~39년 앙리 마르샬과 그레즈의 의해 복원되었다.


타프롬(따쁘롬, Ta Prom)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에게 헌사한 불교사원으로 1186년에 건축되었으나 왕이 죽은 후에는 힌두교 사원으로 개조되었다. 사원은 거의 붕괴된 데다 거대한 스포안(Spoan) 나무가 사원전체를 휘감고 있어서 유적보존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사원은 라테라이트를 재료로 한 주벽이 700x1000m에 이르며 전체 사원면적은 60ha에 이른다. 비문에 의하면 이 사원에 고승 18명, 승려 2,740명, 견습승 2,232명, 압사라 615인을 포함하여 12,640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제2주벽에는 왕의 어머니를 반야바라밀다 보살(prajnaparamita)의 모습으로 조각하여 안치하고 왕의 조상을 260여 개나 만들었다고 한다.


* 압사라(Apsara) : 대양(apu)을 휘저어 추출되었다(rasa)하여 압사라로 불러지게 된 신들의 무희, 흔히 신들들 즐겁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현재 캄보디아의 전통무용이지만, 태국의 전통무용이기도 하다. 이는 아유타야 왕국이 앙코르 왕조를 점령(1430~1431)한 후 태국의 민속무용으로도 거듭난 까닭이다.


▶ 차우 사이 테우다(차우 싸이 테보다, Chau Say Tevoda) 와 톰마논(토마논, Thommanon)

길 하나를 마주보고 대칭으로 서 있는 이 사원들은 수리야바르만 2세때 건축하였다. 차우사이 테우다는 장방형으로 동쪽 탑문은 씨엠립 강을 향하도록 했고, 톰마논은 차우 사이 테우다와 마찬가지로 평면 사원이며, 비뉴수 신이 가루다에 올라 아수라와 전투하는 장면이 부조되어 있다.

1919~20, 1925~27, 1960년대 프랑스 극동학원에 의해 복원되었다.


박세이 참끄롱(박세이 참크롱, Baksei Chamkrong)

앙코르 톰 남문을 벗어나면 서쪽 숲에 아름답게 솟아있는 사원. 하르샤바르만 1세 때에 공사가 시작되어 라젠드라바르만 2세 때인 947년에 완성된 장제전이다.

이 사원은 앙코르가 공격당할 때 왕은 도망가서 이 사원에 숨었는데 '커다란 새가 날개로 가려서 목숨을 구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박세이 참끄롱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라테라이트와 사암으로 장식되었고 기반부는 27m의 장방형으로, 상층부는 15m, 높이는 12m이다.


▶ 프놈바켕의 이해

 맨처음 앙코르 왕국의 수도였던 롤루우스 지역에서 드디어 앙코르 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그 당시의 왕이었던 야소바르만왕이 이곳으로 옮기면서 최초로 지은 힌두교 사원이다. 앙코르 왓트의 유적군중에서는 비교적 오래된 곳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 여행객들에게는 프놈바켕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보다는 앙코르 왓트에서 가장 선셋을 잘 볼 수 있는 장소로 더 알려져 있는 것 같다. 프놈바켕(Phnom Bakeng) 앙코르 왓트를 지나 앙코르 톰으로 가다보면 야트마한 산이 나온다.

이 사원은 9세기 후반 야소바르만 1세가 시바신에게 바치는 사원으로 지어졌다. 캄보디아에서 프놈이란 말은 산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그 자체로서 신성함을 지닌다. 고대 푸난왕조도 프놈에서 전이되었다는 말이 있은 정도로 프놈이라는 의미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프놈 바껭은 바껭산 위에 만들어져 있으며 사원의 높이는 67m에 달한다

1960년대에는 코끼리를 타고 오르기도 했으며 당시 프랑스에서 왔던 관광객들은 이 언덕이 중세기 때의 정원을 산책하는 기분이 나서 매우 좋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일몰 직전에 이 산에 오르면 앙코르 주변의 멋있는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여기서는 앙코르 왓트의 서쪽으로 5개의 탑을 다 볼 수 있고, 큰 호수 옆에 있는 프놈 크롬의 남서쪽도 보이며 프놈 북의 북동 방향과 프놈 쿨렌과 서쪽 호수의 동쪽 광경을 볼 수가 있다.

서기 889년 야소바르만1세가 즉위한 뒤에 야소하라프라라는 그 자신의 도시를 롤루스 북쪽에 세우면서자신을 상징하는 사원으로 이 프놈바켕을 지었다. 이 신도시가 지금의 앙코르 지역이며 따라서 바켕은 때때로 처음 지어진 앙코르로 불려지기도 한다. 그 당시 있었던 사각의 성벽은 각 면이 4Km길이로 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성 가운데의 산이 이 사원을 잘 구분할 수 있게 한다. 바껭사원의 탑의 숫자는 우주를 상징한다. 원래 109개의 탑이 메루산을 모방한 모양으로 바껭 사원을 장식하였으나 많은 탑이 훼손, 유실되었다.


 

프놈 바껭(프놈 바켕, Phnom Bakheng)

900년애 야소바르만 1세가 5층으로 지은 피라미드형 국가사원으로 동서 4km, 남북 4km에 이르는 야소다라푸라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야소다푸라는 후기에 가서 앙코르 왓과 앙코르 톰이 들어서게 되는 앙코르 시대의 토래가 된 지역이다.

이 사원은 사암의 언덕을 이용하여 지었기 때문에 이 곳에 오르면 앙코르 왓을 비롯하여 프놈 쿨렌, 바라이를 볼 수 있다.

5층의 기단을 오르면 중앙에 다섯기의 사당이 있었으나 네 개는 허물어지고 중앙본전만 남아 있다. 각 층마다 12개의 소사당이 있으며 기단부에는 연와로 만든 44동의 사당이 늘어서 있어 중앙의 5찹을 합하면 모두 109개의 탑이 들어서 있다.

이 사원은 구조상 중부 자바섬의 보로부두르 사원과 유사하게 190x120m의 주벽이 있었으나 모두 허물어져 있다.

* 프놈(phnom) : 산(山)을 뜻하는 크메르어. 라오스어 푸(Phou, Phu)도 산을 의미한다. '프놈 펜'은 펜                    부인의 언덕이란 의미다.


▶ 따 케우의 이해


따 케우는 사암으로만 만들어진, 장식이 거의 없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원이다. 이 사원은 자야바르만 5세가 건축을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나중에 수리야바르만 1세가 이어서 건축하다가 또 완성하지 못한 사원이다.

사원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에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몽고족의 침입이 일어났고 이를 저지하다가 사원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설과 자야바르만 5세가 건축을 하다가 사망을 하고 수리야바르만 1세가 이어서 짓고 있는데 수리야바르만 1세가 어느날 사원을 완성하면 수리야바르만 1세 자신이 단명하고 앙코르 제국도 멸망할 것이라는 꿈을 꾸었다. 그 후에 수리야바르만 1세도 건축을 중지 했다는 설이다. 미완성인 유적이기 때문에 확실히 단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 만일 따 케우가 완성이 되었다면 앙코르 유적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원의 전체적인 느낌은 앙코르 왓트나 바이욘 등은 규모가 워낙 커서 압도되는 분위기이고, 다른 사원들에서는 전탑이 많고, 또 너무 조각이나 탑을 섬세하게 쌓아 올라가서 굵은 선의 맛을 느낄 수 없는데 비해서, 따 께오는 투박하게 쌓아올려 남성미가 돋보이는 사원이다. 일단 꼭대기에 앉으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고, 탑이 주는 시원한 맛도 어우러져서 더 시원한 느낌을 준다

 

타케오(따께우, Ta Keo)

기하학적 입체미를 살린 3층의 피라미드형 사원으로 자야바르만 5세와 수리야바르만 1세 때인 1000년경에 건축되었다. 이 사원은 메루산을 지상에 건설하려한 의도로 지었기 때문에 높이는 70m에 이르고 중앙에는 다섯 개의 탑이 있고, 제1층 테라스는 96x112m, 제2층 테라스는 80x84m, 제3층 테라스는 40x40m의 장방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승리의 문 오른 편에 위치한 이 사원은 회랑과 지붕을 실험적으로 도입하였고, 처음으로 녹색 사암을 사용했기 때문에 기술자들이 고작을 해 넣지 못한 것이 특징이다.

1920년부터 2년에 걸쳐 앙리 마르샬 등이 복원하였다.


▶ 반티아이 쓰레이의 이해

 

반티아이 쓰레이는 앙코르 톰에서 북쪽으로 25km정도, 씨엠리업에서 32km를 이동해야 나오는 사원으로 수많은 보석들과 앙코르 미술들을 간직하고 있는 사원이다. 이 사원은 붉은색의 사암을 사용해서 건축 하였고, 시바신에게 헌정된 사원이므로 부조들 역시 시바신을 주제로 한 것들이 많다.반티아이 쓰레이는 '여자들의 요새'라는 뜻이다.

이곳은 967년에 착공된 사원으로, 대부분의 앙코르 유적의 사원들이 왕의 명령으로 건축을 하기 시작한데 반해서 반티아이 쓰레이는 '하르샤바르만 2세'의 손자이며 바라문교의 승려였던 '야즈나바라하'란 사람이 건축하였다.

사원은 사각의 모양이며, 입구는 동쪽과 서쪽 두군데에 존재 하는데 동문은 큰 길로 통해서 현재는 서문보다는 동문을 이용해서 거의 모든 여행객들이 입장을 하고 있다.

볼만한 것은 사치스럽게 장식된 도서관들과 3개의 중심탑인데 여기에는 성스러운 남녀와 아름다운 조각들로 장식이 되어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전통의상을 입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는 섬세한 반티아이 쓰레이의 조각들과 반티아이 쓰레이의 중앙 사원을 감고 있는 부조들은 상당히 볼만하다. 특히나 부조들은 앙코르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하며, 양각의 깊이가 가장 깊어서 거의 소조에 가까운 부조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사원이다.

 

반티아이 쓰레이 사원은 기둥을 빼놓고는 거의 모든 유적에 조각이 들어가 있다. 유적의 곳곳에서 몸은 사람이고 얼굴은 동물인 신화적인 조각상이 무릎을 꿇고 사원을 보호하고 있는데 이 조각들은 모두 모조품이고 진품은 현재 프놈펜이에 있는 국립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또한 반티아이 쓰레이 사원은 EFEO가 1930년에 아나스티로시스(Anastylosis)공법을 이용해서 복원한 최초의 사원으로 이 공법은 반티아이 쓰레이 사원의 성공적인 복원으로 효과를 인정 받아서 곧 다른 사원의 복원에도 이용될 예정인데 그 다음 사원은 바이욘이 될 것이라고 한다. 반티아이 쓰레이 사원이 이렇게 완벽하게 복원된 것이 앙코르 유적에 관한 뉴스중 NO,1은 아니다. 1923년에 프랑스인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가 이 반티아이 쓰레이 사원에서 유명한 조각품들을 도굴해 갔다가 프놈펜에서 잡혀서 도굴한 물건들을 반환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프랑스에서도 유명한 사건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앙드레 말로가 시간이 지나서 샤를 드골 대통령의 제위 시기에 문화부 장관이 된다.


반티아이 쓰레이 사원은 앙코르 유적의 중심부에서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는 사원이므로, 일정을 반티아이 쓰레이만 잡는 것은 시간의 낭비가 너무 크다. 그러므로 끄발 스피언이나 프놈 꿀렌, 반티아이 쌈레와 같이 일정을 묶는 것이 이동시간을 줄이는 방법이다. 이곳은 오전에는 사람이 많고 번잡하나, 점심시간에는 사람이 없고 조용하다. 그러나 점심시간에는 매우 매우 덥고 해가 강하다.

 

-조각과 부조들 (론리 p221지도 참고)

A) 라바나가 카일라 산을 흔드는 장면

남쪽 방향의 부조의 모습을 보면 팔이 20개이고 머리가 10개인 악마의 왕 라바나가 시바신과 파르바티가 살고 있는 카일라 산을 흔들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라바나는 원래 사람인데, 신에게는 죽지 않는다는 천명을 얻었다. 신에 의해 죽지 않는 라바나의 오만이 하늘을 찔러서 시바신에게까지 도전을 하게 되는데 그 장면을 나타낸 부조이다.맨 아래에 팔과 머리가 여러 개 달린 인물이 라바나이고, 꼭대기에 앉아 있는 인물이 시바신이다.  

그리고 시바신 옆에 꼭 붙어 있는 인물이 시바신의 아내 파르바티이다. 라바나가 산을 흔들자 주변에 있는 동물들이 놀라서 도망을 가고 있는 장면도 보인다.

B) 인드라신이 내리는 비

동쪽 벽 위에는 인드라신이 숲속에 비를 뿌리는 모습의 부조를 볼 수 있다. 인드라신은 머리가 세개 달린 꼬끼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있다. 인드라신 주위에 물결 모양으로 나타난 조각은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오른쪽 사진)

C) 까마와 시바

카일라산의 정상에 앉아 있는 시바에게 까마가 염주 같은 것을 주는 장면이다. 시바의 밑에는 사람들이 있다.

D) 크리슈나

크리슈나에게는 삼촌이 한명이 있는데 이 삼촌이 크리슈나가 어릴 때 크리슈나의 목숨을 노렸던 적이 있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크리슈나가 커서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던 삼촌인 깜사왕을 죽이고 머리를 잡고 있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반테아이 쓰레이(반띠 스레이, Banteay Srei)

앙코르의 북쪽 30km 지점에 위치한 가장 격조 높은 사원이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967~968년에 이 지역에 호족이며 왕의 스승이었던 야나바라하가 지은 사원으로 라테라이트와 적색 사암을 사용하여 앙코르 건축의 진수, 또는 '크메르 건축의 보석'으로 평가된다.

참배길에는 링가모형의 석주(石柱)가 서 있고, 사원 내에는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에서 발췌한 부조가 있고 북쪽 도서관에는 카일라산을 뒤흔드는 라바나, 남쪽 도서관에는 시바신의 부조가 있고, 중앙신전에는 동양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여신 데바타 상이 있다.

예술사적 측면에서 'Banteay Srei 유형'은 앙코르 이전기의 도시였던 '삼보르 양식'을 이어받아 건축양식이 부드럽고 우아함을 갖고 있다. 여신상의 모양도 유연하고 우아한 곡선미가 강조되면서 풍만한 여신상의 이미지에서 탈피하였다. 여신들은 배꼽을 두는 액세서리가 부착되고 치마의 주름에도 별도의 장식을 달아 화려한 모습을 주었다.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가 여신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밀반출하려다 체포된 것도 여신상의 아름다움에 반했기 때문이다.

1931~36년 프랑스 극동학원의 앙리 마르샬에 의해 아나스틸로시스 방식으로 복원되었다.


* 라바나(Rabana) : 링카에 거주하는 아수라의 왕. 머리는 열 개, 팔은 스무 개나 되며 신 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으나 인간에게는 죽는 운명을 갖고 있다. 그는 비슈누신의 화신 라마왕자에게 살해당한다.

* 데바,데바타 : 데바(Deva)는 남성의 신. 여신은 데바타(devata)라 한다. '빛나다'는 뜻을 가진 div에서 파생되었으며, 그리스어 deod, 라틴어 deus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힌두교에서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신을 3위일체의 신(trinity)이라 한다. 이들 신이 등장하면서 인드라, 바루나, 야마, 쿠베라 신은 인기가 하락하여 각각 동서남북을 지키는 수호신(로카팔라)으로 재편성되었다. 이러한 방위신의 개념은 불교에서 사천왕(四天王)으로 나탄난다.

* 아나스틸로시스(anastylosis) : 사원을 해체한 후 원래의 상태로 복원하는 방식. 네덜란드 고고학자에 의해 자바섬의 유적복원에 처음 도입된 후 프랑스 학자들이 Banteay Srei 사원 복원에 광범위하게 도입하였다.


▶ 반티아이 쌈레의 이해

 반티아이 쌈레는 앙코르 왓과 비슷한 시기에 건축된 사원으로 수리야바르만 2세가 건축하였다. 반티아이 쌈레는 수많은 앙코르의 유적 중에서 복원이 가장 잘 된 사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지난 20년간의 내전으로부터 약간 고립된 지역에 있는 사원이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인한 유적의 파괴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반티아이 쌈레 안으로 들어가면 해자를 볼 수 있는데 현재는 말라서 물은 없고 잔디만을 볼 수 있다. 해자를 지나면 두개의 도서관을 볼 수 있다.

반티아이 쌈레는 동 바라이에서 동쪽으로 400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반티아이 쓰레이나 끄발 쓰피언을 보고 오는 도중에 들려서 관람을 하는 것이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해자를 지나면 보이는 도서관은 좁고 긴 모양을 하고 있다. 도서관의 입구에 있는 조각에는 비슈뉴가 거대한 뱀 아난타(Ananta) 위에 팔을 괴고 누워서 있는 모습의 조각이 있는데, 비슈누의 배꼽에서 연꽃이 피어나고 있는데 브라흐마 신은 이 연꽃 속에서 태어난다.

중앙탑은 앙코르 왓의 중앙탑과 상당히 비슷하다. 앙코르 왓에서는 탑이 너무 크고 멀리 있어서 정확히 보지 못했다면 여기, 반티아이 쌈레에서 정확한 크메르 양식의 탑을 가까이 보아두는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반테아이 쌈레(반띠 삼레, Banteay Samre)

동바라이 남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수리야바르만 2세 때인 12세기에 지은 힌두사원이다. 삼레족은 프놈 쿨렌 산 밑에 거주하는 부족인데 크메르 왕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레 사원은 80x80m의 주벽과 네 개의 고푸라가 있고, 환호로 둘러쳐져 있고 중앙신전은 아니스틸로시스 공법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나가 난간이 아름답다. 건축은 앙코르 왓과 유사한 스타일이다.


* 고푸라(Gopura) : 탑이 있는 출입문.


▶ 룰루오스 유적의 이해

 

롤루우스는 9세기 초 앙코르 왕국이 건국된 후 앙코르 왕국의 초기 수도였던 곳이다. 씨엠리업에서는 약 15키로 미터 정도 동쪽으로 떨어져 있으며 이곳 롤루오스는 마치 앙코르 유적군처럼 이곳 저곳에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대표적으로 볼거리는 프레아코, 롤레이, 바콩등이 있으며, 이 중 바콩에는 다른 앙코르 유적처럼 메루산을 상징하는, 중심적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초대 앙코르 왕국시절부터 신격화된 왕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롤루오스는 단순히 롤루오스라고 부르기 보다는 룰로우스 유적군으로 부르는 것이 맞다. 대부분의 유적군은 9세기 후반에 이룩된 앙코르 초기시대에 건설된 사원이며 이 유적지의 세 사원들은 건축구조, 장식, 건축자재 및 방법 등의 특징이 서로 비슷하며, 크메르 예술이 찬란했던 시기의 초기적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802년에 자야바르만 2세가 도읍지를 쿨랜 산에 정하면서 앙코르 시대가 막을 열었는데, 이로부터 70년 쯤 후에 왕이 도읍지를 이 곳으로 옮기게 된다. 아마 농사가 잘 되어 식량 확보가 용이하고, 또 외적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좋은 위치였던 것이 이유였던 것 같다.

자야바르만 2세는 850년까지 이곳에서 도읍을 정했고 다음 왕도 905년까지 이곳에 머물다가, 다시 프놈 바켕으로 천도했다.

롤루오스 유적군의 건축물들은 주춧돌 위에 세운 높은 사각형의 벽돌 탑 형식으로 되어있다. 문은 동쪽으로 나 있으며 다른 3면은 가짜 문들로 되어 있는데, 이 시대의 전형적인 건축 특징은 탑은 벽돌로 짓고, 기둥, 상인방, 벽감 등은 사암으로 지은 것이다. 사원들을 둘러쌌던 성벽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롤루스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장식의 주제는 깔라(괴물의 머리), 가루다를 타고 있는 비쉬누신, 여성상과 많은 보석 장신구 그리고 위세가 당당한 수문장과 압사라 들이다. 기둥들은 보통 8각형이며 섬세한 나뭇잎의 복잡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역사가들은 평하기를 롤루오스 유적군에 있는 사원들의 조각이 크메르 조각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라고 한다.


- 쁘리아 꼬 (Preah Ko)

쁘리아 꼬는 인드라바르만 1세에 의해서 9세기 후반에 건축되었다.

6개의 탑이 두줄로 위치하고 있는데 사암과 회반죽으로 장식이 되었으며, 앞줄의 탑의 중간의 탑은 다른 탑들에 비해서 크기가 상당히 크다. 이 탑에는 고대 힌두교에서 사용했었던 산스크리트어로 씌여진 복잡한 비문이 문설주에 씌여져 있다.

프레아 꼬는 '성스러운 소'라는 뜻으로, 시바신이 타고 다니는 성스러운 흰소인 난디 세마리를 앞줄에 세웠는데 이 조각들은 모두 보존 상태가 나쁜 편이다. 쁘리아 코는 인드라바르만 1세가 그의 조상들에게 헌정하는 사원으로서 첫번째 줄의 탑은 남자조상 혹은 남신을 상징하고 두번째 줄의 탑은 여자조상 혹은 여신을 상징한다.

동쪽에 있는 메인 입구를 지나서 입구탑을 지나면 3마리의 사자가 있는데 이 사자는 사원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쁘리아 코의 중앙사원은 사각형의 건물위에 사방으로 현관이 나 있다. 중앙 사원에 있는 6개의 탑에는 모두 회반죽을 발랐으며, 문틀은 4개의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다.


- 바콩 (Bakong)

바콩은 인드라바르만 1세가 시바에게 헌정한 사원으로 메루산을 형상화 하였으며, 룰루오스 유적군에 속한 사원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흥미로운 건축물로서, 룰루오스 유적군에서 가장 중앙에 위치하는 사원이다.

바콩은 사암으로 건축되었고 5층을 가진 피라미드형의 건축물이다. 기초는 60m의 사각형이고 왼쪽 측면에서 바라보면 벽돌과 사암으로 건축된 8개의 탑과 중요한 볼거리가 없는 기타 다른 성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8개의 탑은 회반죽을 바르고 그 위에 조각을 하였다.

이 복잡한 건축물은 넓은 해자를 포함한 세개의 중심이 같은 벽으로 둘러 쌓여 있다.

첫번째 벽은 가로 900m, 세로 700m의 커다란 해자가 있었고, 사면에는 나가의 몸으로 된 난간이 있었다. 두번째 벽은 사암과 라테라이트로 만들어진 입구탑이 4면의 중앙에 건축되어 있다. 북동쪽과 남동쪽 꼭대기 부분에는 벽돌로 건축된 사각형의 건축물이 있는데 이곳은 서쪽으로 입구가 나있고 굴뚝이 만들어져 있다. 바닥에 구멍이 여러 개가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건축물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서쪽으로 나있는 문과 굴뚝으로 보아 화장터로 쓰였던 곳으로 추정된다.

동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들어가서 마지막 벽까지 지나면 양쪽에 한 개씩의 도서관을 볼 수 있다. 도서관에서 정문쪽을 바라보면 시바신이 타고 다니는 성스러운 흰소인 난디도 볼 수 있다. 중앙 사원의 1층부터 3층까지의 각 코너에는 코끼리상이 조각되어 있고 4층에는 12개의 사리(stupa)탑이 있고, 중앙 성소인 5층은 나중에 더해진 것으로 띠 모양의 장식을 한 기초로 둘러 쌓여 있다.


- 롤레이 (Lolei)

롤레이는 야소바르만 1세(889-910)가 건축한 것으로 롤레이 유적의 벽돌로 만든 4개의 탑은 쁘리아 꼬와 거의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쁘리아 꼬보다는 모양과 질이 조금 떨어진다.) 롤레이는 현재에는 논으로 사용되고 있는, 예전에 커다란 저수지 안에 건축이 되어 있었다.

롤레이는 앙코르 유적의 초기 건축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원으로 유명하며, 문설주에는 아직도 산스트리트어로 씌여진 비문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산스크리트어 비문중 하나에 의하면 4개의 탑은 야소바르만 1세가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외조부모에게 각각 1개씩 헌정한 것이라고 한다.

 


■ 기타 안내 글들

크메르왕국의 비밀󰡐���앙코르와트󰡑���

  

 캄보디아 앙코르지역에는 600여년(790~1432) 동안 캄보디아 전역은 물론 현재의 베트남, 라오스, 태국까지 지배했던 강력한 크메르 왕국이 있었다. 9~12세기 크메르 왕국에서는 눈이 휘둥그래질 만한 힌두교 사원들이 잇달아 세워졌다. 이곳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나가(뱀), 가루다(불멸의 새), 압살라(천녀) 등 힌두의 신들 곁에 불상, 연꽃 등 불교의 상징물들이 조화롭게 자리잡았다. 크메르 왕국에서 왕은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되었고, 󰡐���신왕󰡑���이 죽으면 그 본존을 모셨던 사원은 능이 됐다. 사람들은 앙코르 사원의 한 벽면에 시를 적었다. 󰡐���왕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궁전을 안고 있는 이 도시와 결혼해 우주를 창조했다󰡑���고.

 고대 크메르 왕국 우주관의 완벽한 축소판인 앙코르 유적을 찾아가는 길. 하늘에서 내려다본 캄보디아는 아름다웠다. 푸른 들판 여기저기에 강과 호수가 박혀있는 풍경. 그 한가운데 거대한 󰡐���톤레사프󰡑��� 호수가 있다. 우기에는 서울시 면적의 4배에 이른다는 동양 최대의 담수호. 톤레사프호를 빠져나간 톤레사프강 물줄기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비옥한 평원을 흘러내려 메콩강과 합류한다. 앙코르에서 60㎞나 떨어진 글루운산의 사암은 이 톤레사프 호수와 지류의 운하를 통해 운반됐다.

톤레사프 근처에 있는 시엠레아프 공항은 앙코르의 관문. 컴퓨터 한대 없는 공항서 비자를 받고 평화로운 시골길을 달린다. 좌우의 밀림에는 앙코르 사원을 본뜬 대형호텔들의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크메르 루즈, 킬링필드, 시아누크…. 혼란과 잔혹상만 연상되는 캄보디아 땅에 정치가 안정되면서 관광수입을 늘리기 위한 개발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이다.

정글 사이로 잘 닦여진 길을 따라 30분쯤 달리면 거대한 석조 신전인 앙코르와트가 장엄하고 우아한 모습을 드러낸다.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제국의 왕궁이었던 앙코르톰, 세계 최대 규모의 바이욘탑을 중심으로 5,000여개의 석상과 조각, 100여개의 크고 작은 사원들이 늘어서 있는 방대한 앙코르 유적 가운데 가장 손꼽히는 걸작품이다.

12세기 초 수리아바르만 2세가 2만5천명의 인력을 동원해 30여년만에 완성한 사원으로 둘레가 6㎞에 달한다. 담 바깥으로는 폭 100m의 거대한 해자(인공수로)가 4면을 둘러싸고 있어 흡사 사원이 물 위에 떠있는 듯하다.

사원 안 벽면에 정교하게 새겨진 부조는 왕국의 역사를 그린 서사시. 마치 한편의 두루마리 그림처럼 전쟁 장면이나 힌두신화 등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가장 눈길을 끄는 조각품은 춤추는 여인상인 압사라. 앙코르 유적 어디서나 만나는 터질듯한 가슴, 도톰한 입술, 잘록한 허리, 비칠듯 말듯한 옷맵시의 압사라는 육감적이다.

앙코르와트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 한때 인구가 1백만명으로 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도시국가였던 크메르 왕국은 밀림 속에 건축물만 남겨둔 채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렇게 큰 돌을 어떻게 가져왔을까. 모든 벽과 기둥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들은 정말 사람의 작품일까. 현대과학으로 이 어마어마한 유적의 신비를 벗겨낼 수 없었다. 사원 벽화에 새겨진 산스크리트어로 그 역사를 짐작만 할 뿐이다. 학자들은 이웃나라 태국을 지배한 샴족에 의해 멸망했다고 추정하지만 주민들은 문둥병이 왕국을 휩쓸어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앙코르 유적은 왕국이 멸망한 지 430년이 지난 1861년 프랑스의 탐험가 앙리 무어에 의해 비로소 서방세계에 알려졌다.

앙코르와트와 마주선 앙코르톰은 고대 크메르 왕조의 마시막 도성. 자야바르만 7세때 지어졌다. 앙코르톰의 중앙에 위치한 바이욘(불교사원)에는 사면불안탑(四面佛顔塔)이 늘어서 있다. 깊은 명상과 자비를 암시하는 관세음보살의 온화한 표정은 󰡐���바이욘의 미소󰡑���로 불린다.

바이욘 사원에서 승리의 문을 나서 프레야칸 사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코끼리 테라스󰡑���가 있다. 350m 길이의 옹벽에는 다양한 코끼리 신과 독수리 신의 부조가 있다. 프레야칸은 자야바르만 왕이 살던 궁전. 수많은 석실의 공간이 벽을 사이로 한 채 끝없이 이어졌으나 옆길은 모두 무너졌다.

신비한 앙코르 유적은 오랜 세월 약탈과 도굴로 얼룩졌다. 크메르 왕국의 후예들이 내전을 겪던 1970~80년대에는 더욱 많은 보석과 조각상들이 탈취당했다. 군인들은 탑과 조각을 사격연습의 표적으로 삼기도 했다. 지금은 유네스코가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곳곳에서 복원작업을 벌이고 있다. 멀리서 보면 웅장하고 가까이서 보면 빈틈없이 정교한 앙코르 유적. 그것은 인간이 최고의 신기(神技)를 부려 창조해낸 현란하고 황홀한 예술작품이다.


-거대한 호수위 떠돌이 수상가옥 4,000여채…동양최대 톤레사프호 어민들-


캄보디아에서 가장 큰 톤레사프호는 천의 얼굴을 하고 있다. 계절에 따라 모습이 바뀌기 때문이다. 건기에 톤레사프호 물은 수량이 줄어드는 메콩강으로 빠져나가 호수가 작아진다.

우기에는 범람한 메콩강 물이 톤레사프호로 밀려 올라오면서 거대한 호수가 된다.

이곳에서 잡히는 물고기는 캄보디아 전체 어획량의 약 50%에 달한다. 또 배편으로 시엠레아프를 찾는 사람들이 꼭 거쳐야 하는 수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톤레사프호 어민들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생활방식으로 살아간다. 배위에 집을 얹은 떠돌이 수상가옥에서 거주한다. 떠돌이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대략 4,000여가구에 2만명 정도. 이들은 아시아 최빈국으로 꼽히는 캄보디아 국민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하게 살고 있다.

사람들은 생필품을 구하러 굳이 뭍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잡은 고기를 뭍에서 온 중간상인에게 팔고 필요한 물품은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수상가게󰡑���를 이용한다. 슈퍼, 주유소는 물론이고 배터리 충전소, 경찰서, 병원, 심지어 학교까지 있다.

호수의 수질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쁘다. 대․소변 등과 같은 오물을 그대로 호수로 흘러보낸다. 또 생선을 다듬고 남은 내장 등도 그대로 호수에 내다버린다. 오물투성이인 물로 요리를 하고 어린이들은 물놀이를 즐긴다. 사시사철 수인성 전염병이 끊이지 않지만 병에 걸리고 안 걸리고는 신의 섭리에 맡기고 살아간다.


캄보디아 이해를 위한 글들 ◎


앙코르와트의 눈물  [글 : 푸 키아. 일본 교도통신 프놈펜 특파원]  

이 글은 2003년 7월 12일에 발행된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한겨레신문사)에서 인용한 글이다. 원본글은 2001년 5월 29일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제361호에 실렸던 것인데, 책을 내면서 글을 약간 손질한 것으로 판단된다. 푸 키아(Puy Kea)씨는 캄보디아 내전 중 일본 공산당이 발행하는 일간신문 아카하타(Akahata) 프놈펜 지국 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 일본 [교도통신] 프놈펜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다. (운영자 주)


 세계적으로 유명한 캄보디아 고대유적과 문화는 모조리 파괴되고 말았다. 그 찬란했던 조각들도, 웅장했던 사원들도 모두 깨지고 팔려나갔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는 유물 도난과 불법 거래는 캄보디아 사회를 파괴시켜 가고 있는 주범 가운데 하나다.

언제부터 캄보디아 유물과 유적들이 도굴당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학자들 사이에는 1863년 프랑스 식민통치자들로부터라는 데 이견이 없다. 그동안 도굴 현장을 찾아다녔던 문화예술부 차관 미첼 트라넷은 거리낌없이 말해왔다. "유물 도난은 역사를 있는 자리에서 보지 못하고 어떻게든 자기 방에 옮겨놓고 자랑삼아야 적성이 풀리는 서양인들의 감상태도와 동시에 자신들의 역사를 돌보지 않는 부패판 캄보디아 정치가들이 공모한 결과다." '자리' 같은 데 연연하지 않는다는 미첼은 정부를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돈에 눈 먼 시민들만 탓해서는 도굴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정부가 역사관을 갖고 심각하게 이 사안에 매달려야 한다." 훈센 총리도 '유물 카드'를 빼들고 국내외에 핏대를 올린 바 있다.

"유물 도난은 부자 나라들의 조직적인 횡포다. 해당국들은 불법 도굴과 판매를 법으로 금지하고 강탈해간 유물들을 반환해야 한다." 2001년 3월, 60여 나라 대표들이 참석한 프놈펜 유네스코회의에서 훈센 총리가 강조했지만, 돈 많고 힘센 국제사회로부터 냉담한 반응만 얻었다. 나라 안에서도 별 신통한 소리를 듣지 못했다. 시민들 가운데 누구도 정부가 진정으로 도둑맞은 유물들에 대한 반환과 복구를 위해 노력해 왔다고 믿는 이들이 없었던 탓이다.

 

사진 / 훼손된 앙코르 유적. 캄보디아 유물․유적은 프랑스 식민통치 기간보다 오히려 1970년대에 조직적 대량파괴를 당했다.


2000년 6월 추안 리크파이 타이 총리가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도 훈센 총리는 도난 유물 건을 상정해서 반환협정을 끌어냈다. 그러나 아무것도 되돌아온 게 없다. 여기서 캄보디아의 유적 파괴와 유물 도난의 특징이 하나 드러난다. 전통적으로 이 악습에는 인접국 타이가 '중개상' 노릇을 해왔다는 점이다.

'리버시티'로 알려진 방콕 골동품 가게들이 거래하는 유물 수십만 점이 캄보디아산 불법 도굴품이라는 사실을 알 만한 이들은 모두 알고 있다. 타이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는 일이라고 국제사회가 믿어왔다. 실제로 두 번에 걸쳐 캄보디아 당국이 타이로 향하던 불법 도굴품을 압수한 결과, 압사라상과 가루다상 같은 귀중한 유물들이 20톤도 넘게 쏟아져 나와 당국을 경악케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 타이 당국이 반환한 유물은 지난 1996년과 1997년 국경 부근 반테이 츠마르 사원에서 무장조직이 강탈해갔던 유물 가운데 122점이 전부다.

"타이 당국이 얼마든지 캄보디아 유물 도굴과 유통을 막을 수 있는데 실현된 적이 없다. 돈이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도, 타이도 모두 돈이 문제다." 이래서 미첼은 인접국이 지닌 상호 협력과 공존이라는 대의명분을 매우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현재 캄보디아 현실을 놓고 보면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도난품들에 대한 역사적 자료나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정부도, 시민들도 불법 도굴과 불법 유통으로 사라진 유물들에 대한 반환 의지를 높이고는 있지만, 정작 그 유물들을 조사할 만한 사업자금이 없다는 게 또 다른 문제다. 이러다 보니, 캄보디아 정부는 예산을 쥐고 흔드는 일본에 유물 복구와 조사 사업까지 모두 맡겨버린 상태다. 도난 유물 명단을 만들어야 하는데, 뜻있는 시민들 사이에서는 과연 이런 일을 일본에 맡겨놓는 게 옳은지를 놓고 말들이 많다. 2차대전을 전후해 아시아 유물들을 훔쳐간 일본에 대한 불신감 때문이다.

 

 사진 / 되찾은 유물들


아무튼 30년 내전을 치르고 난 캄보디아에 남은 것은 폐허뿐이다. 1,200만 인구 가운데 36%가 극빈에 허덕이는 판에 하루 종일 사회복구와 경제개발 구호만 난무한다. 정부 예산을 모조리 원조에 기댄 실정이니 별로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하나 있다면, 앙코르와트를 내세운 관광산업 정도를 캄보디아 자손심으로 떠올려볼 만할까?

최근 캄보디아를 방문한 고촉통 싱가포르 총리도 눈치를 챘는지,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캄보디아가 중공업 개발로 경쟁하겠다는 건 불가능하다. 관광산업에 초점을 맞춰라."

그렇잖아도 캄보디아 시민들은 앙코르와트를 비롯해 전국에 산재한 1,080개 유적지들을 찾아와 연간 1억 2천만 달러를 뿌리고 가는 50만여 명의 외국 관광객을 자랑스럽게 여겨 왔다. 그래서 시민들은 지금처럼 유물들이 계속 도굴되고 팔려나간다면 캄보디아에 미래가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캄보디아가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유적 훼손과 도굴을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민들 생각과 달리 현실은 만만찮다. 최근까지도 앙코르와트를 찾는 관광객들이 알게 모르게 현지로부터 예술품 조각들을 구입해 가고, '러시안 마켓'으로 잘 알려져 있는 프놈펜 중심가 투올톰퐁 시장에만도 115개에 이르는 골동품 판매상들이 버젓이 유물들을 팔고 있다. 왕궁 근처에 자리잡은 약 30여 개 골동품 가게들도 관광객을 유혹해 왔고.

"20년 미만인 것들만 팔고 있다." 투올톰퐁 시장 골동품 가게 주인의 말을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문화예술부 법령을 보면 "70년 미만인 조각품들은 팔아도 된다"고 명시해 놓았지만, 이 역시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70년 된 것인지 100년 된 것인지를 구분해낼 혜안을 갖춘 전문가가 몇이나 되겠는가?

 유물반환운동? 오늘도 팔아먹기에 정신 나간 사람들과 어떻게든 손에 넣겠다고 몸살 앓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유물반환운동이란 말은 그저 좀 고상하게 들리는 구호일 뿐이다. 자본가들이 과연 캄보디아로부터 유물 획득 욕망을 멈출 수 있을까? 강대국들은 강탈해 간 캄보디아 유물을 반환할 것인가? 캄보디아 정부가 진정으로 유물 반환을 요구할 수 있을까? 또, 먹고살겠다는 캄보디아 시민들은 도굴 유혹으로부터 손을 끊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캄보디아 땅에선 이런 의문만 나돌 뿐, 아무런 대꾸도 없다.

앙코르와트가 캄보디아만의 유적이 아니라, 인류의 유산이라는 사실을 국제사회가 깨닫는 일이, 그래서 도굴과 판매에서 손떼는 일이 결국 캄보디아 유적과 시민을 동시에 살리는 길이다.

 

▣ 운영자 주(註) : 2001.5.29에 쓴 원본 글에는 다음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나, 여기서 인용한 책에는 빠져있다. 참고하기 바란다.

『역사학자 이브 찬 같은 이들은 캄보디아 유적․유물의 파괴가 프랑스의 식민통치 기간보다는 오히려 1970년대부터 조직적인 대량파괴를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70년대 초 론놀 정권을 지원했던 미국의 대캄보디아 융단폭격으로 수많은 유적들이 파괴당했다." 이브 찬은 특히 미국 정부의 책임론을 강조했다. 그는 종교를 부정했던 폴포트 정권도 일부 불교유적들에 손상을 입혔고, 1979년 이후에는 훈센 총리를 지원해온 베트남을 비롯해 수많은 외국인들이 조직적으로 도굴을 감행했던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원조'의 하수구가 될 것인가?  [글 : 푸 키아. 일본 교도통신 프놈펜 특파원] 

이 글 역시 푸 키아씨의 글이다. 출처는 시사주간지 '한겨레21' 2001년 8월 14일 제372호이다. 아래 내용은 얼핏 보면 앙코르 유적과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캄보디아는 거의 모든 면에서 원조와 무관하지 않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인용하기로 한다. (운영자 주)


오랜 내전을 거치며 황폐해진 땅, 서투른 운영과 터무니없는 관리체계로 엉망진창이 된 사회, 게다가 연중 행사처럼 벌어지는 홍수에다 지독한 부패…. 이래서 캄보디아 경제는 없다. 만약, 사회복구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일본의 원조를 제외한다면.

"일본의 지원은 캄보디아 경제의 숨통, 그 자체다." 캄보디아 사회 전 부문에 걸쳐 막대한 지원을 하고 있는 일본을 놓고 경제재무부 차관 항 추안 나론이 직설적으로 내뱉은 말이다. 일본의 원조로 캄보디아는 숨을 쉬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의 원조를 빌미로 삼고, 일본 원조금을 보증으로 삼아 캄보디아 정부는 다른 해외자본을 유치하고 무역을 하며 재정수익을 올리고 있는 현실이니, 틀린 말도 아니다. 캄보디아는 연간 약 5억달러의 해외원조로 버티는 사회인데, 이 가운데 일본이 혼자서 5분의 1을 지원하고 있다. 이쯤되니, 캄보디아 주재 일본대사 오타로 오가와가 "일본의 개발원조자금은 캄보디아의 항구적이고 포괄적인 개발에 기여하고 있다"며 뿌듯해하는 걸 아무도 탓할 수 없다.

1991년부터 따져보니, 일본이 제3세계 개발원조자금(ODA)을 통해 캄보디아를 지원한 총액(다국간지원계획 포함)이 7억 3천만 달러를 넘는다. 그래서 일본을 향한 시민들의 고마움은 가히 무조건적이다. "장담하건대 일본의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길도 다리도 없었을 것이다." 프놈펜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멩 보파 라스(39)의 흥분처럼.

실제로 일본은 8천만달러를 들여 톤레사프와 메콩강에 신식 다리를 놓았고, 수백만달러를 투입해서 길을 보수해왔다. 곳곳에 일본마크가 새겨진 병원을 짓고 부두와 상수도와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다. "일본의 지원은 캄보디아의 동맥이 될 사회기반시설에 집중되고 있어 매우 긍정적이다." 굳이 캄보디아 평화협력연구소의 카오 킴 호른 소장이 말하지 않더라도 곳곳에 나붙은 일본 프로젝트를 보노라면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야당 정치인 삼 라인시 같은 이들은 완전한 조건이 성숙되기 전에 돈부터 풀고 보는 일본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일본은 돈이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캄보디아에서…." 전직 재무장관이었던 그의 독설은 이어졌다. "일본은 그 자신이 돈의 노예다. 여기에 말려들어 캄보디아가 원조의 하수구가 될 수는 없다."

삼 라인시는 세금을 내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돈이 어떻게 낭비되고 있는지를 눈여겨보는 것이 원조에 대한 자부심보다 더 중요한 시민의 의무라고 덧붙였다. 그는 올 6월 도쿄의 국제원조자회의에서도 쌍심지를 켰다. "국제사회의 대캄보디아 지원은 비효율적인 정책을 지닌 부패한 정부에 감시체계 없이 던져진 꼴로 원조가 오히려 캄보디아의 자연과 자원을 바닥내버린 실정이다. 원조금은 비생산적인 분야에 일관성 없이 투입되면서 모조리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하지만 삼 라인시의 소리에 귀기울여 주는 이들은 별로 없다. 캄보디아에서도 일본에서도, 세상 어디에서도. 현실 속에서 일본, 시민들 사이에서 일본, 그 일본은 누가 뭐라고 떠들어대든 분명히 굉장한 이름이다. 앙코르와트보다도 더 자주 시민들의 대화에 오르내리는 걸 보면.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과거의 일본을 뒤적거려 그 물주의 심장을 상하게 할 만한 용기가 캄보디아에는 없다는 뜻일까. 일본의 교과서가 어떻게 돌아가든, 캄보디아에서는 역사 같은 무형적인 가치보다는 단 한푼의 유형적인 현찰이 중요하다는 뜻일까.

캄보디아에 일본은 있지만, 캄보디아는 없다. <한겨레21>이 던진 화두인 "일본은 무엇인가"를 대답하기 전에 "캄보디아는 무엇인가"를 대답할 자신도 근거도 없다는 게 정직한 나의 고민이었다.

(LAST UPDATE: 2003.11.24 - 19:11)


※ 캄보디아 관련 국내 도서 


 [Hello 태국북부, 캄보디아, 라오스]는 김영사의 헬로우 시리즈 중 하나로 그동안 국내에서 캄보디아 여행 정보를 다루고 있는 유일한 책이었다. 최근 2003년 7월, 제2판이 출간되어 그동안 구정보를 담고 있던 것을 개정하여 최근의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전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다루고 있는 내용은 프놈펜, 씨엠립(앙코르 유적), 씨하눅빌에 한정되어 있다. 특히 앙코르유적에 대한 설명은 단편적이어서 많은 도움은 되지 않는다. 물론 캄보디아 프놈펜, 씨엠립, 씨하눅빌 등에 한정하여 여행할 예정이라면 참고할 가치는 충분히있다. 이 책의 저자는 안민기, 홍원겸, 이현숙이며 제1판은 2000년 10월 25일에 출판되었다. 제2판 개정판은 2003년 7월 30일에 발행되었다. 가격은 12,900원이다.


 [Justgo 태국.앙코르와트]는 일본 지쓰교노니혼샤의 책을 번역하여 시공사에서 펴낸 것이다. 이 책의 80~90%는 태국을 다룬 것이며, 캄보디아에 대한 분량은 아주 적은 편이다. 특히 앙코르 유적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는 결과 씨엠립을 제외한 프놈펜, 씨하눅빌 등의 정보는 전혀 없다. 아울러 배낭 여행자를 위한 정보제공이 주목적이 아니며 약간 고급 여행자를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 같다. 다만 앙코르 유적에 대한 설명은 다른 책에 비하면 참고할 만하다. 앙코르왓과 앙코르톰에 대한 설명이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게 되어있다. 이 책은 2002년 11월 27일에 초판이 발행되었으며, 가격은 13,000원이다. 그리고 [베트남.앙코르와트]도 출판되었는데, 앙코르와트 관련 내용은 위와 동일하다.


 

 ★(추천) [신화가 만든 문명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유적 중 앙코르와트(왓)에 대한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풀어낸 인문학 서적이다. 앙코르 왕조의 역사, 종교,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며, 앙코르 왕조의 탄생과 더불어 형성된 힌두 사상과 그 상징체계, 건축양식을 전문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책 내용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장 앙코르 문명, 제2장 앙코르 문명과 힌두 신화, 제3장 앙코르 시대로의 시간여행(주달관의 진랍풍토기), 제4장 앙코르 와트 상징해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서규석이며 2003년 1월 20일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출판사는 리북이며, 가격은 13,000원이다.

 

 [앙코르 : 장엄한 성벽도시]는 시공사 디스커버리 총서 중 하나로서, 보뤼노 다강의 원작을 이종인이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앙코르 유적이 폐허 속에 묻혀 있다가 어떻게 발견되고 복원되었는지 그 과정을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뒷부분 '기록과 증언'에서는 앙코르를 방문하고 해석하고 재구성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앙코르의 전모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캄보디아를 식민지화했던 프랑스가 앙코르 유적을 발굴하면서 반출을 자행했던 비문화적인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 이 책의 최근판은 1999년 12월 발행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꾸준히 계속 발행되고 있다. 가격은 7,000원이다. 앙코르 유적의 발견 및 복원 과정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유용할 것이다.


 [앙코르 기행]은 한 디자이너의 눈으로 담아낸 사진 기행집이다. 저자가 땀 흘리며 찍은 사진들은 앙코르 유적의 웅장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거리에서 만난 캄보디아인들의 모습은 과거 한국 전쟁후의 우리나라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다만 이 책은 개인 사진 기행집인 까닭에 앙코르왓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은 수록되어 있지는 않다. 실제로 캄보디아를 여행하면서 멋진 사진을 찍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이 책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심인보이며, 2002년 7월에 도서출판 새로운사람들에서 초판이 발행되었다. 가격은 18,000원이다.


 [뭉그니의 배낭여행 따라하기 :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편]은 이 책의 저자가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등을 배낭여행한 과정을 일기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여행서이다. 다분희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며, 일반적인 여행 책자와는 약간 거리가 멀다.  따라서 캄보디아에 대한 전문적인 여행 정보를 얻고자 하는 목적보다는 간접 경험에 유용할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적으로 제2권은 인도와 네팔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강문근이며 2002년 7월에 최초 발행되었다. 책 분량은 318페이지 정도이며, 시공사에서 발행되었다. 가격은 9,000원이다.


 ★(추천) [한 권에 담은 동남아시아 역사]는 동남아시아 역사 전체를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개별적인 국가별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별로 되어 있다. 따라서 동남아시아에 대한 역사를 전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할 경우 유용하다고 판단된다. 이 책의 저자인 밀턴 오스본(1936-현재)은 호주의 시드니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후 1959-61년까지 프놈펜 주재 호주대사관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전형적인 백호주의 국가인 호주에서 우월적인 시각인 아닌 입장으로 동남아시아 관련 역사책을 썼다는 것이 놀랍기까지 하다. 이 책은 도서출판 오름에서 2000년 3월에 초판 발행, 2003년 1월에 재판을 발행했다. 가격은 13,000원이다.


[(고대 문명 시리즈 04) 앙코르 : 장엄한 크메르 문명] 저자 : 마릴리아 알바네스/

번역 : 손원재 / 출판사,출판일 : 생각의나무, 2003년 11월 / 가격 : 95,000원

이 책의 첫 장은 크메르 왕국의 역사적 기본 사실을 서술하고, 다음으로 인도의 영향을 받은 궁전 건축에서 시작하여 벼를 가꾸는 일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크메르 문화의 다양한 면을 탐구한다. 또한 수리 시설 관리의 중심에 서서 백성의 생존을 보장하는 한편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군주가 지배했던 크메르 왕국의 기본 종교 개념과, 가장 중요시하는 신화 및 사회 구조를 분석하였다. 또한 국민의 일상 생활과 주택, 관습, 전통 및 가장 중요한 축하 행사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개자이고 물의 군주이며 종족의 운명을 짊어진 통치자의 강력한 존재에 지배받던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한다. 신적 존재로 받들어지던 크메르왕은 국고로 장엄한 천상의 거처를 만들도록 하여 예술과 종교에 대한 숭배 도구로 종속시켰고, 이런 지나친 토목 공사가 결국 앙코르 문명의 몰락 원인이 되었다. 이 책의 세 번째 부분에서는 이런 독창적이고 매혹적이며 수려한 예술 작품 중 최고의 유적들을 재현해 놓았으며 캄보디아와 이웃 국가들의 수많은 고고학적 여행 코스를 설명한다.

[ 저자 소개 ] 저자 : 마릴리아 알바네스(Marilia Albanese)

1976년 밀라노의 가톨릭 대학교 고전문학과에서 산스크리트어와 인도학을 공부했으며, 힌두교 및 인도문화 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재 이탈리아의 아프리카/동양 연구소장과 밀라노 소재 동양문화언어 시민학원의 교육 조정관으로 재직하고 있다. 인도학 교수로서 교황청 우르바니아나 대학교(Pontificia Universita Urbaniana)와 제휴관계를 맺고 있는 몬자(Monza) 소재 국제 신학원에서 힌두교와 불교 세계에 관한 기본 과제를 강의하고 있다. 1970년대 말 이후부터 여러 곳의 요가 교사훈련소에서 인도 문화를 가르치고 있으며, 인도 문화에 관한 여러 저서를 출판한 바 있다. 그는 인도 예술과 그 심오한 경지에 대한 지식을 더욱 심화하기 위해 1990년대 이후부터 인도차이나 지역, 그 중에서도 특히 캄보디아를 여행하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서 그는 힌두교의 상징주의와 관련하여 크메르 문명을 연구하게 되었다.

저서로는『잃어버린 문명, 그 장엄함에 관하여』(1998), 『위대한 보물: 고대 이집트에서 20세기까지의 금세공 예술』(1999) 및『영원이 머무는 곳』(2000) 등이 있다. 또한 『북부 인도: 고대 유적으로의 안내』(1999)와『고대 인도: 문명의 기원에서 13세기까지』(2001)등을 화이트스타 출판사에서 출간한 바 있다.

▶ 기타 정보는 각자 관련 서적을 구입하여 학습하십시오.


2. 캄보디아 지역 정보 - 씨엠립(Siem Reap)

 

씨엠립은 규모가 아주 작은 도시이지만 캄보디아 내에서는 가장 활발한 도시이다. 오히려 수도인 프놈펜보다 더 활기가 넘치는 느낌이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앙코르 유적이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개발붐이 일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반면 관광 산업의 발전 이면에는 빈부의 격차도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씨엠립 기본 정보  


 씨엠립(씨엠리업, 씨엠 레아프, Siem Reap)은 캄보디아 북서부지역에 속하는 지역으로 인구는 85,000명 가량 거주하며 지역 전화번호는 063이다. 수도인 프놈펜과는 6번 국도를 따라 311㎞ 정도 떨어져 있고, 서쪽 방향에 위치한 씨소폰과는 103㎞, 포이펫과는 152㎞ 정도 떨어져 있다.

씨엠립은 작은 도시 규모에 비하면 매우 활발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앙코르 유적(Ankor Ruins)이 시내 근처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시내의 대부분의 건물이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실제 일반 주민이 거주하는 주택은 매우 초라한 편이다.


▶ 국제전화, 우편, 인터넷

국제전화는 시내의 편의점(칼텍스 스타마트) 등에서 카드를 구입하여 이용하면 된다. 카드의 종류는 3$, 10$, 20$, 50$ 짜리가 있다. 카드를 이용한 수신자부담통화(콜렉트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구시장(Psar Chaa) 근처 등지에는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국제전화를 이용할 수 있는 가게(여행사)들도 있다. 이 곳에서는 국제전화 뿐만 아니라 팩스의 이용도 가능하다. 우체국은 시내 중심을 흐르는 강(Stung Siem Reap)의 왼편에 자리잡고 있다. 우편 업무 뿐만 아니라 국제전화도 이용 가능하다.

씨엠립에서의 인터넷 이용은 보편화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게스트하우스가 밀집한 곳에서는 손쉽게 이용 가능하다. 속도는 그리 빠른 편은 아니나 그런대로 이용할 만하다. 한글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한글 입력기(IME)의 지원 여부를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 은행, 환전

씨엠립은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므로 은행(환전) 이용이 용이한 편이다. 구시장(Psar Chaa) 아래 남서쪽 방향에 위치한 카나디아은행(☎ 964808)에서는 마스트카드(MasterCard)의 사용, 여행자 수표의 환전, 머니그램 서비스 등이 가능하다. 구시장 동쪽 부근에 위치한 캄보디아 상업은행(Cambodian Commercial Bank, CCB, ☎ 380154)에서도 여행자 수표의 환전(수수료 2%), 신용카드의 사용(수수료 2%, 최소 5$)이 가능하며 은행업무는 08:00~15:30까지 한다. 구시장(Psar Chaa) 북서쪽 방향의 시바타 거리(시와타, Phlauv Sivatha)에 위치한 메콩은행(Mekong Bank, ☎ 964417)에서는 비자(VISA)카드로 현금 서비스(수수료 5$)를 받을 수 있다. 메콩은행은 업무 마감후에도 부쓰에서 월-토요일은 오후 15:30~20:00까지, 일요일은 08:00~13:00까지 이용 가능하다. 구시장 근처의 사설 환전소에서도 환전(달러, 밧, 엔)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돈도 환전이 가능하지만 환율 면에서 엄청난 손해다.


씨엠립 관광 정보 


씨엠립에서의 가장 큰 볼거리는 뭐니뭐니해도 앙코르 유적(Ankor Ruins)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캄보디아를 찾는 관광객들은 모두 앙코르 유적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앙코르 유적 외에는 아시아 최대의 호수인 톤레삽 호수도 충분한 볼 거리를 제공한다. 그 외 볼거리로는 왓 트마이, 지뢰박물관, 씨엠립 구시장, 중앙시장 등이 있다.


앙코르 유적(Ankor Ruins) : 세계 최대의 거석 문화 유적인 앙코르 유적은 씨엠립의 북쪽에 주로 위치하고 있다. 앙코르 왓, 앙코르 톰, 롤루스 유적군 등을 비롯한 수많은 유적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좀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발에 채이는 것은 모두 유적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앙코르 유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앙코르 유적 정보] 메뉴를 참조하기 바란다.


톤레삽(Tonle Sap) 호수 :  톤레삽 호수(Tonle Sap Lake)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호수이다. 특히 계절에 따라 메콩강의 수위를 조절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 캄보디아인들의 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톤레삽 호수에서의 볼거리는 현지인들의 생활모습, 수상가옥(오른쪽 사진) 등이 있다. 그리고 보트를 타고 호수 내에서 투어를 즐길 수도 있다. 다만 국내에서와 같은 유원지 시설은 전혀 없기 때문에 화려한(?) 물놀이에 대한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것이다.

    톤레삽 호수에서 보트(배)를 탈 경우 12인승 정원 한 대당 8$ 정도이고 1인 추가시 1$씩 추가된다. 즉 인원이 8명이라면 16$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비용이 변동될 수도 있고, 또 바가지를 씌울 수도 있으므로 사전에 게스트하우스 등에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왓 트마이(Wat Thmei), 왓 보(Wat Bo) : 왓 트마이(왓 트메이, Wat Thmei)는 "새 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캄보디아 내전 당시 사망한 사람들의 유골을 봉안하고 있다. 프놈펜의 킬링필드에 가 볼 여유가 없다면 이 곳을 들러 캄보디아의 아픈 과거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앙코르왓 가는 길 왼쪽에 위치해 있다.

    왓 보(Wat Bo)는 현대적인 사원으로 씨엠립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 19세기의 부처 벽화가 있다. 시내 동쪽(Stung Siem Reap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지뢰 박물관(Landmine Museum) : 지뢰 박물관은 지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주기에 충분한 곳이다. 규모는 화려하진 않지만 지뢰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볼수 있다. 입장료는 없으나 기부금은 받고 있으므로 적은 돈이라도 의미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어로 된 안내 팜플렛이 준비되어 있다.


중앙시장, 구시장 : 중앙시장(프싸 르, Psar Leu)은 시내에서 6번 국도를 따라 동쪽 방향으로 1.6㎞ 정도 떨어져 있다. 글로벌에서 걸어서 간다면 30분 좀 넘게 걸린다. 규모는 약간 큰 편이며 시장 분위기는 우리나라의 재래시장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중앙 건물 내에는 수많는 잡화점, 의류점, 시계점, 환전소 등이 들어서 있고, 건물 바깥에는 야채상, 어시장 등이 있다. 건물의 앞쪽에는 노점 식당이 있어 저렴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

    구시장(프사 짜, Psar Chaa)은 씨엠립 시내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글로벌에서 걸어서 간다면 30분 정도 소요된다. 시장의 규모는 좀 작은 편이며 환전소, 현지식당, 야채상, 잡화점 등이 즐비하다. 저렴한 식사를 할 예정이라면 이 곳에서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식당을 이용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시장 주변에는 수많은 여행사가 위치하고 있어 티켓 예약, 국제전화, 인터넷 등을 즐길 수 있다.


압사라(Apsara) 댄스 : 압사라(압살라, Apsara) 댄스는 캄보디아의 전통 무용이다. '압사라'라는 말의 의미는 '천상의 무희'를 뜻하며 춤의 내용은 인도 흰두 신화 라마야나(Ramayana)를 주제로 한 것이다. 태국에도 이와 유사한 춤이 있는데 이는 앙코르 왕조 멸망시 태국에서 압사라 춤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물론 캄보디아 측에서 본다면 자신들의 춤을 훔쳐갔다는 표현도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일을 거치면서 오히려 캄보디아에서 자신들의 전통을 태국으로부터 재수입했다는 관점도 나올 법하다. 그 이유는 전통과의 단절이 증명할 수 없을만큼 길었고, 폴폿의 지배 당시 철저히 유린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유일한 전승자에 의해 지금은 계승되고 있지만.

    씨엠립에서 압사라 댄스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일부 호텔과 게스트하우스에서 가능하다. 특히 바욘(Bayon) 2 레스토랑, 쿨렌(Kulen) 2 레스토랑, 짜오프라야(Chao Praya) 레스토랑 등에서 저녁 식사를 포함하여 10~11$ 정도의 비용으로 관람 가능하다. 그리고 압사라 극장(Apsara Theatre)에서도 관람할 수 있는데 디너쇼 형태로 되어 있다. 사전에 예약(식사 포함 20$)해야 하며 영어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씨엠립 숙박, 식당 정보 


▶ 숙박 정보

씨엠립은 관광지답게 고급 호텔에서부터 저렴한 게스트하우스까지 매우 다양한 숙소를 갖추고 있으며 최근 계속적으로 호텔 신축이 진행되고 있다. 도시의 규모에 비하면 숙박 시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 중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는 지금 현재 3곳이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의 경우 좋은 얘기뿐만 아니라 안좋은 얘기도 많이 나돌고 있다. 대다수의 한국 여행객들은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기대를 하지만, 이들 게스트하우스 역시 다른 게스트하우스와 마찬가지로 영업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운영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이들 한국인 운영 게스트하우스에 대해 먼저 소개하고, 다른 게스트하우스,호텔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 주의 : 아래 소개된 숙박업소는 본 운영자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서비스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으므로 착오없기 바란다.)


<숙소명 및 내용>

◆ 글로벌 홈스테이(Global Homestay) - 한국인 권국근씨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로 꽤 유명한 곳이다. 숙소는 새로 지은 것이라 상당히 깨끗한 편이다. 포이펫(국경)↔씨엠립간 미니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그리고 씨엠립↔프놈펜간 스피드보트 티켓 예약이 가능하며, 압사라댄스 관람시 티켓 예약도 가능하다.

○ 위치 : 6번 국도상에 위치. 씨엠립에 막 들어서면 오른쪽에 간판이 보인다. ☎380189

○ 숙박비 : 팬싱글/트윈 5/7$. 에어컨트윈 15$. 도미토리 2$. 아침식사(빵,음료) 무료제공.

○ 참고 : 기본 모또비가 5$로 정해져있는 등 유적관람시의 교통요금이 정형화되어 있다. 


◆ 걸리버 앙코르(Gulliver Angkor) - 프놈펜에서 걸리버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홍덕기씨와 친구분 이찬씨가 함께 2002년 말 경에 씨엠립에 오픈한 게스트하우스이다. 근처에는 앙코르왓 게스트하우스, 마미 게스트하우스 등이 있다. ☏ 012-637715

○ 위치 : 6번 국도상에 위치.스타마트를 끼고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가면 된다.

○ 숙박비 : 싱글 5$. 트윈 7&. 트리플 8$. 객실 모두 욕실, TV 완비. 도미토리 2$(8인).

○ 식사 : 라면, 정식 백반, 된장찌게, 냉면, 콩국수, 비빔밥, 삼겹살, 불고기 등 2~5$. 


◆ 서울 가든(Seoul Garden) - 캄보디아에서 10여 년간 생활한 최장길씨가 2002년 12월 오픈하여 운영하고 있다. 국경 포이펫↔씨엠립간 미니버스를 운행하고 있으며 공항 픽업(5$)도 하고 있다. 또한 최장길씨는 웹사이트도 운영하고 있다.

○ 위치,연락처 : 6번 국도상에 위치. 프린세스 앙코르 호텔 바로 앞. ☏ 012-912005

○ 숙박비 : 도미토리, 싱글/더블/트윈룸

○ 식사 : 라면, 정식 백반, 된장찌게, 냉면, 콩국수, 비빔밥, 삼겹살, 불고기 등 2~5$. 


☞참고: 태사랑 사이트의 한인업소 메뉴에서 인터넷 예약(숙소, 국경 픽업)이 가능하다.

        http://www.thailove.net



숙소명 내용 (숙박비는 변동가능성 있음)

◆ Smiley Guesthouse -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으로 깨끗하며, 스타마트 골목 안쪽에 위치해 있다. 프놈펜의 나린 게스트하우스와 연계되어 있어 씨엠립↔프놈펜 육로 교통편 예약이 가능하다. 싱글 6-8$, 더블 7-9$, 온수 샤워시 15~20$ 정도이다. ☏ 012-852955

◆ Paradise Guesthouse - 스타마트 서쪽 방향 수십미터 부근의 골목 안쪽에 위치해 있다. 파라다이스 및 헬로 게스트하우스 간판이 보인다. 싱글 공동욕실은 2$, 욕실 포함된 싱글/더블룸 3/4$ 정도이다.

◆ Naga Guesthouse - 구시장 북서쪽 방향 Ph Sivatha 서쪽 골목 안쪽 100m 지점에 위치에 있다. 싱글/더블 2/3$ 정도이며, 욕실 포함시 3/4$ 정도이다. ☎ 963439

◆ Orchidae Guesthouse - 구시장 북서쪽 방향 Ph Sivatha 서쪽 골목 안쪽 50m 지점에 위치에 있다. 욕실 포함된 싱글/트윈룸은 4/5$, 에어컨룸은 10$ 정도이다. ☏ 012-849716

◆ Ivy Guesthouse - 구시장 아래쪽에 위치하며, 레스토랑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싱글/더블 5/6$, 개인욕실 포함 더블룸 8-10$ 정도이다. ☏ 012-800860

◆ Popular Guesthouse - 시내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프놈펜의 까피톨 게스트하우스와 연계되어 있다. 싱글/더블 2-3/4$이며, 개인욕실 포함시 더블룸 5-7$ 정도이다. 레스토랑도 운영하고 있다. ☏ 012-916165

◆ Mom's Guesthouse - 시내 동쪽 왓보 거리(Phlauv Wat Bo)에 위치해 있다. 개인욕실 포함된 팬/에어컨룸은 10/15$ 정도이다. 공동욕실은 5$이다. ☎ 964037

◆ Golden Angkor Hotel - 6번 국도와 시와타 거리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호텔이다. 팬룸 12$, 에어컨룸 15$ 정도이다. ☎ 964039


숙소명 내용

◆ Grand Hotel d'Angkor - 싱가폴 래플스의 체인 호텔로 씨엠립 최고의 시설을 자랑한다. ☎ 963888  http://www.raffles.com

◆ Sofitel Royal Hotel - 앙코르왓 가는 곳에 있다. ☎ 964600  http://www.sofitel.com

◆ Pan Sea Hotel - 씨엠립강 동쪽에 위치해 있다. ☎ 963390  http://www.pansea-angkor.com

◆ Angkor Hotel - 6번 국도상에 위치해 있다. ☎ 964301  http://www.angkor-hotel-cambodia.com



식당 정보

씨엠립은 다양한 숙소뿐만 아니라 먹거리도 매우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크메르 음식 뿐만 아니라 베트남, 태국, 중국, 서양 요리 등 선택의 폭이 넓은 편이다. 그리고 바욘 2 레스토랑, 쿨렌 2 레스토랑, 짜오프라야 레스토랑 등에서는 압사라 댄스도 관람할 수 있다.


식당명 내용

◆ Bayon Restaurant - 씨엠립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이다. 크메르 음식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바욘 2 레스토랑에서는 매일 저녁 압사라 댄스 공연을 관람(식사 포함 10~11$)할 수 있다.

◆ Samapheap Restaurant - 대형 음식점으로 유명하며, 크메르 음식, 서양 음식 등을 제공한다. 시내 동쪽(6번 국도 아래) 씨엠립강 근처에 위치해 있다.

◆ Chivit Thai - 씨엠립에서 태국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왓 보 거리의 Mom's Guesthouse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 Deadfish Tower - 태국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다. 종전의 구시장에서 시와타 거리로 이동해서 영업중이다. ☏ 012-630377

◆ Soup Dragon - 베트남 음식을 전문적으로 즐길 수 있으며 특히 쌀국수(Pho)가 유명하다. 중국, 사양음식도 제공한다. 구시장 위쪽에 위치해 있다.

◆ Chao Praya - 크메르, 태국 등의 음식을 제공하는 뷔페식 레스토랑이다. 시내 북쪽 앙코르왓 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 저녁에는 압사라 댄스 공연을 한다.

◆ Kulen 2 Restaurant - 뷔폐식 레스토랑으로 저녁에 압사라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식사 포함하여 10$ 정도이다. 참고적으로 숫자 2는 캄보디아어로 "삐"로 발음한다.

◆ Red Piano - 구시장 북쪽 방향에 위치해 있다. 크메르, 서양 요리 등을 제공한다. 게스트하우스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영화 툼레이더 촬영시 안젤리나 졸리가 들렀던 곳이라고 한다.


씨엠립 교통 정보 


씨엠립을 드나들 수 있는 교통편으로는 항공, 미니버스, 배, 택시 등이 있다. 캄보디아에서 가장 활발한 도시라는 점에 비춰본다면 교통편이 아주 좋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캄보디아 국내 교통수단의 개괄적인 안내 및 관련 이동 정보는 아래 링크 [교통수단]과 [캄보디아 드나들기] 메뉴를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서 누락된 관련 정보는 이 메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 항공(AIR)

⑴ 씨엠립 공항은 프놈펜의 포첸통 공항과 마찬가지로 캄보디아의 국제공항이다. 공항은 시내 북서쪽 방향 약 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6번 국도 위쪽)해 있으며 모또로 이동시 1$, 택시로 이동시 5$ 정도의 비용이 든다. 국내선의 경우 현재 "씨엠립↔프놈펜" 구간만 취항중이다. 로얄 프놈펜 항공(Royal Phnom Penh Airways), 씨엠립 항공(Siem Reap Airways) 등에서 하루 10회 정도 운항하고 있으며 요금은 편도 50~60$ 내외, 왕복 90~130$ 정도이다. 공항의 국내선 이용료는 5$이다.

⑵ 국제선의 경우 씨엠립↔방콕(태국), 씨엠립↔호치민(베트남), 씨엠립↔비엔티엔(라오스)구간을 운항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과도 연결된다. 이 중 가장 일반적인 노선은 "씨엠립↔방콕" 구간으로 태국의 방콕항공(Bangkok Airways)에서 노선을 운항중이다. 요금은 편도 160$, 왕복 310$ 정도이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Siem Reap Airways, Royal Phnom Penh Airways에서는 씨엠립↔호치민 구간을 운항하고 있다. 베트남의 Vietnam Airlines에서도 씨엠립↔호치민 구간(편도/왕복 110/220$)을 운항하고 있다. 그리고 라오스의 Lao Aviation에서는 씨엠립↔비엔티엔(위앙짠) 구간을 주 4회 정도 운항하고 있으며 편도 요금은 145$ 정도이다. 간혹 팍세(Pakse)를 경유한다는 정보도 있다. 이외에도 태국 푸켓과 수코타이, 베트남의 다낭,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등의 구간도 운항중이라고 한다. 씨엠립공항의 국제선 이용료는 20$이다.

[항공사 / 전화번호 / 위치]

 Royal Phnom Penh Airways  ☏ 012-825754  구시장(프사 짜, Psar Chaa) 근처에 위치.

 Siem Reap Airways  ☎ 380192  시내 북서쪽 6번 국도(NH6) 상에 위치.

 President Airlines  ☎ 964338  시바타(시와타) 거리(Phlauv Sivatha)에 위치.

 Bangkok Airways  ☎ 380191  시내 북서쪽 6번 국도(NH6) 상에 위치.

 Lao Aviation  ☎ 963283  구시장(Psar Chaa) 근처 북서쪽 방향에 위치.

 Vietnam Airlines  ☎ 964488  시내 북서쪽 6번 국도(NH6) 상에 위치.


◑ 미니버스, 픽업트럭, 택시

씨엠립과 주변 지역간의 이동시 가장 효과적인 교통수단은 미니버스와 픽업트럭, 그리고 (자가용)택시이다. 정규노선 버스는 현재 운행되지 않고 있다. 차후 도로 여건이 좋아진다면 프놈펜과 정규 노선이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가장 교통편이 활발한 구간은 씨엠립↔포이펫 구간이다. 이 구간의 교통수단은 현지의 게스트하우스나 여행사 등에서 섭외가능(주로 미니버스)하며, 또한 이들과 연계되지 않은 교통수단을 섭외(주로 픽업트럭)하는 것도 가능하다. 먼저 씨엠립→포이펫(Poipet) 구간의 미니버스 요금은 4$ 정도이며 오전 7시 경에 출발한다(4~5시간 소요). 씨엠립→방콕(태국)까지 연결하는 것도 가능한데, 이 경우 국경에서 갈아타야 하며 요금은 10$ 정도이다. 게스트하우스와 연계되지 않은 교통수단(픽업트럭)은 프싸 르(Psar Leu) 주변에서 섭외가능하다. 픽업트럭의 요금은 4~5$ 정도이다. 그리고 택시는 4명 정도 모아서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데 이 경우 택시 한 대당 25$ 정도이다. 그리고 포이펫→씨엠립 구간은 "[여행정보] → [캄보디아 드나들기]" 메뉴를 참조하기 바란다. 비용은 씨엠립→포이펫 구간과 비슷하다. 다만 씨엠립 현지의 게스트하우스에 국경 픽업을 요청하지 않고 국경에서 직접 삐끼들과 흥정할 경우 어려움이 따를수 있다.

씨엠립↔프놈펜 구간은 과거 도로 여건이 좋지 않아 주로 배를 타고 이동하곤 했다. 그러나 최근 도로 여건이 조금씩 좋아지면서 육로(6번 국도)로 이동하는 여행객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미니버스의 경우 씨엠립과 프놈펜 현지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서로 연계하여 직접 운행하고 있다. 예를들면 씨엠립의 Popular Guesthouse와 Capitol Guesthouse가 연계되어 있다. 요금은 4$ 정도이며 오전 07:00시에 출발한다. 이동하는 데에는 대략 8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런데 이렇게 게스트하우스에서 연계된 미니버스를 이용할 경우 해당 게스트하우스에만 숙소를 정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픽업트럭을 섭외하는 것도 가능하나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씨엠립↔바탐방 구간은 먼저 씨소폰을 경유해야 한다. 따라서 바로 씨엠립-바탐방 구간을 연결하기 보다는 우선 씨소폰까지 이동한 후 씨소폰에서 다시 바탐방으로 가는 교통편을 섭외해야 한다.

그리고 이 외에도 안롱벵, 꼼퐁톰, 꼼퐁참 구간도 픽업트럭 등을 섭외해서 이동할 수 있다. 씨엠립→꼼퐁톰 구간의 픽업트럭 요금은 15,000/7000R(인사이드/아웃사이드) 정도이며 약 4시간 정도 소요된다.

◑ 배(보트)

씨엠립↔프놈펜 구간은 아시아 최대의 호수인 톤레삽 호수를 통해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많은 여행객들이 이 구간을 이용하고 있다. 이동하는 데 대략 4-5시간 정도 소요되나, 건기에는 다소 더 걸릴 수도 있다. 배(스피드보트)의 요금은 25$ 원칙이나 현재 게스트하우스 등에서 22$ 정도에 구입할 수 있다. 그런데 배의 선착장은 씨엠립에서 남쪽방향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다. 글로벌 홈스테이에서는 보트 요금과 선착장까지의 픽업트럭 요금을 합쳐 23$(배 22$ + 픽업트럭 1$) 정도를 받고 있다. 만약 다른 곳(여행사 등)에서 좀 더 저렴하게 배표를 구입했다면 선착장까지의 픽업 요금이 포함되었는지 등의 조건을 상세히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선착장까지의 픽업 요금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개인적으로 모또(1$), 혹은 택시(5$)를 섭외해야 한다. 배는 오전 07:00에 출발하므로 숙소에서 05:30~06:00경에 출발해야 한다.

씨엠립↔바탐방 구간도 톤레삽 호수를 통해서 이동 가능하다. 다만 바탐방에 이르는 상커 강(Stung Sangker)의 길목이 좁은 관계로 배의 규모는 좀 작은 편이다. 프놈펜행과 마찬가지로 같은 선착장에서 오전 07:00에 출발하며 요금은 13~15$ 정도이다. 이동하는 데에는 3~4시간 정도 소요(수위가 높을때 기준)된다. 그러나 수위가 낮은 시기에는 배의 규모도 6인승 정도만 운행되며 시간도 오래 걸린다.

씨엠립 주변 지역 

씨엠립 지역은 앙코르 유적(Ankor Ruins)과 톤레삽(Tonle Sap) 호수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외에도 씨엠립 동쪽 방향에는 벵 메알리아(Beng Mealea) 사원이 있으며, 이 사원 북쪽 6.5km 지점에는 프놈 쿨렌(쿨렌 산, Phnom Kulen)이 있다.


▶ 벵 메알리아 Beng Mealea

벵 메알리아(Beng Mealea) 사원은 씨엠립의 유적과 마찬가지로 앙코르 시대의 유적(12세기)이다. 씨엠립 동쪽 방향 60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가는 데 적어도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이 사원은 수리야바르만 2세 때 건립(1112-52 재위. 왕실 자료에 의하면 1113-1150)되었으며, 씨엠립의 앙코르 왓과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 프놈 쿨렌(Phnom Kulen)

프놈 쿨렌(쿨렌 산, Phnom Kulen)은 Beng Mealea 사원 북쪽 방향 6.5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산(山)으로 높이는 487m 정도이다. 이 지역 주변이 대체로 저지대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래도 높은 편에 속한다. 현재 이 지역은 국립공원(Phnom Kulen National Park)으로 지정되어 있다. (LAST UPDATE: 2003.11.19 - 16:56)


■ 여행 출발 전 준비 사항

우선 날이 덥다는 것에 대하여 철저한 준비와 유적지 이해를 위한 정보책자 그리고 최소한 볼거리에 대한 메모와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카메라 및 메모장을 준비 하도록 한다.

물 / 썬 블럭 크림 / 카메라 / 모자 / 선글라스 / 안내서 / 메모장


 ■ 입장료

앙코르 왓트 유적군의 요금은 한번에 구입하여 전체 유적군을 볼수 있도록 되어 있다. 날짜에 따라 요금이 다르니 일정에 따라 알맞은 패스(입장권)을 구입하도록 하자


- 1일권 : 미화 20달러 / 3일권 : 미화 40달러 / 7일권 : 미화 60달러

   

2일을 관람할려면 1일권을 두번 끊던가 아니면 3일권을 끊고 2일을 사용하여야 하며, 4~6일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티켓팅하여야 한다.

1일권은 사진이 필요없으나 3일권 이상은 사진 한장이 필요하다. 사진 규격은 2.5cm x 2 cm이다. 사진이 없는 경우에는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는데, 4명이 모여야만 현상을 해주고, 가지고간 사진보다는 사진의 질이 훨씬 떨어지므로 사진을 가지고 가는게 좋다.


3. ■ 앙코르 유적의 이해

  앙코르 왓트, 앙코르 톰, 바이욘 사원, 따 프롬, 니악 뽀안, 프레아 칸, 쁘레 룹, 톰마논, 

반티아이 끄데이, 쓰라 쓰랑, 프놈 바켕, 따 케우, (반티아이 쓰레이, 반티아이 쌈레, 롤루오스 유적군)


  앙코르 왕국 유적지 세부 지도 보기

  아마도 몇 번이고 앙코르 왓트를 다녀와도 앙코르 왓트가 주는 신비감에 따른 비밀스러운 부분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유적지의 규모와 예술성을 떠나서라도 그 시기에 그러한 곳에 상상하기 힘든 왕국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유적지를 보고 난 후에는 오히려 더더욱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앙코르 왓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앙코르 왓트는 역사적 접근보다는 종교적 접근과 문화적 접근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토속신앙을 바탕으로 한 힌두교와 대승불교 그리고 소승불교가 어우러져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데 기본적인 종교적 이해만 있어도 앙코르 유적군을 이해하는데는 상당한 도움이 된다. 또한 앙코르 유적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힌두교에 대한 이해와 그들이 당시 가지고 있었던 우주관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으로 보인다.

 크메르 역사에 대한 연대기를 논한다면 이렇게 정리하면 좋을 듯 싶다.


- 앙코르 왓트 왕국 이전 시대

- 앙코르 왓트 왕국 시대 :    롤루우스 유적군의 프레아코 양식 : 875년-893년

                             바켕양식 : 893년 이후 - 925년

                             쁘레 룹 양식 : 947년 - 965년

                             반띠아이 쓰레이 양식 : 967년 - 1000년

                             클리앙 양식 : 965년 - 1010년

                             바푸온 양식 : 1010년 - 1080년

                             앙코르 왓트 양식 : 1100년 - 1175년

   바욘양식 : 1177년 - 1230년

- 앙코르 왕국 이후 시대

 


(1) ■ 앙코르 왓트의 이해

 

언어적으로 앙코르는 '도시'를 뜻하며 와트는 '사원'을 뜻한다. 당시의 도시는 추정컨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도시라는 개념보다는 국가의 개념이 더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즉 앙코르는 '도시사원'이라고 제한적인 해석보다는 한 국가의 거대한 사원으로 보는 것이 옳다. 앙코르 왓트는 앙코르 유적지 중 가장 큰 사원이며 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동시에 크메르 건축 예술의 극치를 이루는 역사적인 예술품이다.

 이 앙코르 왓트 사원의 구성, 균형, 설계 기술, 조각과 부조 등의 완벽함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앙코르 왓트는 그 구성 내용의 의미를 살펴보면 석조 건축물로 만들어진 우주의 축소판이며 지상에 있는 우주의 모형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앙코르 왓트의 외형적 규모를 간단히 살펴보면 앙코르 왓트는 길이 1.3키로미터에서 1.5키로미터의 인공 호수로 둘러 싸여져 있으며 그 폭은 200미터에 이른다. 과거 로마제국의 전성기 시대 때의 인구가 50만이었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이 앙코르 제국의 당시 추정인구를 100만 명 정도로 추정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겠으며 그 규모에 걸맞게 지금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이 되어 있다.

앙코르 왓트의 유적지를 큰 틀에서 구성내용을 살펴본다면 성곽이 있고 그 안에 사원이 있으며 성곽 밖으로 해자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는 당시의 우주관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성곽 안의 사원은 불교의 중심지인 메루산(수미산)을 의미하여 성곽은 히말리야산맥을 그리고 성곽 주위의 해자는 대양(큰바다)를 의미한다고 한다.

앙코르 왓트 유적지가 묘지가 아니었는가 하는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또한 각종 양각 부조물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며 조각되어 있다는 점도 당시의 힌두교의 장례식 절차에 의한 법도임에 따라 그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단지 추측일 뿐이며 한편으로는 여기에 대한 반론도 상당한데 이 사원을 무덤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규모가 크며 사원의 구성으로 보았을 때 무덤의 구성이라기보다는 외곽의 벽등여러 상황을 볼 때 왕궁의 형태라는 점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에 이 사원에 있던 수많은 목조건물들이 있었음을 감안할 때 무덤이라는 설은 아무래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듯 싶다.

과거 캄보디아에서는 왕이란 지상에서 신을 대신하여 신의 능력을 부여받아 국가를 보호하고 국민을 통치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것은 이 사원이 지어진 동기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왜냐하면 입구의 참배도로로부터 들어가기 시작하면 입구에 영원불사의 뱀신인 '나가'가 있는데 이 '나가'는 인간과 신들을 연결시켜 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의 왕이 결국 인간에서 신으로 승격되고자 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져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바침하듯 당시의 크메르인은 왕을 신격화하였고 그 바탕으로 크메르인은 뭉쳤으며 왕은 왕권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캄보디아 정세를 보면 캄보디아는 당시 이웃나라인 베트남(당시는 참파왕국)의 잦은 침공으로 나라가 황폐해지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1113년에 수리야바르만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나라를 평정하고 강대해져 외부의 침입을 막는 것은 물론 오히려 외부로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앙코르 왓트는 이 시기에 건설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의 석조건물로서의 규모로 본다면 세계 최대의 석조 건물로 간주되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대규모의 공사로 추정된다. 추정하건대 이 앙코르 왓트를 세우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몇 십 년을 공사했을 것이다.


 

  ▣ 앙코르 왓트 자세히 살펴 보기

 

앙코르 왓트의 내부에는 무엇이 있으며 무엇을 볼 것인가! 앙코르 왓트는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전체가 제1회랑(주벽), 제2회랑, 제3회랑이 있다. 이 회랑에는 힌두교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부조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러한 내용을 모르고 앙코르 왓트를 감상한다면 한낱 앙코르 왓트는 돌조각에 불과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앤 처음 앙코르 왓트는 서문(입구)으로 입장을 하게 되는데 서쪽의 입구에서 성곽입구까지는 500여미터에 달하는 참배도로를 걸어 들어가야 한다. 입구에는 일곱개의 머리를 가진 뱀신인 '나가'가 기다리고 있다. (오른쪽 사진) 

'나가'는 힌두교에서는 절대 죽지 않은 뱀신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나가'는 인간과 신을 연결시켜주는 무지개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에 따라 인간이 신으로 다가가는 과정을 담기 위하여 앙코르 왓트에서는 이러한 나가신을 참배도로 입구에 세워놓지 않았나 싶다.

앙코르왓트의 구조는 전체적으로 보면 세 개의 회랑으로 쌓여 있는데 각 회랑의 볼거리와 주요 내용을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회랑

위치

번호

주요 볼거리

제1회랑

서면 남쪽 (입구부분)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의 내용에 대한 부조

남면 서쪽

수르야바르만 2세 군대 행렬

남면 동쪽

천국도와 지옥도

동면 남쪽

힌두교의 천지창조와 관련된 유해교반(우유의 바다 휘젓기)

동면 북쪽

악마를 쳐부수는 비슈누신

북면 동쪽

크리슈나와 바나의 전투

북면 서쪽

선신들과 악신들의 전투

서면 북쪽 (입구부분)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의 내용에 대한 부조

제2회랑

회랑안쪽 서남쪽

 

다섯명의 여신상

제3회랑

중앙사당

 

입불상 및 열반불상

  * 방향잡기 : 씨엠리업기준으로 앙코르왓트는 북쪽에 위치하며 입구는 서쪽에 위치함.


▶ 라마야나 이야기

이 부분은 태국의 에메랄드 사원에도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인도의 대서사시로, 내용은 선과 악이 싸워 선이 이긴다는 내용이다. 내용을 보기 전에 등장인물부터 살펴보면,

  - 라마 : 비슈누신의 화신으로서 이상적이고 용맹한 왕의 전형

  - 시타 : 라마의 왕자비로 라바나에게 잡혀 갖은 수난을 당한다

  - 하누만 : 바람의 신의 아들이며 라마를 뽑는 원숭이왕

  - 라바나 : 열개의 머리와 20개의 팔을 가진 악마이며, 신에 의해서는 죽지 않는다.

예전에 라바나라는 악마가 살고 있었다. 그 악마는 신들에 의해서는 죽지 않는다는 천명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라바나는 한없이 오만해져서 신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를 보다 못한 신들이 신들에 의해서는 죽지 않지만 인간이나 원숭이에 의해서는 죽으므로 인간과 원숭이로 화신하여 라바나를 죽이기로 한다.

하여, 비슈누는 코살라국의 왕자인 라마로 화신하고 다른 신들은 원숭이로 화신한다. 라마가 성인이 되어서 시타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을 하는데 라바나가 우연히 시타를 보고서 반하게 되어 시타를 납치한다. 그리고 라마는 원숭이 왕인 하누만과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라바나가 사는 땅인 랑카를 쳐들어가서 아내인 시타를 되찾아 온다는 이야기다.

이 과정 중에 정말 많은 일들이 추가가 되어서 인도의 대서사시를 만들어 내는데, 역사적 인물인 라마를 힌두교의 주신의 하나인 비슈누신의 화신으로 설정해 놓아 이 역사시에 종교적인 의의를 부여하고 라마 숭배를 왕성하게 하여 후세의 문학과 종교 및 사상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영향으로 말미암아 '라마야나'는 주변국인 자바 ․말레이 ․타이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에 전해져 번역 ․번안되는가 하면, 그것을 극화 ․무용화하고 그림자극에까지 수용하게 되었다. 나중에 태국에서는 이를 번안하여 에머랄드사원에 '라마키나'라는 내용으로 옮겨 놓았으며 이 서사시에 나오는 이상국인 아요디야(인도의 바르나시 북쪽에 있다고 함)는 나중에 아유타야 왕조가 이름을 지을 때 이 서사시에 나오는 이상적인 도시의 이름을 따서 아유타야를 나라명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태국의 방콕왕조가 각자의 이름보다는 '라마'라고 하는 호칭을 사용하는데는 이 서사시에 나오는 라마를 본 따 가장 용감하고 덕이 있는 군주로서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라고 한다. 

 

▶ 유해교반(우유의 바다 휘젓기)


유해교반은 앙코르 왓트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서 꼭 봐야 될 것이며 힌두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유해교반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천지창조의 내용을 담고 있는 관계로 힌두교 사원이 있는 곳이면 어렵지 않게 이 유해교반에 대한 내용을 쉽게 접할 수가 있다. 주된 내용은 신화에 나오는 신과 악마들이 영원 불사의 영약을 만드는 과정을 표현한 것인데 그 방법이 1000년 동안 우유의 바다를 휘젖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내용의 부조물을 앙코르와트 제1회랑에서 볼 수가 있다.

신들의 세계에서 악과 선의 신들이 쉬지 않고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승부가 안나자 힌두교의 3주신중의 하나인 비슈누신에게 이 싸움을 해결해 달라고 한다. 그러자 비슈누신은 싸움보다는 서로가 오랫동안 죽지 않고 살수 있는 영원불사의 약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선신과 악신이 그 방법을 따라 하기 시작하는데 그 방법이 커다란 뱀 '바수키'의 몸을 밧줄 삼아서 젖의 바다를 젖는 것이었다.

이때 악마들은 '바수키'의 머리 부분을 잡았으며 신들은 꼬리부분을 잡았는데 무려 1000년 동안 이렇게 바다를 휘젓자 힘에 부친 뱀 '바수키'는 독을 뿜어내게 되는데 바수키의 독이 세상에 퍼지면 세상이 멸망하기 때문에 비슈누는 시바신에게 이 독을 마셔 달라고 한다.

하지만 바수키의 독이 너무 독해서 시바신의 목이 파랗게 타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림에서 시바신의 목은 파랗게 표현된다.

오랜 시간의 휘저음에서 메루산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자 비슈누가 거북이로 화신하여 메루산을 떠받친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천상의 무희 압살라, 백마, 사랑과 미의 여신 락슈미 등이 태어나고 제일 마지막에 영원불사의 묘약으로 알려진 '암리타'를 끝내 얻게 된다.


<2차 자료>

앙코르 왓(Angkor Wat) 


앙코르 시대의 역사적 자료는 산스크리트어나 고대 크메르어, 소승불교의 경전을 기록하는데 사용된 팔리(pali)어로 비문에 새겨저 있으나 발굴된 자료가 많지 않고 기록된 내용 또한 부분적이고 단편적이며 한정적인 것들인 데다 지배층에 국한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자료적 한계 속에서도 숲속에 잠자던 앙코르왓을 세계 속에 알린 것은 18세기 이후 동양문화를 탐험하려는 프랑스의 동양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1세대의 선구자인 아벨 레뮈사(Abel Remusat)는 왕립도서관에서 중국 관련 목록을 편찬하면서 크메르의 고대사 연구에 중용한 단서를 찾아냈는데, 그것이 바로 주달관의 견문록 <진랍풍토기>였다. 그는 이 기록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는데 초창기 동양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가치를 제공했다. 이후 폴 펠리오, 조르쥬 세데스가 후속 연구를 이어받아 캄보디아사 연구에 한 획을 긋게 된다.

앙코르 왓(Angkor Wat, 맞춤법 표기상 왕코르 와트가 정확하나 이곳에서는 앙코르 왓이라고 표기함)은 수리야바르만 2세(1113-1150)가 비슈누신에게 바치기 위해 지은 사원이며 그가 죽은 후에도 부분적으로 부조가 조각 되는 등 37년 이상의 세월 속에서 건축되었다. 앙코르 왓은 남북의 길이가 1.3km, 동서 1.5km에 이를 만큼 광대한 피라미드형 사원이며 개방형으로 건축되어 좌우 대칭미와 뛰어난 시각성을 자랑한다. 출입구가 서쪽을 향해 있고 건축의 중심축이 서~동으로 전개되어 있는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앙코르 왓은 중앙에 있는 신전을 세 겹의 회랑(回廊)이 감싸고 있으며 바깥쪽에는 주벽(周壁)을 만들고 그 외부에 저수지(해자,垓字)를 배치했다. 또 사원 안에 40m의 작은 연못을 남쪽과 북쪽에 한 개씩 만들고, 주벽을 4.5m의 높이로 쌓아올려 사원을 속세와 구분 짓는 공간 개념을 반영했다. 저수지는 대양을 뜻하고, 중앙의 신전은 신왕(神王)의 권위를 상징한다.

앙코르 왓은 사면(四面)에 출입문이 있다. 출입문은 주벽의 동, 남, 북에 각각 하나씩 있으며 정문의 서쪽에는 다섯 개나 된다. 서쪽 정문의 출입구 가운데 두 개는 코끼리 부대와 기마 부대인 주력군이 출입할 수 있도록 군사용으로 활용되었으며, 나머지 세 개는 바라문을 비롯한 출입자들이 사용했다.

앙코르 왓은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사원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기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앙코르 왓이 신들을 위한 사원인지, 왕의 장제전인지 건축용도를 둘러싸고 학자들간에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다. 캄보디아의 전설에 의하면 앙코르 왓은 원래 왕궁이었으며, 왕의 사후에는 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조르쥬 세데스는 앙코르 왓의 성격에 대해서 비뉴수신에게 바쳐진 신전이었으나 수리야바르만왕의 사후에는 왕의 묘가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설에 의하면 앙코르 유적 사원의 대부분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데 반해, 앙코르 왓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그 이유로 묘지라는 설도 있다.

앙코르 왓의 회랑은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중앙의 탑을 기준으로 장방형 형태에 세겹으로 둘러쌓여 있다. 중앙의 첨탑이 있는 회랑을 제1회랑, 가운데 제2층의 회랑을 제2회랑, 바깥에 있는 회랑을 제3회랑이라고 한다. 물론 세 개의 회랑 가운데 가장 뛰어난 시각성과 회화성을 자랑하는 것은 제3회랑이다. 참고적으로 앙코르 왓을 소개하는 많은 책들은 바깥을 제1회랑, 안쪽을 제3회랑이라고 부르고 있다(서규석씨는 만다라의 원리상 이를 반대로 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3회랑의 부조 가운데 주요 장면은 대략 열 개 정도이다. 제3회랑을 田 형태로 분할하고 이를 서쪽 정면에서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쿠루평원의 전투(서쪽벽 남측문), (2) 시바신(남서쪽 모서리), (3) 수리야바르만왕의 행진(남쪽벽 서측면), (4) 천국과 지옥(남쪽벽 동측면), (5) 유유바다 젓기(乳海攪拌, 동쪽벽 남측면), (6) 비슈누신과 아수라(동쪽벽 북측면), (7) 크리슈나와 아수라인 바나의 전투(북쪽벽 동측면), (8) 21명의 신과 21명� 아수라(북쪽벽 남측면), (9) 비슈누신(동서쪽 모서리), (10) 랑카의 전투(서쪽벽 북측면) 순이 된다.

제3회랑에서 제2회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수 십 개의 기둥이 서 있는 다주실(多柱室) 건물을 통과해야 한다. 이 곳이 십자회랑이다. 제3회랑과 제2회랑 사이에 황금으로 덧칠한 기둥이 십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십자회랑이라 부르는 이 곳은 앙코르 왓에서 유일하게 넓은 공간이다. 여기서부터 지상계가 끝나고 신의 세계가 시작된다. 역사적인 부조장면을 장식한 지상의 세계는 제3회랑에서 끝나며 십자회랑에서부터 비슈누신의 만다라산으로 올라가는 신의 세계가 시작된다.

제2회랑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건축으로 표현한 곳이기 때문에 회랑 내부가 어둡다. 우선 서쪽에는 하나의 창문만 있고 남쪽 75m 길이에는 9개의 창문이 나있다. 반면 동쪽에는 26개(북측 14, 남측 12개), 북쪽은 32개의 창문이 나있다. 이들 창문은 달의 주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회랑에는 1500여 명이 넘는 압사라, 여신들이 조각되어 있어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중앙신전이 있는 제1회랑은 어두컴컴한 제2회랑과는 대조적으로 장엄한 곳이다. 제1회랑으로 올라가는 것 또한 쉽지 않다. 70도로 경사진 중앙신전은 당시에 왕과 최고의 사제들만이 출입하도록 제한했을 만큼 성스로운 곳이다. 따라서 중앙탑을 오르는 데는 계단을 손으로 잡고 한발자국씩 움직여야 한다. 즉 인간의 접근을 쉽게 허용치 않는 곳이다. 제1회랑은 우주의 중심 메루산(수미산), 혹은 우유바다 젓기의 중심축을 상징하며, 비슈누신이 거주하는 장소다. 이와 같은 상징은 12, 28, 108(54/54), 365 등과 같은 숫자를 통해서 풀이할 수 있다. 중앙신전에는 네 개의 탑과 중앙탑이 있는데, 이 중앙첨탑은 높이가 약 60m이다(프랑스 학자 나필리앙의 조사에 의하면 정확한 높이는 58.08m라고 한다). 이 곳이 신들이 거주하는 우주의 중심 메루산이며, 비슈누신이 강림하여 왕과 신이 일체화하는 장소이다. 중앙신전은 새로운 왕이 등극할 때마다 엄숙한 의식을 거행하여 국민들에게 신왕사상을 주입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만다라 세계를 이루어 나가려 했다. 만다라는 중앙에서 시작하여 바깥으로 세계를 구성해 간다. 최고의 신이 사방과 주변의 신을 창조하여 만다라를 채워간다. 즉 앙코르왓은 바로 우주의 중심 메루산을 중심으로 우주적인 만다라를 이루고 바깥을 향해 시간과 공간을 채워가는 형식의 비슈누 사원이다.

* 메루산(Meru) : 대륙의 정 중앙에 있다고 하는 세계의 중심산. 힌두교에서 메루산은 8만4천 요자나   (126만km)의 정상에 인드라신을 비롯하여 주요 신들이 거주하는 성스러운 산으로 만다라산과 카일라사산 등 네 개의 봉우리가 감싸고 있다. 소승불교에서는 수메루(Sumeru)로 불리며 흔히 수미산(須彌山)으로 번역된다. 크메르의 사원은 메루산을 형상화하여 피라미드 형으로 짓거나 산 위에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 만다라(Mandala) : '에워싸다'는 mand에서 유래한 만다라는 동서남북으로 문이 있는 불탑(stupa)의 평면도에서 그 개념이 출발했다. 만다라는 원, 구(球), 차륜 등 완전무결과 무수한 원심을 가진 원을 상징한다.

* 진랍(眞臘) : 점랍(占臘)이라고도 한다. 진랍(chenla, zenla)은 <수서(隨書)>에서, 점랍은 <송사(宋史)>의 진랍전(眞臘傳)에서 나온다.



 (2) ■ 앙코르 톰의 이해

 앙코르 왓트가 '도시 사원'의 의미라면 앙코르(도시)톰(큰)... 커다란 도시라는 뜻이다.

다른 앙코르 유적군과 다른 점은 다른 곳은 한곳 한곳이 유적지인 반면에 이곳은 나름대로 또 다른 앙코르 톰 유적군을 내부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볼거리가 산재해 있으며 앙코르 유적군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앙코르톰이 세워진 배경은 다음과 같다. 한때 전성시대를 달리던 앙코르 왕국은 수르야바르만2세이후에 쇠퇴기를 맞이하게 된다. 결국은 지금의 베트남(당시의 참파왕국)에게 정복당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후 새로운 지도자 자야바르만7세가 나타나 참파왕국을 몰아내고 단시간에 앙코르왕국은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때 자야바르만7세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보다 강력한 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 성이 바로 앙코르 톰인 것이다.


이제 앙코르 톰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자! 앙코르 톰은 앙코르 와트와 함께 앙코르 유적군중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낼수 있는 곳으로 앙코르 왓트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져 있다. 한변의 길이가 3km의 정사각형 모양인 앙코르톰은 높이가 8m의 성벽과 너비 약 10m의 수로로 구성되어 있다. 앙코르 톰의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는 총 다섯개로서 북대문, 서대문, 남대문, 동쪽으로 승리의 문과 사자의 문이 있다. 일반적으로 여행자가 이용하게 되는 문은 남문이 된다. 당시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에는 죄인과 개는 출입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대승불교 신봉자였던 자야바르만 7세의 의해 건축된 앙코르 톰은 12세기 말-13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앙코르 유적지 중에서는 유일한 불교 건축물이며 특히 바욘에 있는 200여 개의 얼굴은 부처의 얼굴이기도 하고, 자야바르만 7세의 자신의 얼굴이기도 하다고 전해진다.

앙코르왕조의 마지막 도읍지인 앙코르 톰은 말 그대로 큰 성곽도시로 왕궁은 물론, 종교 건물과 관청 건물도 있었던 앙코르 제국의 중심지였다. 앙코르 톰은 동일한 시기 유럽의 어떠한 도시보다도 큰 도시였고, 인구도 많았는데 거의 100만에 이르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앙코르 톰의 구조는 사방 약 3km인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라테라이트로 쌓은 성벽의 높이는 약 8m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성벽의 바깥에는 폭 100m의 수로를 파서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도록 했으며 이로서 성곽국가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방어적 개념의 건축물임 우리는 쉽게 알 수 가 잇다. 국토의 70%이상이 평야며 산이 거의 없는 캄보디아에서는 외적의 침입에 대하여 방어가 무척이나 취약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성곽 밖으로 넓은 해자를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풍부한 나무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지은 석조 건축물 자체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배려였을 것으로 보인다.

성내의 왕궁과 사람이 살았던 건축물들은 주로 목조 건물이었으나 거의 다 썩어 없어져 버렸고 남아있는 석조물들도 많이 파손되어 남아 있지만 그것으로도 우리는 과거의 웅장했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앙코르 톰(Angkor Thom) 안에 있는 유적 

 

 앙코르 톰은 1177년 참파군의 침략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왕도를 요새화하기 위해 자야바르만 7세(1181-1219)가 건축한 것이다. 앙코르 톰에 높은 성벽을 세우고 다섯 개의 성문을 만들어 출입을 통제하는 한편 도성밖에 환호(環濠)를 만들어 이중의 견고한 방어막을 만들었다. 그 이후 앙코르 톰은 1431년 태국의 세력이 침입하여 도성을 함락시킬 대까지 2세기 동안 영광의 빛을 간직하였다.

앙코르 톰은 한 변이 3km, 높이 8m의 라테라이트로 성벽을 쌓은 성곽 도시로 한 가운데에 국가사원인 바욘이 위치해 있고 바푸온 사원을 비롯하여 왕궁, 코끼리 테라스, 나왕의 테라스, 텝 프라남, 프레아 파릴라이, 프레아 피투, 크레앙과 같은 수많은 유적이 모여 있다.

앙코르(angkor)는 산스크리트어로 왕궁도시를 뜻하는 나가라(nagara)에서 파생된 단어로 '도시국가'를 지칭하는 말이며, 톰(thom)은 형용사 '커다란' 뜻으로서 앙코르 톰은 곧 '대도시 국가'의 의미가 된다.

앙코르 톰의 성벽에는 다섯 개의 성문이 있다. 바욘 사원을 축으로 남문, 동문, 서문, 북문이 있으며 왕궁 앞 광장에서 동쪽을 향해 '승리의 문'이 하나 더 있다. 정문은 남문(남대문)이며, 동문은 '사자(死者)의 문'으로 불리었고, 승리의 문은 700km 떨어진 참파로 향하는 출발점인데 자야바르만 7세의 영토확장과 과거 앙코르의 함락에 대한 복수의 의미가 깔려 있는 곳이다.

성문은 높이가 20m로 사암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문 꼭대기에는 약 3m에 달하는 사면불(四面佛)로 조각된 관음보살상이 있다. 또한 성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다리 난간에는 좌우로 54개의 석상(石像)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이 조각은 앙코르왓(Angkor Wat) 회랑에 부조된 것처럼 힌두신화에서 신과 악마들이 장생불사의 영약을 만들기 위해 바수키 뱀의 꼬리를 축으로 천년동안 우유바다를 휘젖는 장면을 상징한다.


* 라테라이트(Laterite) : 철분과 알루미늄을 함유하여 붉은색을 가진 홍토석. 햇볕에 건조하면 시멘트     이상으로 재질이 단단하여 기둥이나 주춧돌로 많이 사용된다.

* 바수키(Vasuki) : 우유바다 젖기에서 신과 아수라가 바다를 회전시키는데 로프로 이용된 성스러운 뱀.    세샤뱀(Sesa)으로도 불린다.

* 프레아(Preah) : '성스러운, 존경하는' 뜻의 형용사. Pra, Prah도 같은 뜻이다. 프레아 산(Preah San)은    승려, 프레아 코(Preah Ko)는 성스러운 소, 프레아 칸(Preah Khan)은 성스러운 칼을 뜻한다.



앙코르 톰 자세히 살펴보기

 

앙코르 톰은 그 자체가 유적 하나가 아니라 그 안에 다시 세부적인 유적지가 있다는데 특징이 있다. 앙코르 톰의 세부 유적지를 살펴보면 우선 입장을 하게 되는 남대문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건축물이 있는데 그 내용을 미리 이해하도록 한다.

- 남문

- 앙코르 톰의 중심에 있는 사원인 '바이욘사원'

- 바이욘의 북서쪽에 자리잡은 바푸온,

- 왕궁터

- 코끼리의 테라스

 

<앙코르톰 남문>

- 문둥이왕의 테라스등이 주요 볼거리이다.


  [남문]

앙코르 톰에는 위의 약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총 5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여행객이 입장하는 문은 앙코르 왓트 유적지와 길이 연결되어 있는 남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남문은 높이가 25미터로서 높이가 3미터인 보살의 얼굴이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있는데 햇빛이 비치는 것에 따라 그 표정이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 남문을 통과하여 다시 1.5키로미터를 들어가야 앙코르 톰의 중앙부인 바이욘에 다다른다.

남문에 들어서기 전에 유의해서 봐야 할 것 한가지는 남대문 다리의 난간으로서 앙코르 왓트에서 나와 있는 유해교반(우유의 바다휘젓기)를 나타내는 조각상들이다. 

 

<유해교반(우유의 바다휘젓기)>

그림3).바푸온(Baphuon)

[바푸온(Baphuon)]

바푸온은 앙코르 유적지중에서는 세번째로 지어진 사원인데 앙코르 톰 바이욘의 북서쪽으로 있다. 수미산의 상징으로 3단의 피라밋 구조로 지어 졌으며 인도 파괴의 신인 쉬바신에게 바쳐진 힌두교 사원이다. 바푸온이 가지고 있는 뜻은 '숨긴 아이'라는 뜻인데 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과거 샴 왕국(지금의 태국)의 왕과 크메르의 왕은 형제 지간이었는데 샴의 왕이 자기의 아들을 이곳에 맡겼다고 한다. 이를 두고 크레르의 신하들은 크레르를 차지하려는 모략으로 여기고 샴의 아들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화가 난 샴의 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크메르를 쳐들어 오자 크메르의 왕비는 크메르의 왕자들을 이곳에 숨겼다고 한다. 여기에서 숨긴 아이라는 뜻의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바푸온(Baphuon)

바푸온은 '아들을 숨긴 사원'이란 뜻이다. 두 형제가 태국과 캄보디아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는데 태국 왕의 아들을 크메르 왕이 길렀다. 그러나 조카가 자라면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신하들의 충고를 듣고 왕이 그를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국 왕이 쳐들어오자 크메르의 왕비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이 사원에 숨겼다는 일화가 있다.

우아야디티야바르만 2세(1050-1066)때인 1060년에 지은 이 사원은 바욘 사원과 피미아나카스 사원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입구는 코끼리 테라스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변경이 있었다.

동쪽 탐문에서 사원 입구까지 200m에 달하는 참배길은 육교형식으로 설계되어 '공중 참배길'로 불리며, 1층은 120x100m, 2층은 70x65m, 3층은 50x45m의 규모다. 2층은 크리슈나의 어린 시절을 묘사한 부조가 있고,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의 부조가 있다.

주달관의 〈진랍풍토기〉에 바푸온 사원을 동탑(銅塔)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아 청동으로 만든 중앙탑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중앙탑은 허물어져 있는데, 학자들은 인근 사원을 건축할 때 바푸온은 석재를 가져다 활용한 때문으로 보고 있다.

건축사적으로 바푸온은 하나의 양식을 이루고 있는데 '바푸온 양식'은 첫째 코끼리나 나가 상(像)이 장식의 모티브로 등장하지 않으며, 둘재 회랑은 있으나 부조되어 있지 않고 탑문과 파풍(破風)에 부조를 해 넣은 방식이 주로 이용되었다. 셋째 주벽에 처음으로 부조가 새겨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소재는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였다. 넷째 인간을 소재로 한 조각은 가슴 윗부분이 누드로 표현되었으며 여신들의 스커트 길이는 발목까지 내려온다. 스커트는 완전한 주름을 이루고 물고기 꼬리모양(fish-tail type)으로 드레이핑(draping)하여 우아한 곡선미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1908년부터 1918년까지 코마유와 마르샬에 의해 복원되었고, 2002년에도 복원작업을 거쳤다.


* 라마야나(Ramayana) :인도의 시인 발미키(Valmiki)가 쓴 대 서사시로 전체 24,000송(1송은 16음절로 2행으로 되어 있다)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학자들에 의하면 기원전 4세기경부터 서기 200년 사이에 현재의 형태로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요드야 왕국의 라마왕자와 그를 돕는 원숭이 왕국의 하누만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악마의 왕 라바나의 전쟁을 그린 서사시로 라마왕자를 통하여 제왕이 따라야 할 정의, 도덕률, 규범을 제시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태국, 탐보디아 등 고전기 동남아시아의 궁정문학과 드라마, 연극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 마하바라타(Mahabharata) : 인도의 비야사(Vyasa)라는 성인이 기원전 5세기 경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대 서사시다. 인도 델리 북방의 쿠루평원에서 카우라바군과 판다바군 18사단이 18일간 벌이는 전쟁을 주제로 하여 전체 18편 10만송(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서사시 안에는 고대 인도의 종교, 신화, 도덕, 역사, 철학, 법률 등 수많은 자료가 들어있다. "마라바라타 안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들어 있으며, 이 안에 없는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인두 힌두교의 종교철학, 사상이 깃든 경전이다. 비슈누 신의 화신 크리슈나에게 아르쥬나가 정의와 도덕률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바가바드 기타>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그림 4) 피미아나카스

[왕궁터]

과거에 있었던 왕궁들이 대부분 목조건물로 이루어졌었는데 계속되는 아유타야왕조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모두 불타 소실 되어 버렸다. 지금은 그러한 흔적만이 남아 있는 곳으로서 바푸온위쪽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은 당시의 왕실의 힌두교 사원이었던 '피미아나카스'가 있으며 그 앞으로 코끼리의 테라스와 문둥이왕의 테라스가 자리 잡고 있다


피미아나카스(피메아나카스, Phimieanakas)

황금의 탑에서 국왕의 머리가 아홉 달린 뱀왕의 딸(nagi)과 밤바다 잠을 잤다는 설화를 간직한 이 사원은 자야바르만 4세(?) 때부터 건축이 시작되어 라젠드라바르만 2세, 수리야바르만 1세에 의해 성문과 성벽이 완성되는 등 후대의 왕들에 의해서 설계 변경이 이루어졌다.

사원의 이름은 '천상의 궁전, 공중누각'(산스크리트어로는 vimanaakasa)이란 뜻을 가졌지만 왕궁이 아니라 사원이다. 라테라이트로 지었으며 1층은 35x28m, 최상층은 30x25m에 이르나 회랑의 폭은 1m에 지나지 않는다. 사원 북쪽에는 125x45m의 남자의 연목, 동쪽에 40x20m의 여자의 연못(srah srei)이 있다. 1944년까지 네 차례나 복원되었다.


  [코끼리의 테라스]

왕궁터에 '피미나아카스' 앞에 세워져 있는 테라스로서 코끼리의 테라스는 실제 코끼리 크기만큼으로 코끼리가 새겨져 있고 그 테라스의 폭은 14미터 길이는 300미터나 된다. 과거 이곳에서는 각종 왕실행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특히 군대의 열병식 때 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은 코끼리의 테라스에서부터 뻗어져 있는 큰 길이 앙코르 톰의 승리의 문까지 연결되어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 테라스는 12세기 후반인 자야바르만7세 때 건축되었다


코끼리 테라스(Elephant Terrace)

왕궁 광장 앞에 위치하며 자야바르만 7세 때 건축되었다. 바푸온 사원에서부터 나왕의 테라스까지 약 300m 길이에 실물 크기의 코끼리, 가루다, 말, 폴로게임과 유사한 추각 게임 장면 등이 부조되어 있다.

이 곳은 자야바르만 7세가 군사행진을 하던 곳이며, 각종 행사가 열렸던 광장이었다. 1911년, 1916년 앙리 마르샬에 의해 복원되었다.


[문둥이왕의 테라스]

문둥이왕 테라스는 코끼리 테라스에서 북쪽편으로 7m 위쪽에 위치한다. 문둥이왕 테라스의 윗편에 나체의 문둥이 왕이 앉아 있는데 이 문둥이 왕은 성별을 구분할 수 있는 성적인 상징이 없다.(이것은 앙코르 유적의 또하나의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볼 수 있는 문둥이 왕의 석상은 진품은 아니고 진품은 현재 프놈팬 국립 박물관에 소장중이다. 유적에 있는 문둥이왕의 석상은 복원품이다.

문둥이왕 테라스는 벽이 이중벽인데 외부벽은 라테라이트로 되어 있고 안의 벽은 사암으로 부조들이 조각이 되어있다. 이 부조들은 상당히 보존 상태가 뛰어나다. 그러나 이렇게 벽이 두개인 것의 정확한 이유는 아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문둥이 왕 테라스의 '문둥이'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문둥이 왕의 석상이 성별이 구분이 되지 않아서 문둥이라는 설, 원래는 문둥이가 아니었는데 왕 앞에 엎드리지 않는 신하의 목을 벨 때 신하의 피가 몸에 튀어서 문둥이가 되었다는 설, 문둥이왕 테라스 아래에 보면 벽과 벽 사이에 수많은 부조들이 있는데, 그 부조에 왕의 살결이 물결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병을 앓은 왕이 아니었을까 하는 설, 문둥이 왕의 테라스의 원래 용도를 왕궁의 화장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왕궁의 화장터를 지키는 상이라면 죽음의 신인 야먀이므로 문둥이 왕의 석상은 야마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중에 무엇을 믿던지는 자신의 마음이다.

 

나왕(癩王)의 테라스(문둥이왕 테라스, Leper King Terrace)

자야바르만 7세 때 건축한 것으로 코끼리 테라스 옆에 위치하며 나가 상과 수많은 신들이 부조되어 있고 테라스 위에는 약 1m 크기의 나왕의 좌상(座像)이 있었다(현재 이 조각은 프놈펜의 국립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나왕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엇갈린다. 코마유는 시바신이라고 주장하며, 에이모니에는 야소바르만 1세라고 하고 조르쥬 세데스는 야마신이라고 주장하는 등 이견이 많다. 1911년, 1917년 앙리 마르샬에 의해 복원되었다

▶ 바이욘 사원의 이해 (앙코르 톰)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톰의 중심에 있는 사원으로서 앙코르톰을 건축한 자야바르만 7세가 건축한 사원이다. 사원의 모양은 거대한 바위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앙코르 왓트 유적군중에서 우물을 갖추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래 그림과도 같은 사면에 조각된 관세음보살상인데 이는 자야바르만7세를 나타낸다고 한다. 바욘은 전체적으로는 크고 작은 약 50여개의 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른 앙코르 왓트의 유적지가 대부분 힌두교를 바탕으로 한 신화의 내용을 주로 전달하고자 부조로 나타나는데 비해 이곳은 당시의 크레인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전쟁을 위주로 하여 조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추정하건대 아마도 당시의 왕이었던 자야바르만7세가 힌두교보다는 불교를 더욱 신봉하는데서 기인한 듯 싶다.바이욘 사원은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에 지어진 불교사원이다. 당시의 왕이었던 자야바르만7세는 캄보디아 최초로 힌두교를 멀리하고 대승불교(호국불교)를 가지고 왔는데 이는 스스로 참선을 통한 자기해탈의 목적을 얻기 위한 소승불교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즉 나라를 구하기 위한 불교로서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야바르만7세는 당시에는 획기적인 빈민구제시설을 설치하는 등 여러 사원들을 건립하였다. 그러한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자야바르만7세는 왕을 계승할 적통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신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왕권을 계승하다 보니 정통성의 왕권이 아닌, 즉 힌두교가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계급질서보다는 자연스럽게 백성을 대상으로 하여 직접 마주하는 대승불교를 선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불교의 관세음보살상으로 자칭하면서 대승불교를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런 배경이 그의 재임중에 많은 사원을 건축하게 되는데 바이욘 사원, 앙코르 톰, 프레아칸, 닉뽀안, 따 프롬 등의 사원이 그 실례이다.


 자야바르만 7세는 외교적 능력으로서는 1200년대 초 앙코르 왕국을 항상 노리고 있었던 베트남(당시는 참판 왕국)을 점령하였으며 저 멀리 태국 북부지역까지 영토를 넓혀 나갔다고 한다. 그런 흔적은 라오스의 비엔티안에서도 그의 비문이 발견 될 정도라고 하니 그 당시의 앙코르 제국의 영화와 힘을 상상할 수 있겠다. 자야바르만 7세는 탁월한 군사력과 정치력, 그리고 자신을 관세음보살과 일치시키며 신격화시킬 정도로 능력있는 왕이었으며 앙코르 왕국을 번영시킨 위대한 왕으로 남아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시 바이욘 건설 직후에는 황금빛으로 찬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앙코르의 유적지가 그렇하듯이 이 바이욘 사원도 어떤 목적으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이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톰의 중심에 있는데 아마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이욘사원은 크메르 우주론의 메루산을 상징한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처음 바이욘을 대하면 네면에 관음보살상이 있는 이 사원에 대하여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곳에 그렇게 큰 돌로서 관세음보살상을 만들어 놓은 이유를 묻는다면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흔히들 사람들은 바이욘 사원의 관세음보살상의 미소를 '앙코르의 미소'라고 표현하고 있다.

바욘(바이욘, Bayon)

바욘은 앙코르 톰의 동서남북 각 대문으로부터 1km 지점에 위치한 중심 사원으로 왕이 신봉하는 관음보살상인 4면불(四面佛)을 총 196개나 조각해 놓았다.

이 사원은 동쪽이 정문이며, 제1회랑은 동서 160m, 남북 140m이며 회랑 중앙에 제2회랑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제1회랑 벽면에는 민중의 생활상, 자야바르만 7세가 톤레삽 호수에서 참파군을 물리치는 해전장면이 부조되어 있다. 특히 톤레삽 호수에서 어망을 던져 고기를 잡는 장면, 시장에서 물건을 매매하는 장면, 장기를 두거나 닭싸움과 개싸움하는 장면,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장면 등 서민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물론 왕비를 비롯한 궁중여인과 귀족들의 생활상도 있다.

제2회랑은 동서 80m, 남북 70m에 달하는 데, 이 곳은 제1회랑과 달리 대부분 크리슈나, 시바신, 가루다를 탄 비슈누 신 등 힌두교 신화와 전설이 부조되어 있다.

한편, 상부 테라스에는 사면불인 관음보살상이 부조되어 있으며 회랑은 둥근 형태로 만들어졌다. 흔히 '크메르의 미소'로 평가되는 관음보살상 조각은 휴먼 모티브를 특징으로 한다. 얼굴은 보통 2m 내외이며 머리에는 연꽃 모양으로 장식을 둘렀다. 상층부의 중심탑 높이는 약 64m이며, 원형의 중심탑 주위에는 16기의 첨탑이 순례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 첨탑은 소위 '바이욘의 미소'로 불리는 것첨 은은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관음보살상이 4면으로 조각되어 있고, 첨탑 내부에는 전국 각지의 수호신이 모셔져 있어 기존 힌두교 세력을 개혁하기 위한 혁신적 사상이 반영된 승원이다.


* 크리슈나(Krishna) : 비슈누신의 여덟 번째 화신. 원 뜻은 비뉴수신의 검은 머리카락에서 파생되어 '                       검은 것'을 의미한다.

* 가루다(Garuda) : 비슈누신이 타고 다니는 새. 몸과 다리는 사람, 머리는 독수리 형상을 하고 있다.

* 크메르(Khmer) : 캄보디아 민족, 언어를 지칭한다.


▶ 따 프롬의 이해

 

앙코르 왓트의 유적지중에서 아마도 따 프롬처럼 인상적인 곳은 없는 듯 싶다. 물론 앙코르 왓트의 모습이나 앙코르 톰의 모습, 그리고 거기에 부속된 각종 부조물, 건축물이 불가사의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따 프롬이 주는 느낌은 어떤 면에서는 신비로운 감마저 느끼기도 한다. 그것은 따 프롬으로 가는 길이 앙코르의 유적군중에서 가장 고대의 냄새와 느낌이 나는 곳이며 자연앞에서 얼마나 인간이 나약한가를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 프롬(Ta Prohm)은 1186년경에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에게 헌정하기 위해서 지은 불교사원이다. 이곳은 앙코르 유적중에 몇 안되는 비문이 있는 사원이기도 하다. 앙코르 유적군 중에서 가장 정글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수백년 동안 방치되어온 따 프롬의 모습은 아래의 그림처럼 나무의 뿌리에 의해 파괴되어 앙코르 왓트의 유적군의 상징적인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러한 모습은 이곳을 방문할 때면 마치 막 돌기둥과 천장이 무너질 것과도 같은 느낌속에서 어찌 보면 고색 창연한 느낌마져 감돌고 있다. 

  

따라서 이곳은 앙코르 유적군중에서 가장 신비로운 맛을 풍기는 곳으로 꼭 들려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따 프롬으로 가는 길은 다른 어느 길보다도 고대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고 하는데 이곳으로 가늘 길을 캄보디아에서 이렇게 개발을 하지 않고 두는 이유는 자연이 어떻게 사원을 무너뜨렸으며 그 과정과 결과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라고 한다.


따 프롬에서 발견된 비문의 내용을 보면, 당시의 규모와 화려함을 알 수 있을 듯 싶다. 돌에 새겨진 기록에는 타 프롬은 당시 3140개의 마을을 통치하였고, 79,365명이 이 사원안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8명의 고승과 2,740명의 관리들과 2,202명의 인부들과 615명의 압싸라(무희)들, 그리고 일반 서민들이 1만여명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보는 타프롬은 그 규모를 상상하기 어려울 수가 있는데 과거의 타 프롬의 외벽은 길이가 동서로는 1키로미터, 남북으로는 600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원에 남아 있는 재산 중에는 500Kg이 넘는 황금 접시 한쌍과 35개의 다이아몬드, 40,620개의 진주, 4,540개의 보석, 876개의 중국에서 온 커튼, 512개의 비단 침대 그리고 523개의 양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숫자가 비록 왕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과장된 것들이기는 하지만 Ta Phrom 사원의 중요성과 의미를 잘 말해주고 있다. 


▶니악 뽀안의 이해

 

영문으로는 Neak Pean이라고 하는데 캄보디아어로 니악 뽀안은 '또아리를 튼 뱀' 이라는 뜻이다. 힌두교에서는 '나가'라는 뱀의 신이 나오는데 이 신은 영원불사의 뱀신으로 부처를 지키는 신으로 표현된다. 니악 뽀안은 12세기에 지워진 불교 사원인데 여기서 니악은 '나가'를 뜻하고 있다. 뱀신인 '나가'가 일곱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의 뱀도 실제 7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은 물이 없지만 원래는 커다란 연못의 한가운데에 이 니악 뽀안이 있었으며 이것은 우주의 꼭대기에 있는 즉 히말리야의 맨 꼭대기에 있는 아나파타파 호수를 상징하며 전설에 의하면 이 호수는 이 세상의 네개의 커다란 강의 근원지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이 호수는 그리 크지 않은 자그마한 인공호수라고 하는데 당시에 이 곳을 지었을 때 사원으로 가고자 하였을 때는 인공호수로 말미암아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호수의 중간에 보면 말을 잡고 있는 사람들의 조각이 보이는데 이 조각은 도굴 때문에 현재는 말의 형태와 사람들의 발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니악 뽀안 사방에 있는 4개의 동물이 조각된 조그마한 암자가 세상에 있는 네개의 강의 근원지를 의미한다. 아나파타파 호수를 인도에서는 풍작을 기원하는 의미로 숭배했는데 니악 뽀안은 아마 세상에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온 석가에게 바쳐진 것으로 추정된다. 1935년까지 니악 뽀안의 중앙 탑은 뱅골보리수 나무가 그 위에 자라고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니악 삐얀(닉펜, 니악 뽀안, Neak Pean)

자야바르만 7세 때 지은 이 사원은 자야타타카(북 바라이) 한 가운데 섬처럼 서 있는 불교사원이다. 이 곳은 왕이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온천장으로 개방하였으며, 사람과 말 모양의 급수구를 통해 물이 흘러가도록 해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곳은 '똬리를 튼 뱀'의 뜻으로 두 마리의 커다란 뱀이 중앙사당의 기단을 감싸고 있으며 나가와 신마(神馬)상이 조각의 주제다. 관음보살의 화신인 말(馬)이 난파한 어부를 구해줬다는 〈본생담(本生譚)〉을 간직한 곳인데, 물에 빠져죽지 않기 위해 말의 머리와 다리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과 자세가 생생히 부조되어 있다.

조르쥬 세데스에 의하면 이곳의 중앙연못은 병을 치유하는 불가사의한 물이라는 전설이 있고, 사람과 동물의 머리 모양으로 장식된 급수구에서 물이 흘러가도록 한 것은 히말라야에서 발원하는 4대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4개의 동물 조각 : 남자 얼굴>

연못

<4개의 동물조각 : 코끼리 머리>

중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작은 연못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곳은 남북 3.5km, 동서 0.9km의 저수지로 약 10만㎥의 물을 저장했던 곳이며 기능이 정디죈 동 바라이를 대체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4개의 동물 조각 : 말머리>

<4개의 동물조각 : 호랑이 얼굴>

 


▶ 프레아 칸의 이해

 

프레아 칸이란 "신성한 검"이란 뜻으로서 앙코르 유적군에서는 꼭 봐야 할 곳중의 하나이다.

신성한 검은 자야바르만 2세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왕자에게 주었다는 보검으로 그 이후 이 신성한 검에 의해 나라가 지켜진다은 전설의 검이다. 그러나 이 사원을 지은 이유는 자야바르만 7세가 자신의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지은 불교 사원이라고 하며 자야바르만 7세 재위시절인 12세기 경에 지어졌다. 이 사원은 힌두교와 불교의 혼합된 양식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전체적으로 일부는 보존이 양호하지만 다른 일부는 심한 파괴 흔적을 볼수 가 있다. 이는 자야바르만7세는 불교를 신봉하였지만 왕비는 힌두교를 신봉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불교와 힌두교의 혼합형태의 건축물이 탄생되었으며 후에 불교유적 성격의 건축물이 많이 파괴되었다. 힌두교 건축의 흔적으로 뱀의 신 '나가'가 그려져 있으며, 반인반조의 전설의 새 '가루다'에 의해 잡힌 모습이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 하나 이 사원의 특징으로는 사원의 중앙으로 다가 갈수록 문의 높이가 낮아지는데 이는 왕에게 다가 갈수록 머리를 숙이고 존경심을 표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프레아 칸(Preah Khan)

자야바르만 7세 때인 1191년에 지은 불교사원으로 56.7ha에 이르는 광대한 사원이다. 이 사원은 앙코르 톰을 짓기 전까지 자야바르만 7세가 잠시동안 왕궁으로 사용했다.

이 사원은 3중의 주벽(700x800m)을 환호가 감싸고 있으며 도로에서 서쪽 문까지 150m 거리에 링가를 모방한 석주기둥 96기가 서 있으며, 석주가 끝나는 지점에 신과 아수라들이 바수키 뱀을 잡고 우유바다를 젓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사원 북쪽 끝에는 그리스식 둥근 기둥으로 지은 2층 건물이 있는데 고행승과 불상이 조각되어 있었으나 자야바르만 7세가 죽은 후에 힌두교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1939년 이 사원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나가라 자야슈리(Nagarajayacri)라는 태국어가 등장하는 데 그 뜻은 성스러운 칼을 뜻한다. 이 때문에 선조로부터 전해오는 성검(聖劍)은 태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또한 이 승원에는 97,840명의 승려, 일꾼, 1000명이 넘는 압사라가 있었으며 700x800m의 주벽 바깥에는 0.9x3.7km의 환호와 6.5ha의 넓은 공간에 10만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 아수라(Asura) : 신들에게 적대적인 악마의 종족. 원래의 뜻은 '호흡하다(asu), 존재하다(as),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쁘레 룹의 이해

 

10세기 중기 혹은 후반에 건축된 사원으로서 라젠드라바르만 2세때 건축 되었다. 이 탑이 다른 유적지와 조금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면 건축물을 지을 때 벽돌을 쌓아 올린 전탑형식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벽돌의 사용은 붉은 색을 띠고 있어서 해가 뜨는 일출 혹은 일몰시간에 보는 사원의 모습이 매우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탑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몸을 변화 시킨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사원이 갖는 의미에 따라 캄보디아 사람들은 이 사원을 장례의식을 치렀던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사원의 동쪽 입구에는 사람을 화장할 때 사용 되었음직한 직사각형의 벽돌 구멍이 있다.쁘레 룹은 동쪽 호수에서 관개수로로 공급된 물로 농사를 짓는 거대한 평원에 우뚝 솟아 있는데, 인공으로 만든 산 위에 라테라이트와 벽돌로 사원을 건설하였으며, 구조는 사각형으로 두개의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탑의 위쪽에는 벽돌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성소가 있는데 이곳에는 놀라운 상인방이 있다. 이 상인방에는 비슈누가 반은 사람으로, 반은 사자로 분한 모습의 조각이 그대로 보존 되어 있다.

중앙 사원은 사각형의 사방에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사자석상이 지키고 있다. 1층과 2층은 라테라이트로 건축 되었고, 3층은 사암으로 건축 되었다. 12개의 조그마한 탑들이 1층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으며 그 안에는 링가가 모셔져 있다. 최고층의 5개의 탑에는 문이 모두 동쪽으로 만들어져 있고 남쪽 코너의 동쪽에는 브라흐만신의 아내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 톰마논의 이해

 

톰마논(Thomanon)은 앙코르 유적지중에서는 비교적 오래된 곳이다. 톰마논은 앙코르 왓트가 세워지기 직전에 세워진 힌두교 사원으로 사원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으나 규모에 비해 조각이 상당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테바다(여신)신의 부조가 상당히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에 비해 사람들은 많이 찾지 않는 듯 싶다. 톰마논은 정면으로 바라 보고있는 차우 싸이 떼보다와 비슷한 모양과 구조로 건축 되어져 있으나 차우 싸이 떼보다 보다는 보존 상태가 좋다.  

중앙사원의 기단의 조각은 보존상태가 아주 뛰어나다. 각 면에 한개씩 4개의 현관이 있다. 테바다(여신상)는 특히나 조각이 훌륭하고, 동쪽 상인방에는 가루다를 탄 비쉬누가 조각되어 있고 내부의 문 위에는 수그리바와 사우다 죽은 발리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톰마논은 동쪽으로 문이 달린 중앙 신전이 있으며 사각형의 구조이다. 주변은 해자로 두르고 두개의 입구탑이 있는 담벽으로 싸여있다. 동쪽 입구탑은 십자형 바닥 구조이며 도서관이 남쪽 벽에 붙어있다. 담벽은 라테라이트 기초만 남아있다.

 


▶ 반티아이 끄데이의 이해

 

반티아이 끄데이란 뜻은 '작은 방들의 성'이라는 뜻으로 당시에는 수도원으로 사용되었던 유적이다.

불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반티아이 끄데이는 자야바르만 7세때 부드러운 사암으로 건축 되어졌다고 하나 부드러운 사암으로 건축된 이유로 발견 당시 많은 훼손이 있었고, 몇번의 개보수를 거치다 보니정확한 건축 시대를 알아내기 어려운 상태이다. 12세기 중엽에서 13세기경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반티아이 끄데이에 관한 비문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용도로 건축이 사용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구조가 따 프롬과 비슷하지만, 따 프롬보다는 덜 무너졌고, 또 덜 복잡하다. 이곳에는 1960년대에 위험한 야생 동물이 살게되어 사람이 접근하지 못했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계속 승려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원의 동쪽 출입문으로 들어가면, 자야바르만 7세가 지은 다른 건축물인 바이욘 사원과 같은, 사면상으로 되어 있는 관세음보살이 있으며 앞에 커다란 테라스가 나오는데, 이곳은 춤추는 소녀들의 홀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은 이 테라스에 조각된 춤추는 압사라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이 테라스의 북쪽에는 큰 기둥들이 보이는데, 이 기둥들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집 기둥의 잔해라고 한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중앙 탑과 회랑들이 있는데, 많이 무너져서 구분이 힘든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가치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탓인지 다른 곳과는 달리 복구되지 않고 있는 곳이다.

 

▶ 쓰라 쓰랑의 이해

쓰라 쓰랑은 반띠아이 끄데이의 맞은편에 정면으로 보이는 큰 호수를 말한다. 12세기 말 자야바르만 7세때 돌을 기초로 하여 건축 되었다. 호수의 크기는 동서가 800미터 남북이 400여미터의 인공호수이며 과거에는 이곳이 왕의 목욕탕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호수 앞쪽에는 이를 증명하듯이 사자상과 나가상이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왕들의 목욕탕치고는 상당히 큰 편이라서 현재는 씨엠리업 사람들의 야유회 장소로 이용되고 있는 곳이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쓰라 쓰랑은 돌계단 밑으로 수초가 우거진 거대한 연못인데 이 곳을 내려다 보는 돌사자의 위풍이 아름답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이 근처에서 크메르 루즈의 끔찍한 학살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앙코르 유적에서는 많은 유적에 해자나 호수가 등장한다. 이것은 전쟁에 대비한 방어적인 준비라는 목적이외에 건기에 용수를 확보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고 한다. 캄보디아 곳곳에서 발견되는 이런 현상은 캄보디아가 저지대이기 때문에 방어적 개념에서는 대단히 불리하고 따라서 땅을 돋우는 일은 반드시 중요한 국가의 사업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타솜(Ta som)

자야타타카(북 바라이)를 지나면 나무뿌리가 탑문과 여신상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사원이 타솜이다. 원래 이 사원은 프레아칸, 자야타타카, Neak Pean과 더불어 유기적인 관계를 갖도록 일직선상으로 설계되었다.

자야바르만 7세가 아버지를 위해 헌사한 보리사(菩提社)인 타솜은 세 겹으로 만든 라테라이트 회랑이 있고, 서쪽으로 출입한다. 중앙사당의 벽면에는 가짜창의 공법을 볼 수 있고 무너진 회랑의 벽공에는 나가 상이 조각되어 있다. 1930년 앙리 마르샬에 의해 복원되었다.


프레아 피투(Preah Pithu)

수리야바르만 2세 때 지은 힌두사원. 왕궁 앞 도로의 북단에 있는 텝 프라남(Tep Pranam) 사원 옆에 나란히 서 있으며 두 개의 십자형 테라스와 다섯 개의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가짜 문과 나가 상, 라마야나나 부조되어 있다. 1908년, 1918년에 각각 코마유, 마르샬에 의해 복원되었다.


크레앙(끌리앙, Kleangs)

크레앙은 '창고, 저장고'의 의미다. 승리의 문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하나씩 서 있는 이 건물은 일종의 창고로 사용되었으며, 12개의 탑인 수오르프랏 뒤에 위치해 있디. 북 크레앙(North Kleang)은 라젠드라바르만 2세 때 목조로 건축된 후, 자야바르만 5세와 수리야바르만 1세 때 사암을 이용하여 다시 지은 것이다. 1908년부터 1920년까지 코마유와 앙리 마르샬에 의해 복원되었다.


프라삿 수오르 프랏(Prasat Sour Prat)

크메르인들은 정월이 되면 탑과 탑 꼭대기에 밧줄을 연결하여 그 위에서 줄타기를 했는데, 국왕은 왕궁 앞의 테라스에 앉아 이 광경을 구경했다고 한다. 사원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하여 '밧줄 타는 탑'(Tower of Cord Dancer)이다.

13세기에 이 곳을 다녀갔던 주달관은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 이 탑에 올라서 일종의 신판(神判)으로 죄를 가렸다고 기록했다.

앙코르 톰 왕궁 광장에서 시작되는 승리의 문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각각 6개 씩 12개의 탑이 나란히 서 있는 곳이며, 라테라이트로 지은 탑과 탑 사이의 거리는 35m이다.


* 프라삿(Prasat) : 남인도 사원에서 테라스가 있는 피라미드형 사원을 지칭하며 원어는 프라사다(prasada).



4. ▣ 앙코르 톰(Angkor Thom) 밖의 사원들 


끄라반(프라삿 크라반, Prasat Kravan)

아름다운 연와(煉瓦)로 만든 작은 힌두교 사원으로 하르샤바르만 1세가 921년에 지었다. 중앙의 탑에는 비슈누 신이, 북쪽의 탑에는 락슈미 여신상이 조각되어 있는 5탑형 사원이다.

그러나 중앙탑만 온전히 보존되어 있고 나머지는 파괴가 심하다. 관광객들의 발김도 뜸한 편이다.


쓰라 쓰랑(왕의 목욕장, Sras Srang)

12세기말 자야바르만 7세 때 만든 700x300m의 목욕장. 나가 상(像)과 사자 상(像)이 테라스에 조각되어 있으며, 학자들은 이 곳을 '앙코르의 정원'으로 칭한다. 연못 가운데는 라테라이트로 만든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반테아이 크데이(반띠 크데이, Banteay Kdei)

자야바르만 7세 때 지은 이 사원은 '승방(僧房)의 성채'란 뜻으로 기존의 힌두교 사원을 불교사원으로 개조한 것이며, 힌두교와 불교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사암을 주로 사용하여 지었기 때문에 사원 여러 곳에서 탈구가 일어나 황폐한 상태에 있다. 고고학자에 의하면 중앙신전과 회랑, 회랑과 회랑을 연결하는 참배길, 네겹의 주벽, 700x500에 이르는 환호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중앙신전은 사암과 라테라이트로 쌓은 주벽이 감사고 있으며 회랑은 십자회랑으로 구성되었다. 1920~22년 앙리 마르샬에 의해 복원되었다.


프레 룹(프레 럽, Pre Rup)

라젠드라바르만 2세 때인 961년에 3층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국가사원. 중앙에는 5탑형으로 건축되었다. 귀메미술관의 큐레이터 슈테른 박사는 이 사원을 '동쪽의 도시'로 불렀다. 대담한 건축 디자인, 규모와 각 부분이 완전히 조화를 이룬 사원으로, 크메르인들은 이 곳에서 장례식, 다비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사원 외부는 환호로 둘러져 있으며, 신체를 변화시킨다는 뜻에서 Pre Rup으로 명명했었다고 전해진다.


동메본 사원(East Mebon)

라젠드라바르만 2세 때인 952년에 건축된 힌두교 사원으로 5찹형이며, 왕이 조상에게 헌사한 사원이다. 동메본과 Pre Rup 사원은 같은 왕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조각이나 구성이 유사하다.

동 메본 사원은 동바라이 한 가운데 위치하여 배를 타고 접근해야 한다(현재 바라이는 땅으로 메워져 있다). 라테라이트와 사암으로 지었으며 외벽을 칠하기 위해서 석회를 사용하였다. 1935~39년 앙리 마르샬과 그레즈의 의해 복원되었다.


타프롬(따쁘롬, Ta Prom)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에게 헌사한 불교사원으로 1186년에 건축되었으나 왕이 죽은 후에는 힌두교 사원으로 개조되었다. 사원은 거의 붕괴된 데다 거대한 스포안(Spoan) 나무가 사원전체를 휘감고 있어서 유적보존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사원은 라테라이트를 재료로 한 주벽이 700x1000m에 이르며 전체 사원면적은 60ha에 이른다. 비문에 의하면 이 사원에 고승 18명, 승려 2,740명, 견습승 2,232명, 압사라 615인을 포함하여 12,640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제2주벽에는 왕의 어머니를 반야바라밀다 보살(prajnaparamita)의 모습으로 조각하여 안치하고 왕의 조상을 260여 개나 만들었다고 한다.


* 압사라(Apsara) : 대양(apu)을 휘저어 추출되었다(rasa)하여 압사라로 불러지게 된 신들의 무희, 흔히 신들들 즐겁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현재 캄보디아의 전통무용이지만, 태국의 전통무용이기도 하다. 이는 아유타야 왕국이 앙코르 왕조를 점령(1430~1431)한 후 태국의 민속무용으로도 거듭난 까닭이다.


▶ 차우 사이 테우다(차우 싸이 테보다, Chau Say Tevoda) 와 톰마논(토마논, Thommanon)

길 하나를 마주보고 대칭으로 서 있는 이 사원들은 수리야바르만 2세때 건축하였다. 차우사이 테우다는 장방형으로 동쪽 탑문은 씨엠립 강을 향하도록 했고, 톰마논은 차우 사이 테우다와 마찬가지로 평면 사원이며, 비뉴수 신이 가루다에 올라 아수라와 전투하는 장면이 부조되어 있다.

1919~20, 1925~27, 1960년대 프랑스 극동학원에 의해 복원되었다.


박세이 참끄롱(박세이 참크롱, Baksei Chamkrong)

앙코르 톰 남문을 벗어나면 서쪽 숲에 아름답게 솟아있는 사원. 하르샤바르만 1세 때에 공사가 시작되어 라젠드라바르만 2세 때인 947년에 완성된 장제전이다.

이 사원은 앙코르가 공격당할 때 왕은 도망가서 이 사원에 숨었는데 '커다란 새가 날개로 가려서 목숨을 구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박세이 참끄롱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라테라이트와 사암으로 장식되었고 기반부는 27m의 장방형으로, 상층부는 15m, 높이는 12m이다.


▶ 프놈바켕의 이해

 맨처음 앙코르 왕국의 수도였던 롤루우스 지역에서 드디어 앙코르 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그 당시의 왕이었던 야소바르만왕이 이곳으로 옮기면서 최초로 지은 힌두교 사원이다. 앙코르 왓트의 유적군중에서는 비교적 오래된 곳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 여행객들에게는 프놈바켕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보다는 앙코르 왓트에서 가장 선셋을 잘 볼 수 있는 장소로 더 알려져 있는 것 같다. 프놈바켕(Phnom Bakeng) 앙코르 왓트를 지나 앙코르 톰으로 가다보면 야트마한 산이 나온다.

이 사원은 9세기 후반 야소바르만 1세가 시바신에게 바치는 사원으로 지어졌다. 캄보디아에서 프놈이란 말은 산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그 자체로서 신성함을 지닌다. 고대 푸난왕조도 프놈에서 전이되었다는 말이 있은 정도로 프놈이라는 의미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프놈 바껭은 바껭산 위에 만들어져 있으며 사원의 높이는 67m에 달한다

1960년대에는 코끼리를 타고 오르기도 했으며 당시 프랑스에서 왔던 관광객들은 이 언덕이 중세기 때의 정원을 산책하는 기분이 나서 매우 좋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일몰 직전에 이 산에 오르면 앙코르 주변의 멋있는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여기서는 앙코르 왓트의 서쪽으로 5개의 탑을 다 볼 수 있고, 큰 호수 옆에 있는 프놈 크롬의 남서쪽도 보이며 프놈 북의 북동 방향과 프놈 쿨렌과 서쪽 호수의 동쪽 광경을 볼 수가 있다.

서기 889년 야소바르만1세가 즉위한 뒤에 야소하라프라라는 그 자신의 도시를 롤루스 북쪽에 세우면서자신을 상징하는 사원으로 이 프놈바켕을 지었다. 이 신도시가 지금의 앙코르 지역이며 따라서 바켕은 때때로 처음 지어진 앙코르로 불려지기도 한다. 그 당시 있었던 사각의 성벽은 각 면이 4Km길이로 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성 가운데의 산이 이 사원을 잘 구분할 수 있게 한다. 바껭사원의 탑의 숫자는 우주를 상징한다. 원래 109개의 탑이 메루산을 모방한 모양으로 바껭 사원을 장식하였으나 많은 탑이 훼손, 유실되었다.


 

프놈 바껭(프놈 바켕, Phnom Bakheng)

900년애 야소바르만 1세가 5층으로 지은 피라미드형 국가사원으로 동서 4km, 남북 4km에 이르는 야소다라푸라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야소다푸라는 후기에 가서 앙코르 왓과 앙코르 톰이 들어서게 되는 앙코르 시대의 토래가 된 지역이다.

이 사원은 사암의 언덕을 이용하여 지었기 때문에 이 곳에 오르면 앙코르 왓을 비롯하여 프놈 쿨렌, 바라이를 볼 수 있다.

5층의 기단을 오르면 중앙에 다섯기의 사당이 있었으나 네 개는 허물어지고 중앙본전만 남아 있다. 각 층마다 12개의 소사당이 있으며 기단부에는 연와로 만든 44동의 사당이 늘어서 있어 중앙의 5찹을 합하면 모두 109개의 탑이 들어서 있다.

이 사원은 구조상 중부 자바섬의 보로부두르 사원과 유사하게 190x120m의 주벽이 있었으나 모두 허물어져 있다.

* 프놈(phnom) : 산(山)을 뜻하는 크메르어. 라오스어 푸(Phou, Phu)도 산을 의미한다. '프놈 펜'은 펜                    부인의 언덕이란 의미다.


▶ 따 케우의 이해


따 케우는 사암으로만 만들어진, 장식이 거의 없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원이다. 이 사원은 자야바르만 5세가 건축을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나중에 수리야바르만 1세가 이어서 건축하다가 또 완성하지 못한 사원이다.

사원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에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몽고족의 침입이 일어났고 이를 저지하다가 사원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설과 자야바르만 5세가 건축을 하다가 사망을 하고 수리야바르만 1세가 이어서 짓고 있는데 수리야바르만 1세가 어느날 사원을 완성하면 수리야바르만 1세 자신이 단명하고 앙코르 제국도 멸망할 것이라는 꿈을 꾸었다. 그 후에 수리야바르만 1세도 건축을 중지 했다는 설이다. 미완성인 유적이기 때문에 확실히 단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 만일 따 케우가 완성이 되었다면 앙코르 유적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원의 전체적인 느낌은 앙코르 왓트나 바이욘 등은 규모가 워낙 커서 압도되는 분위기이고, 다른 사원들에서는 전탑이 많고, 또 너무 조각이나 탑을 섬세하게 쌓아 올라가서 굵은 선의 맛을 느낄 수 없는데 비해서, 따 께오는 투박하게 쌓아올려 남성미가 돋보이는 사원이다. 일단 꼭대기에 앉으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고, 탑이 주는 시원한 맛도 어우러져서 더 시원한 느낌을 준다

 

타케오(따께우, Ta Keo)

기하학적 입체미를 살린 3층의 피라미드형 사원으로 자야바르만 5세와 수리야바르만 1세 때인 1000년경에 건축되었다. 이 사원은 메루산을 지상에 건설하려한 의도로 지었기 때문에 높이는 70m에 이르고 중앙에는 다섯 개의 탑이 있고, 제1층 테라스는 96x112m, 제2층 테라스는 80x84m, 제3층 테라스는 40x40m의 장방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승리의 문 오른 편에 위치한 이 사원은 회랑과 지붕을 실험적으로 도입하였고, 처음으로 녹색 사암을 사용했기 때문에 기술자들이 고작을 해 넣지 못한 것이 특징이다.

1920년부터 2년에 걸쳐 앙리 마르샬 등이 복원하였다.


▶ 반티아이 쓰레이의 이해

 

반티아이 쓰레이는 앙코르 톰에서 북쪽으로 25km정도, 씨엠리업에서 32km를 이동해야 나오는 사원으로 수많은 보석들과 앙코르 미술들을 간직하고 있는 사원이다. 이 사원은 붉은색의 사암을 사용해서 건축 하였고, 시바신에게 헌정된 사원이므로 부조들 역시 시바신을 주제로 한 것들이 많다.반티아이 쓰레이는 '여자들의 요새'라는 뜻이다.

이곳은 967년에 착공된 사원으로, 대부분의 앙코르 유적의 사원들이 왕의 명령으로 건축을 하기 시작한데 반해서 반티아이 쓰레이는 '하르샤바르만 2세'의 손자이며 바라문교의 승려였던 '야즈나바라하'란 사람이 건축하였다.

사원은 사각의 모양이며, 입구는 동쪽과 서쪽 두군데에 존재 하는데 동문은 큰 길로 통해서 현재는 서문보다는 동문을 이용해서 거의 모든 여행객들이 입장을 하고 있다.

볼만한 것은 사치스럽게 장식된 도서관들과 3개의 중심탑인데 여기에는 성스러운 남녀와 아름다운 조각들로 장식이 되어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전통의상을 입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는 섬세한 반티아이 쓰레이의 조각들과 반티아이 쓰레이의 중앙 사원을 감고 있는 부조들은 상당히 볼만하다. 특히나 부조들은 앙코르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하며, 양각의 깊이가 가장 깊어서 거의 소조에 가까운 부조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사원이다.

 

반티아이 쓰레이 사원은 기둥을 빼놓고는 거의 모든 유적에 조각이 들어가 있다. 유적의 곳곳에서 몸은 사람이고 얼굴은 동물인 신화적인 조각상이 무릎을 꿇고 사원을 보호하고 있는데 이 조각들은 모두 모조품이고 진품은 현재 프놈펜이에 있는 국립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또한 반티아이 쓰레이 사원은 EFEO가 1930년에 아나스티로시스(Anastylosis)공법을 이용해서 복원한 최초의 사원으로 이 공법은 반티아이 쓰레이 사원의 성공적인 복원으로 효과를 인정 받아서 곧 다른 사원의 복원에도 이용될 예정인데 그 다음 사원은 바이욘이 될 것이라고 한다. 반티아이 쓰레이 사원이 이렇게 완벽하게 복원된 것이 앙코르 유적에 관한 뉴스중 NO,1은 아니다. 1923년에 프랑스인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가 이 반티아이 쓰레이 사원에서 유명한 조각품들을 도굴해 갔다가 프놈펜에서 잡혀서 도굴한 물건들을 반환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프랑스에서도 유명한 사건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앙드레 말로가 시간이 지나서 샤를 드골 대통령의 제위 시기에 문화부 장관이 된다.


반티아이 쓰레이 사원은 앙코르 유적의 중심부에서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는 사원이므로, 일정을 반티아이 쓰레이만 잡는 것은 시간의 낭비가 너무 크다. 그러므로 끄발 스피언이나 프놈 꿀렌, 반티아이 쌈레와 같이 일정을 묶는 것이 이동시간을 줄이는 방법이다. 이곳은 오전에는 사람이 많고 번잡하나, 점심시간에는 사람이 없고 조용하다. 그러나 점심시간에는 매우 매우 덥고 해가 강하다.

 

-조각과 부조들 (론리 p221지도 참고)

A) 라바나가 카일라 산을 흔드는 장면

남쪽 방향의 부조의 모습을 보면 팔이 20개이고 머리가 10개인 악마의 왕 라바나가 시바신과 파르바티가 살고 있는 카일라 산을 흔들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라바나는 원래 사람인데, 신에게는 죽지 않는다는 천명을 얻었다. 신에 의해 죽지 않는 라바나의 오만이 하늘을 찔러서 시바신에게까지 도전을 하게 되는데 그 장면을 나타낸 부조이다.맨 아래에 팔과 머리가 여러 개 달린 인물이 라바나이고, 꼭대기에 앉아 있는 인물이 시바신이다.  

그리고 시바신 옆에 꼭 붙어 있는 인물이 시바신의 아내 파르바티이다. 라바나가 산을 흔들자 주변에 있는 동물들이 놀라서 도망을 가고 있는 장면도 보인다.

B) 인드라신이 내리는 비

동쪽 벽 위에는 인드라신이 숲속에 비를 뿌리는 모습의 부조를 볼 수 있다. 인드라신은 머리가 세개 달린 꼬끼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있다. 인드라신 주위에 물결 모양으로 나타난 조각은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오른쪽 사진)

C) 까마와 시바

카일라산의 정상에 앉아 있는 시바에게 까마가 염주 같은 것을 주는 장면이다. 시바의 밑에는 사람들이 있다.

D) 크리슈나

크리슈나에게는 삼촌이 한명이 있는데 이 삼촌이 크리슈나가 어릴 때 크리슈나의 목숨을 노렸던 적이 있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크리슈나가 커서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던 삼촌인 깜사왕을 죽이고 머리를 잡고 있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반테아이 쓰레이(반띠 스레이, Banteay Srei)

앙코르의 북쪽 30km 지점에 위치한 가장 격조 높은 사원이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967~968년에 이 지역에 호족이며 왕의 스승이었던 야나바라하가 지은 사원으로 라테라이트와 적색 사암을 사용하여 앙코르 건축의 진수, 또는 '크메르 건축의 보석'으로 평가된다.

참배길에는 링가모형의 석주(石柱)가 서 있고, 사원 내에는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에서 발췌한 부조가 있고 북쪽 도서관에는 카일라산을 뒤흔드는 라바나, 남쪽 도서관에는 시바신의 부조가 있고, 중앙신전에는 동양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여신 데바타 상이 있다.

예술사적 측면에서 'Banteay Srei 유형'은 앙코르 이전기의 도시였던 '삼보르 양식'을 이어받아 건축양식이 부드럽고 우아함을 갖고 있다. 여신상의 모양도 유연하고 우아한 곡선미가 강조되면서 풍만한 여신상의 이미지에서 탈피하였다. 여신들은 배꼽을 두는 액세서리가 부착되고 치마의 주름에도 별도의 장식을 달아 화려한 모습을 주었다.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가 여신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밀반출하려다 체포된 것도 여신상의 아름다움에 반했기 때문이다.

1931~36년 프랑스 극동학원의 앙리 마르샬에 의해 아나스틸로시스 방식으로 복원되었다.


* 라바나(Rabana) : 링카에 거주하는 아수라의 왕. 머리는 열 개, 팔은 스무 개나 되며 신 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으나 인간에게는 죽는 운명을 갖고 있다. 그는 비슈누신의 화신 라마왕자에게 살해당한다.

* 데바,데바타 : 데바(Deva)는 남성의 신. 여신은 데바타(devata)라 한다. '빛나다'는 뜻을 가진 div에서 파생되었으며, 그리스어 deod, 라틴어 deus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힌두교에서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신을 3위일체의 신(trinity)이라 한다. 이들 신이 등장하면서 인드라, 바루나, 야마, 쿠베라 신은 인기가 하락하여 각각 동서남북을 지키는 수호신(로카팔라)으로 재편성되었다. 이러한 방위신의 개념은 불교에서 사천왕(四天王)으로 나탄난다.

* 아나스틸로시스(anastylosis) : 사원을 해체한 후 원래의 상태로 복원하는 방식. 네덜란드 고고학자에 의해 자바섬의 유적복원에 처음 도입된 후 프랑스 학자들이 Banteay Srei 사원 복원에 광범위하게 도입하였다.


▶ 반티아이 쌈레의 이해

 반티아이 쌈레는 앙코르 왓과 비슷한 시기에 건축된 사원으로 수리야바르만 2세가 건축하였다. 반티아이 쌈레는 수많은 앙코르의 유적 중에서 복원이 가장 잘 된 사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지난 20년간의 내전으로부터 약간 고립된 지역에 있는 사원이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인한 유적의 파괴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반티아이 쌈레 안으로 들어가면 해자를 볼 수 있는데 현재는 말라서 물은 없고 잔디만을 볼 수 있다. 해자를 지나면 두개의 도서관을 볼 수 있다.

반티아이 쌈레는 동 바라이에서 동쪽으로 400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반티아이 쓰레이나 끄발 쓰피언을 보고 오는 도중에 들려서 관람을 하는 것이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해자를 지나면 보이는 도서관은 좁고 긴 모양을 하고 있다. 도서관의 입구에 있는 조각에는 비슈뉴가 거대한 뱀 아난타(Ananta) 위에 팔을 괴고 누워서 있는 모습의 조각이 있는데, 비슈누의 배꼽에서 연꽃이 피어나고 있는데 브라흐마 신은 이 연꽃 속에서 태어난다.

중앙탑은 앙코르 왓의 중앙탑과 상당히 비슷하다. 앙코르 왓에서는 탑이 너무 크고 멀리 있어서 정확히 보지 못했다면 여기, 반티아이 쌈레에서 정확한 크메르 양식의 탑을 가까이 보아두는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반테아이 쌈레(반띠 삼레, Banteay Samre)

동바라이 남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수리야바르만 2세 때인 12세기에 지은 힌두사원이다. 삼레족은 프놈 쿨렌 산 밑에 거주하는 부족인데 크메르 왕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레 사원은 80x80m의 주벽과 네 개의 고푸라가 있고, 환호로 둘러쳐져 있고 중앙신전은 아니스틸로시스 공법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나가 난간이 아름답다. 건축은 앙코르 왓과 유사한 스타일이다.


* 고푸라(Gopura) : 탑이 있는 출입문.


▶ 룰루오스 유적의 이해

 

롤루우스는 9세기 초 앙코르 왕국이 건국된 후 앙코르 왕국의 초기 수도였던 곳이다. 씨엠리업에서는 약 15키로 미터 정도 동쪽으로 떨어져 있으며 이곳 롤루오스는 마치 앙코르 유적군처럼 이곳 저곳에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대표적으로 볼거리는 프레아코, 롤레이, 바콩등이 있으며, 이 중 바콩에는 다른 앙코르 유적처럼 메루산을 상징하는, 중심적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초대 앙코르 왕국시절부터 신격화된 왕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롤루오스는 단순히 롤루오스라고 부르기 보다는 룰로우스 유적군으로 부르는 것이 맞다. 대부분의 유적군은 9세기 후반에 이룩된 앙코르 초기시대에 건설된 사원이며 이 유적지의 세 사원들은 건축구조, 장식, 건축자재 및 방법 등의 특징이 서로 비슷하며, 크메르 예술이 찬란했던 시기의 초기적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802년에 자야바르만 2세가 도읍지를 쿨랜 산에 정하면서 앙코르 시대가 막을 열었는데, 이로부터 70년 쯤 후에 왕이 도읍지를 이 곳으로 옮기게 된다. 아마 농사가 잘 되어 식량 확보가 용이하고, 또 외적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좋은 위치였던 것이 이유였던 것 같다.

자야바르만 2세는 850년까지 이곳에서 도읍을 정했고 다음 왕도 905년까지 이곳에 머물다가, 다시 프놈 바켕으로 천도했다.

롤루오스 유적군의 건축물들은 주춧돌 위에 세운 높은 사각형의 벽돌 탑 형식으로 되어있다. 문은 동쪽으로 나 있으며 다른 3면은 가짜 문들로 되어 있는데, 이 시대의 전형적인 건축 특징은 탑은 벽돌로 짓고, 기둥, 상인방, 벽감 등은 사암으로 지은 것이다. 사원들을 둘러쌌던 성벽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롤루스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장식의 주제는 깔라(괴물의 머리), 가루다를 타고 있는 비쉬누신, 여성상과 많은 보석 장신구 그리고 위세가 당당한 수문장과 압사라 들이다. 기둥들은 보통 8각형이며 섬세한 나뭇잎의 복잡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역사가들은 평하기를 롤루오스 유적군에 있는 사원들의 조각이 크메르 조각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라고 한다.


- 쁘리아 꼬 (Preah Ko)

쁘리아 꼬는 인드라바르만 1세에 의해서 9세기 후반에 건축되었다.

6개의 탑이 두줄로 위치하고 있는데 사암과 회반죽으로 장식이 되었으며, 앞줄의 탑의 중간의 탑은 다른 탑들에 비해서 크기가 상당히 크다. 이 탑에는 고대 힌두교에서 사용했었던 산스크리트어로 씌여진 복잡한 비문이 문설주에 씌여져 있다.

프레아 꼬는 '성스러운 소'라는 뜻으로, 시바신이 타고 다니는 성스러운 흰소인 난디 세마리를 앞줄에 세웠는데 이 조각들은 모두 보존 상태가 나쁜 편이다. 쁘리아 코는 인드라바르만 1세가 그의 조상들에게 헌정하는 사원으로서 첫번째 줄의 탑은 남자조상 혹은 남신을 상징하고 두번째 줄의 탑은 여자조상 혹은 여신을 상징한다.

동쪽에 있는 메인 입구를 지나서 입구탑을 지나면 3마리의 사자가 있는데 이 사자는 사원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쁘리아 코의 중앙사원은 사각형의 건물위에 사방으로 현관이 나 있다. 중앙 사원에 있는 6개의 탑에는 모두 회반죽을 발랐으며, 문틀은 4개의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다.


- 바콩 (Bakong)

바콩은 인드라바르만 1세가 시바에게 헌정한 사원으로 메루산을 형상화 하였으며, 룰루오스 유적군에 속한 사원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흥미로운 건축물로서, 룰루오스 유적군에서 가장 중앙에 위치하는 사원이다.

바콩은 사암으로 건축되었고 5층을 가진 피라미드형의 건축물이다. 기초는 60m의 사각형이고 왼쪽 측면에서 바라보면 벽돌과 사암으로 건축된 8개의 탑과 중요한 볼거리가 없는 기타 다른 성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8개의 탑은 회반죽을 바르고 그 위에 조각을 하였다.

이 복잡한 건축물은 넓은 해자를 포함한 세개의 중심이 같은 벽으로 둘러 쌓여 있다.

첫번째 벽은 가로 900m, 세로 700m의 커다란 해자가 있었고, 사면에는 나가의 몸으로 된 난간이 있었다. 두번째 벽은 사암과 라테라이트로 만들어진 입구탑이 4면의 중앙에 건축되어 있다. 북동쪽과 남동쪽 꼭대기 부분에는 벽돌로 건축된 사각형의 건축물이 있는데 이곳은 서쪽으로 입구가 나있고 굴뚝이 만들어져 있다. 바닥에 구멍이 여러 개가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건축물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서쪽으로 나있는 문과 굴뚝으로 보아 화장터로 쓰였던 곳으로 추정된다.

동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들어가서 마지막 벽까지 지나면 양쪽에 한 개씩의 도서관을 볼 수 있다. 도서관에서 정문쪽을 바라보면 시바신이 타고 다니는 성스러운 흰소인 난디도 볼 수 있다. 중앙 사원의 1층부터 3층까지의 각 코너에는 코끼리상이 조각되어 있고 4층에는 12개의 사리(stupa)탑이 있고, 중앙 성소인 5층은 나중에 더해진 것으로 띠 모양의 장식을 한 기초로 둘러 쌓여 있다.


- 롤레이 (Lolei)

롤레이는 야소바르만 1세(889-910)가 건축한 것으로 롤레이 유적의 벽돌로 만든 4개의 탑은 쁘리아 꼬와 거의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쁘리아 꼬보다는 모양과 질이 조금 떨어진다.) 롤레이는 현재에는 논으로 사용되고 있는, 예전에 커다란 저수지 안에 건축이 되어 있었다.

롤레이는 앙코르 유적의 초기 건축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원으로 유명하며, 문설주에는 아직도 산스트리트어로 씌여진 비문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산스크리트어 비문중 하나에 의하면 4개의 탑은 야소바르만 1세가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외조부모에게 각각 1개씩 헌정한 것이라고 한다.

 


■ 기타 안내 글들

크메르왕국의 비밀󰡐���앙코르와트󰡑���

  

 캄보디아 앙코르지역에는 600여년(790~1432) 동안 캄보디아 전역은 물론 현재의 베트남, 라오스, 태국까지 지배했던 강력한 크메르 왕국이 있었다. 9~12세기 크메르 왕국에서는 눈이 휘둥그래질 만한 힌두교 사원들이 잇달아 세워졌다. 이곳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나가(뱀), 가루다(불멸의 새), 압살라(천녀) 등 힌두의 신들 곁에 불상, 연꽃 등 불교의 상징물들이 조화롭게 자리잡았다. 크메르 왕국에서 왕은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되었고, 󰡐���신왕󰡑���이 죽으면 그 본존을 모셨던 사원은 능이 됐다. 사람들은 앙코르 사원의 한 벽면에 시를 적었다. 󰡐���왕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궁전을 안고 있는 이 도시와 결혼해 우주를 창조했다󰡑���고.

 고대 크메르 왕국 우주관의 완벽한 축소판인 앙코르 유적을 찾아가는 길. 하늘에서 내려다본 캄보디아는 아름다웠다. 푸른 들판 여기저기에 강과 호수가 박혀있는 풍경. 그 한가운데 거대한 󰡐���톤레사프󰡑��� 호수가 있다. 우기에는 서울시 면적의 4배에 이른다는 동양 최대의 담수호. 톤레사프호를 빠져나간 톤레사프강 물줄기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비옥한 평원을 흘러내려 메콩강과 합류한다. 앙코르에서 60㎞나 떨어진 글루운산의 사암은 이 톤레사프 호수와 지류의 운하를 통해 운반됐다.

톤레사프 근처에 있는 시엠레아프 공항은 앙코르의 관문. 컴퓨터 한대 없는 공항서 비자를 받고 평화로운 시골길을 달린다. 좌우의 밀림에는 앙코르 사원을 본뜬 대형호텔들의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크메르 루즈, 킬링필드, 시아누크…. 혼란과 잔혹상만 연상되는 캄보디아 땅에 정치가 안정되면서 관광수입을 늘리기 위한 개발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이다.

정글 사이로 잘 닦여진 길을 따라 30분쯤 달리면 거대한 석조 신전인 앙코르와트가 장엄하고 우아한 모습을 드러낸다.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제국의 왕궁이었던 앙코르톰, 세계 최대 규모의 바이욘탑을 중심으로 5,000여개의 석상과 조각, 100여개의 크고 작은 사원들이 늘어서 있는 방대한 앙코르 유적 가운데 가장 손꼽히는 걸작품이다.

12세기 초 수리아바르만 2세가 2만5천명의 인력을 동원해 30여년만에 완성한 사원으로 둘레가 6㎞에 달한다. 담 바깥으로는 폭 100m의 거대한 해자(인공수로)가 4면을 둘러싸고 있어 흡사 사원이 물 위에 떠있는 듯하다.

사원 안 벽면에 정교하게 새겨진 부조는 왕국의 역사를 그린 서사시. 마치 한편의 두루마리 그림처럼 전쟁 장면이나 힌두신화 등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가장 눈길을 끄는 조각품은 춤추는 여인상인 압사라. 앙코르 유적 어디서나 만나는 터질듯한 가슴, 도톰한 입술, 잘록한 허리, 비칠듯 말듯한 옷맵시의 압사라는 육감적이다.

앙코르와트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 한때 인구가 1백만명으로 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도시국가였던 크메르 왕국은 밀림 속에 건축물만 남겨둔 채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렇게 큰 돌을 어떻게 가져왔을까. 모든 벽과 기둥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들은 정말 사람의 작품일까. 현대과학으로 이 어마어마한 유적의 신비를 벗겨낼 수 없었다. 사원 벽화에 새겨진 산스크리트어로 그 역사를 짐작만 할 뿐이다. 학자들은 이웃나라 태국을 지배한 샴족에 의해 멸망했다고 추정하지만 주민들은 문둥병이 왕국을 휩쓸어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앙코르 유적은 왕국이 멸망한 지 430년이 지난 1861년 프랑스의 탐험가 앙리 무어에 의해 비로소 서방세계에 알려졌다.

앙코르와트와 마주선 앙코르톰은 고대 크메르 왕조의 마시막 도성. 자야바르만 7세때 지어졌다. 앙코르톰의 중앙에 위치한 바이욘(불교사원)에는 사면불안탑(四面佛顔塔)이 늘어서 있다. 깊은 명상과 자비를 암시하는 관세음보살의 온화한 표정은 󰡐���바이욘의 미소󰡑���로 불린다.

바이욘 사원에서 승리의 문을 나서 프레야칸 사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코끼리 테라스󰡑���가 있다. 350m 길이의 옹벽에는 다양한 코끼리 신과 독수리 신의 부조가 있다. 프레야칸은 자야바르만 왕이 살던 궁전. 수많은 석실의 공간이 벽을 사이로 한 채 끝없이 이어졌으나 옆길은 모두 무너졌다.

신비한 앙코르 유적은 오랜 세월 약탈과 도굴로 얼룩졌다. 크메르 왕국의 후예들이 내전을 겪던 1970~80년대에는 더욱 많은 보석과 조각상들이 탈취당했다. 군인들은 탑과 조각을 사격연습의 표적으로 삼기도 했다. 지금은 유네스코가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곳곳에서 복원작업을 벌이고 있다. 멀리서 보면 웅장하고 가까이서 보면 빈틈없이 정교한 앙코르 유적. 그것은 인간이 최고의 신기(神技)를 부려 창조해낸 현란하고 황홀한 예술작품이다.


-거대한 호수위 떠돌이 수상가옥 4,000여채…동양최대 톤레사프호 어민들-


캄보디아에서 가장 큰 톤레사프호는 천의 얼굴을 하고 있다. 계절에 따라 모습이 바뀌기 때문이다. 건기에 톤레사프호 물은 수량이 줄어드는 메콩강으로 빠져나가 호수가 작아진다.

우기에는 범람한 메콩강 물이 톤레사프호로 밀려 올라오면서 거대한 호수가 된다.

이곳에서 잡히는 물고기는 캄보디아 전체 어획량의 약 50%에 달한다. 또 배편으로 시엠레아프를 찾는 사람들이 꼭 거쳐야 하는 수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톤레사프호 어민들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생활방식으로 살아간다. 배위에 집을 얹은 떠돌이 수상가옥에서 거주한다. 떠돌이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대략 4,000여가구에 2만명 정도. 이들은 아시아 최빈국으로 꼽히는 캄보디아 국민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하게 살고 있다.

사람들은 생필품을 구하러 굳이 뭍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잡은 고기를 뭍에서 온 중간상인에게 팔고 필요한 물품은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수상가게󰡑���를 이용한다. 슈퍼, 주유소는 물론이고 배터리 충전소, 경찰서, 병원, 심지어 학교까지 있다.

호수의 수질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쁘다. 대․소변 등과 같은 오물을 그대로 호수로 흘러보낸다. 또 생선을 다듬고 남은 내장 등도 그대로 호수에 내다버린다. 오물투성이인 물로 요리를 하고 어린이들은 물놀이를 즐긴다. 사시사철 수인성 전염병이 끊이지 않지만 병에 걸리고 안 걸리고는 신의 섭리에 맡기고 살아간다.


캄보디아 이해를 위한 글들 ◎


앙코르와트의 눈물  [글 : 푸 키아. 일본 교도통신 프놈펜 특파원]  

이 글은 2003년 7월 12일에 발행된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한겨레신문사)에서 인용한 글이다. 원본글은 2001년 5월 29일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제361호에 실렸던 것인데, 책을 내면서 글을 약간 손질한 것으로 판단된다. 푸 키아(Puy Kea)씨는 캄보디아 내전 중 일본 공산당이 발행하는 일간신문 아카하타(Akahata) 프놈펜 지국 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 일본 [교도통신] 프놈펜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다. (운영자 주)


 세계적으로 유명한 캄보디아 고대유적과 문화는 모조리 파괴되고 말았다. 그 찬란했던 조각들도, 웅장했던 사원들도 모두 깨지고 팔려나갔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는 유물 도난과 불법 거래는 캄보디아 사회를 파괴시켜 가고 있는 주범 가운데 하나다.

언제부터 캄보디아 유물과 유적들이 도굴당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학자들 사이에는 1863년 프랑스 식민통치자들로부터라는 데 이견이 없다. 그동안 도굴 현장을 찾아다녔던 문화예술부 차관 미첼 트라넷은 거리낌없이 말해왔다. "유물 도난은 역사를 있는 자리에서 보지 못하고 어떻게든 자기 방에 옮겨놓고 자랑삼아야 적성이 풀리는 서양인들의 감상태도와 동시에 자신들의 역사를 돌보지 않는 부패판 캄보디아 정치가들이 공모한 결과다." '자리' 같은 데 연연하지 않는다는 미첼은 정부를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돈에 눈 먼 시민들만 탓해서는 도굴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정부가 역사관을 갖고 심각하게 이 사안에 매달려야 한다." 훈센 총리도 '유물 카드'를 빼들고 국내외에 핏대를 올린 바 있다.

"유물 도난은 부자 나라들의 조직적인 횡포다. 해당국들은 불법 도굴과 판매를 법으로 금지하고 강탈해간 유물들을 반환해야 한다." 2001년 3월, 60여 나라 대표들이 참석한 프놈펜 유네스코회의에서 훈센 총리가 강조했지만, 돈 많고 힘센 국제사회로부터 냉담한 반응만 얻었다. 나라 안에서도 별 신통한 소리를 듣지 못했다. 시민들 가운데 누구도 정부가 진정으로 도둑맞은 유물들에 대한 반환과 복구를 위해 노력해 왔다고 믿는 이들이 없었던 탓이다.

 

사진 / 훼손된 앙코르 유적. 캄보디아 유물․유적은 프랑스 식민통치 기간보다 오히려 1970년대에 조직적 대량파괴를 당했다.


2000년 6월 추안 리크파이 타이 총리가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도 훈센 총리는 도난 유물 건을 상정해서 반환협정을 끌어냈다. 그러나 아무것도 되돌아온 게 없다. 여기서 캄보디아의 유적 파괴와 유물 도난의 특징이 하나 드러난다. 전통적으로 이 악습에는 인접국 타이가 '중개상' 노릇을 해왔다는 점이다.

'리버시티'로 알려진 방콕 골동품 가게들이 거래하는 유물 수십만 점이 캄보디아산 불법 도굴품이라는 사실을 알 만한 이들은 모두 알고 있다. 타이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는 일이라고 국제사회가 믿어왔다. 실제로 두 번에 걸쳐 캄보디아 당국이 타이로 향하던 불법 도굴품을 압수한 결과, 압사라상과 가루다상 같은 귀중한 유물들이 20톤도 넘게 쏟아져 나와 당국을 경악케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 타이 당국이 반환한 유물은 지난 1996년과 1997년 국경 부근 반테이 츠마르 사원에서 무장조직이 강탈해갔던 유물 가운데 122점이 전부다.

"타이 당국이 얼마든지 캄보디아 유물 도굴과 유통을 막을 수 있는데 실현된 적이 없다. 돈이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도, 타이도 모두 돈이 문제다." 이래서 미첼은 인접국이 지닌 상호 협력과 공존이라는 대의명분을 매우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현재 캄보디아 현실을 놓고 보면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도난품들에 대한 역사적 자료나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정부도, 시민들도 불법 도굴과 불법 유통으로 사라진 유물들에 대한 반환 의지를 높이고는 있지만, 정작 그 유물들을 조사할 만한 사업자금이 없다는 게 또 다른 문제다. 이러다 보니, 캄보디아 정부는 예산을 쥐고 흔드는 일본에 유물 복구와 조사 사업까지 모두 맡겨버린 상태다. 도난 유물 명단을 만들어야 하는데, 뜻있는 시민들 사이에서는 과연 이런 일을 일본에 맡겨놓는 게 옳은지를 놓고 말들이 많다. 2차대전을 전후해 아시아 유물들을 훔쳐간 일본에 대한 불신감 때문이다.

 

 사진 / 되찾은 유물들


아무튼 30년 내전을 치르고 난 캄보디아에 남은 것은 폐허뿐이다. 1,200만 인구 가운데 36%가 극빈에 허덕이는 판에 하루 종일 사회복구와 경제개발 구호만 난무한다. 정부 예산을 모조리 원조에 기댄 실정이니 별로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하나 있다면, 앙코르와트를 내세운 관광산업 정도를 캄보디아 자손심으로 떠올려볼 만할까?

최근 캄보디아를 방문한 고촉통 싱가포르 총리도 눈치를 챘는지,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캄보디아가 중공업 개발로 경쟁하겠다는 건 불가능하다. 관광산업에 초점을 맞춰라."

그렇잖아도 캄보디아 시민들은 앙코르와트를 비롯해 전국에 산재한 1,080개 유적지들을 찾아와 연간 1억 2천만 달러를 뿌리고 가는 50만여 명의 외국 관광객을 자랑스럽게 여겨 왔다. 그래서 시민들은 지금처럼 유물들이 계속 도굴되고 팔려나간다면 캄보디아에 미래가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캄보디아가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유적 훼손과 도굴을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민들 생각과 달리 현실은 만만찮다. 최근까지도 앙코르와트를 찾는 관광객들이 알게 모르게 현지로부터 예술품 조각들을 구입해 가고, '러시안 마켓'으로 잘 알려져 있는 프놈펜 중심가 투올톰퐁 시장에만도 115개에 이르는 골동품 판매상들이 버젓이 유물들을 팔고 있다. 왕궁 근처에 자리잡은 약 30여 개 골동품 가게들도 관광객을 유혹해 왔고.

"20년 미만인 것들만 팔고 있다." 투올톰퐁 시장 골동품 가게 주인의 말을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문화예술부 법령을 보면 "70년 미만인 조각품들은 팔아도 된다"고 명시해 놓았지만, 이 역시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70년 된 것인지 100년 된 것인지를 구분해낼 혜안을 갖춘 전문가가 몇이나 되겠는가?

 유물반환운동? 오늘도 팔아먹기에 정신 나간 사람들과 어떻게든 손에 넣겠다고 몸살 앓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유물반환운동이란 말은 그저 좀 고상하게 들리는 구호일 뿐이다. 자본가들이 과연 캄보디아로부터 유물 획득 욕망을 멈출 수 있을까? 강대국들은 강탈해 간 캄보디아 유물을 반환할 것인가? 캄보디아 정부가 진정으로 유물 반환을 요구할 수 있을까? 또, 먹고살겠다는 캄보디아 시민들은 도굴 유혹으로부터 손을 끊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캄보디아 땅에선 이런 의문만 나돌 뿐, 아무런 대꾸도 없다.

앙코르와트가 캄보디아만의 유적이 아니라, 인류의 유산이라는 사실을 국제사회가 깨닫는 일이, 그래서 도굴과 판매에서 손떼는 일이 결국 캄보디아 유적과 시민을 동시에 살리는 길이다.

 

▣ 운영자 주(註) : 2001.5.29에 쓴 원본 글에는 다음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나, 여기서 인용한 책에는 빠져있다. 참고하기 바란다.

『역사학자 이브 찬 같은 이들은 캄보디아 유적․유물의 파괴가 프랑스의 식민통치 기간보다는 오히려 1970년대부터 조직적인 대량파괴를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70년대 초 론놀 정권을 지원했던 미국의 대캄보디아 융단폭격으로 수많은 유적들이 파괴당했다." 이브 찬은 특히 미국 정부의 책임론을 강조했다. 그는 종교를 부정했던 폴포트 정권도 일부 불교유적들에 손상을 입혔고, 1979년 이후에는 훈센 총리를 지원해온 베트남을 비롯해 수많은 외국인들이 조직적으로 도굴을 감행했던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원조'의 하수구가 될 것인가?  [글 : 푸 키아. 일본 교도통신 프놈펜 특파원] 

이 글 역시 푸 키아씨의 글이다. 출처는 시사주간지 '한겨레21' 2001년 8월 14일 제372호이다. 아래 내용은 얼핏 보면 앙코르 유적과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캄보디아는 거의 모든 면에서 원조와 무관하지 않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인용하기로 한다. (운영자 주)


오랜 내전을 거치며 황폐해진 땅, 서투른 운영과 터무니없는 관리체계로 엉망진창이 된 사회, 게다가 연중 행사처럼 벌어지는 홍수에다 지독한 부패…. 이래서 캄보디아 경제는 없다. 만약, 사회복구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일본의 원조를 제외한다면.

"일본의 지원은 캄보디아 경제의 숨통, 그 자체다." 캄보디아 사회 전 부문에 걸쳐 막대한 지원을 하고 있는 일본을 놓고 경제재무부 차관 항 추안 나론이 직설적으로 내뱉은 말이다. 일본의 원조로 캄보디아는 숨을 쉬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의 원조를 빌미로 삼고, 일본 원조금을 보증으로 삼아 캄보디아 정부는 다른 해외자본을 유치하고 무역을 하며 재정수익을 올리고 있는 현실이니, 틀린 말도 아니다. 캄보디아는 연간 약 5억달러의 해외원조로 버티는 사회인데, 이 가운데 일본이 혼자서 5분의 1을 지원하고 있다. 이쯤되니, 캄보디아 주재 일본대사 오타로 오가와가 "일본의 개발원조자금은 캄보디아의 항구적이고 포괄적인 개발에 기여하고 있다"며 뿌듯해하는 걸 아무도 탓할 수 없다.

1991년부터 따져보니, 일본이 제3세계 개발원조자금(ODA)을 통해 캄보디아를 지원한 총액(다국간지원계획 포함)이 7억 3천만 달러를 넘는다. 그래서 일본을 향한 시민들의 고마움은 가히 무조건적이다. "장담하건대 일본의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길도 다리도 없었을 것이다." 프놈펜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멩 보파 라스(39)의 흥분처럼.

실제로 일본은 8천만달러를 들여 톤레사프와 메콩강에 신식 다리를 놓았고, 수백만달러를 투입해서 길을 보수해왔다. 곳곳에 일본마크가 새겨진 병원을 짓고 부두와 상수도와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다. "일본의 지원은 캄보디아의 동맥이 될 사회기반시설에 집중되고 있어 매우 긍정적이다." 굳이 캄보디아 평화협력연구소의 카오 킴 호른 소장이 말하지 않더라도 곳곳에 나붙은 일본 프로젝트를 보노라면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야당 정치인 삼 라인시 같은 이들은 완전한 조건이 성숙되기 전에 돈부터 풀고 보는 일본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일본은 돈이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캄보디아에서…." 전직 재무장관이었던 그의 독설은 이어졌다. "일본은 그 자신이 돈의 노예다. 여기에 말려들어 캄보디아가 원조의 하수구가 될 수는 없다."

삼 라인시는 세금을 내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돈이 어떻게 낭비되고 있는지를 눈여겨보는 것이 원조에 대한 자부심보다 더 중요한 시민의 의무라고 덧붙였다. 그는 올 6월 도쿄의 국제원조자회의에서도 쌍심지를 켰다. "국제사회의 대캄보디아 지원은 비효율적인 정책을 지닌 부패한 정부에 감시체계 없이 던져진 꼴로 원조가 오히려 캄보디아의 자연과 자원을 바닥내버린 실정이다. 원조금은 비생산적인 분야에 일관성 없이 투입되면서 모조리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하지만 삼 라인시의 소리에 귀기울여 주는 이들은 별로 없다. 캄보디아에서도 일본에서도, 세상 어디에서도. 현실 속에서 일본, 시민들 사이에서 일본, 그 일본은 누가 뭐라고 떠들어대든 분명히 굉장한 이름이다. 앙코르와트보다도 더 자주 시민들의 대화에 오르내리는 걸 보면.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과거의 일본을 뒤적거려 그 물주의 심장을 상하게 할 만한 용기가 캄보디아에는 없다는 뜻일까. 일본의 교과서가 어떻게 돌아가든, 캄보디아에서는 역사 같은 무형적인 가치보다는 단 한푼의 유형적인 현찰이 중요하다는 뜻일까.

캄보디아에 일본은 있지만, 캄보디아는 없다. <한겨레21>이 던진 화두인 "일본은 무엇인가"를 대답하기 전에 "캄보디아는 무엇인가"를 대답할 자신도 근거도 없다는 게 정직한 나의 고민이었다.

(LAST UPDATE: 2003.11.24 - 19:11)


※ 캄보디아 관련 국내 도서 


 [Hello 태국북부, 캄보디아, 라오스]는 김영사의 헬로우 시리즈 중 하나로 그동안 국내에서 캄보디아 여행 정보를 다루고 있는 유일한 책이었다. 최근 2003년 7월, 제2판이 출간되어 그동안 구정보를 담고 있던 것을 개정하여 최근의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전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다루고 있는 내용은 프놈펜, 씨엠립(앙코르 유적), 씨하눅빌에 한정되어 있다. 특히 앙코르유적에 대한 설명은 단편적이어서 많은 도움은 되지 않는다. 물론 캄보디아 프놈펜, 씨엠립, 씨하눅빌 등에 한정하여 여행할 예정이라면 참고할 가치는 충분히있다. 이 책의 저자는 안민기, 홍원겸, 이현숙이며 제1판은 2000년 10월 25일에 출판되었다. 제2판 개정판은 2003년 7월 30일에 발행되었다. 가격은 12,900원이다.


 [Justgo 태국.앙코르와트]는 일본 지쓰교노니혼샤의 책을 번역하여 시공사에서 펴낸 것이다. 이 책의 80~90%는 태국을 다룬 것이며, 캄보디아에 대한 분량은 아주 적은 편이다. 특히 앙코르 유적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는 결과 씨엠립을 제외한 프놈펜, 씨하눅빌 등의 정보는 전혀 없다. 아울러 배낭 여행자를 위한 정보제공이 주목적이 아니며 약간 고급 여행자를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 같다. 다만 앙코르 유적에 대한 설명은 다른 책에 비하면 참고할 만하다. 앙코르왓과 앙코르톰에 대한 설명이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게 되어있다. 이 책은 2002년 11월 27일에 초판이 발행되었으며, 가격은 13,000원이다. 그리고 [베트남.앙코르와트]도 출판되었는데, 앙코르와트 관련 내용은 위와 동일하다.


 

 ★(추천) [신화가 만든 문명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유적 중 앙코르와트(왓)에 대한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풀어낸 인문학 서적이다. 앙코르 왕조의 역사, 종교,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며, 앙코르 왕조의 탄생과 더불어 형성된 힌두 사상과 그 상징체계, 건축양식을 전문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책 내용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장 앙코르 문명, 제2장 앙코르 문명과 힌두 신화, 제3장 앙코르 시대로의 시간여행(주달관의 진랍풍토기), 제4장 앙코르 와트 상징해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서규석이며 2003년 1월 20일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출판사는 리북이며, 가격은 13,000원이다.

 

 [앙코르 : 장엄한 성벽도시]는 시공사 디스커버리 총서 중 하나로서, 보뤼노 다강의 원작을 이종인이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앙코르 유적이 폐허 속에 묻혀 있다가 어떻게 발견되고 복원되었는지 그 과정을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뒷부분 '기록과 증언'에서는 앙코르를 방문하고 해석하고 재구성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앙코르의 전모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캄보디아를 식민지화했던 프랑스가 앙코르 유적을 발굴하면서 반출을 자행했던 비문화적인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 이 책의 최근판은 1999년 12월 발행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꾸준히 계속 발행되고 있다. 가격은 7,000원이다. 앙코르 유적의 발견 및 복원 과정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유용할 것이다.


 [앙코르 기행]은 한 디자이너의 눈으로 담아낸 사진 기행집이다. 저자가 땀 흘리며 찍은 사진들은 앙코르 유적의 웅장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거리에서 만난 캄보디아인들의 모습은 과거 한국 전쟁후의 우리나라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다만 이 책은 개인 사진 기행집인 까닭에 앙코르왓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은 수록되어 있지는 않다. 실제로 캄보디아를 여행하면서 멋진 사진을 찍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이 책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심인보이며, 2002년 7월에 도서출판 새로운사람들에서 초판이 발행되었다. 가격은 18,000원이다.


 [뭉그니의 배낭여행 따라하기 :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편]은 이 책의 저자가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등을 배낭여행한 과정을 일기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여행서이다. 다분희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며, 일반적인 여행 책자와는 약간 거리가 멀다.  따라서 캄보디아에 대한 전문적인 여행 정보를 얻고자 하는 목적보다는 간접 경험에 유용할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적으로 제2권은 인도와 네팔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강문근이며 2002년 7월에 최초 발행되었다. 책 분량은 318페이지 정도이며, 시공사에서 발행되었다. 가격은 9,000원이다.


 ★(추천) [한 권에 담은 동남아시아 역사]는 동남아시아 역사 전체를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개별적인 국가별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별로 되어 있다. 따라서 동남아시아에 대한 역사를 전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할 경우 유용하다고 판단된다. 이 책의 저자인 밀턴 오스본(1936-현재)은 호주의 시드니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후 1959-61년까지 프놈펜 주재 호주대사관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전형적인 백호주의 국가인 호주에서 우월적인 시각인 아닌 입장으로 동남아시아 관련 역사책을 썼다는 것이 놀랍기까지 하다. 이 책은 도서출판 오름에서 2000년 3월에 초판 발행, 2003년 1월에 재판을 발행했다. 가격은 13,000원이다.


[(고대 문명 시리즈 04) 앙코르 : 장엄한 크메르 문명] 저자 : 마릴리아 알바네스/

번역 : 손원재 / 출판사,출판일 : 생각의나무, 2003년 11월 / 가격 : 95,000원

이 책의 첫 장은 크메르 왕국의 역사적 기본 사실을 서술하고, 다음으로 인도의 영향을 받은 궁전 건축에서 시작하여 벼를 가꾸는 일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크메르 문화의 다양한 면을 탐구한다. 또한 수리 시설 관리의 중심에 서서 백성의 생존을 보장하는 한편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군주가 지배했던 크메르 왕국의 기본 종교 개념과, 가장 중요시하는 신화 및 사회 구조를 분석하였다. 또한 국민의 일상 생활과 주택, 관습, 전통 및 가장 중요한 축하 행사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개자이고 물의 군주이며 종족의 운명을 짊어진 통치자의 강력한 존재에 지배받던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한다. 신적 존재로 받들어지던 크메르왕은 국고로 장엄한 천상의 거처를 만들도록 하여 예술과 종교에 대한 숭배 도구로 종속시켰고, 이런 지나친 토목 공사가 결국 앙코르 문명의 몰락 원인이 되었다. 이 책의 세 번째 부분에서는 이런 독창적이고 매혹적이며 수려한 예술 작품 중 최고의 유적들을 재현해 놓았으며 캄보디아와 이웃 국가들의 수많은 고고학적 여행 코스를 설명한다.

[ 저자 소개 ] 저자 : 마릴리아 알바네스(Marilia Albanese)

1976년 밀라노의 가톨릭 대학교 고전문학과에서 산스크리트어와 인도학을 공부했으며, 힌두교 및 인도문화 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재 이탈리아의 아프리카/동양 연구소장과 밀라노 소재 동양문화언어 시민학원의 교육 조정관으로 재직하고 있다. 인도학 교수로서 교황청 우르바니아나 대학교(Pontificia Universita Urbaniana)와 제휴관계를 맺고 있는 몬자(Monza) 소재 국제 신학원에서 힌두교와 불교 세계에 관한 기본 과제를 강의하고 있다. 1970년대 말 이후부터 여러 곳의 요가 교사훈련소에서 인도 문화를 가르치고 있으며, 인도 문화에 관한 여러 저서를 출판한 바 있다. 그는 인도 예술과 그 심오한 경지에 대한 지식을 더욱 심화하기 위해 1990년대 이후부터 인도차이나 지역, 그 중에서도 특히 캄보디아를 여행하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서 그는 힌두교의 상징주의와 관련하여 크메르 문명을 연구하게 되었다.

저서로는『잃어버린 문명, 그 장엄함에 관하여』(1998), 『위대한 보물: 고대 이집트에서 20세기까지의 금세공 예술』(1999) 및『영원이 머무는 곳』(2000) 등이 있다. 또한 『북부 인도: 고대 유적으로의 안내』(1999)와『고대 인도: 문명의 기원에서 13세기까지』(2001)등을 화이트스타 출판사에서 출간한 바 있다.



▶ 기타 정보는 각자 관련 서적을 구입하여 학습하십시오.

출처 : [가족 & 친구여행]
글쓴이 : Tour Sta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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