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o Yong Pil/YPC history

[제1집창밖의 여자/단발머리]‘한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

작은천국 2007. 1. 23. 17:54
 

 

 

 

[한때 그가 사는 아파트 주민들이 환경권을 주장한 일이 있을 만큼 그에게 열광하는 팬들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조용필의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사로잡았을까? 조용필. 당대의 가객 몇 십 년 후, 아니 그 후에까지도 이 시대의 ‘시용향악보’를 펼칠 때 그 첫머리에 들사람]

‘숨은 노래 찾기’ 본문에서 (저자 : 주철환 현 이화여대교수)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사로잡았을까? 아니 그들이 사로잡힌 이유가 무엇일까?
1980년 이전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중음악 환경이라고 할 때  무엇이 그 배경이 되었을까? 좋은  음악이 없었는가, 아니면 받아들일 준비가 대중들에게 없었던 것인가.
70년대 중반 세상에 있었다면 송대관의 ‘해뜰날’을 기억하고 한번쯤은 흥얼거렸던 노래였다. 즉 당시 유행하는 가요였다. 그러나 그 음반의 판매량은 2만장에 불과했다.  
한국대중음악사에 있어서 과거 대마초파동을 거론할 때 가장 큰 피해자는 신중현 개인이 아니라 대중음악 전체적인 퇴보라는 평가가 정확할 것이다. 파동이전 트로트 음악 일색이었던 상황에서 포크음악과 그룹사운드 등장에 의해 변화가 왔고, 청년문화가 자리했는데 갑자기 제정된 ‘대마관리법’에 의해 약 20명이 구속되고 11명이 불구속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구속여부를 떠나 음악활동금지 처분을 내렸는데, 당시 가수 일부를 거론해보면 대중음악사에 얼마나 큰 공백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신중현, 이장희, 윤형주, 김추자, 김세환, 김정호, 김도향, 하남석, 이동원, 채은옥, 그리고 조용필.
또한 유신은 ‘가요재심사’를 통해 엉뚱한 기준으로 적지 않은 금지곡들을 탄생시켰다. 두 큰 규제가 1975년에 시작되었다.
물론 신중현은 타 가수들에 비해 처벌강도가 강했다. 하지만 혼자 피해자라고 큰소리 낼수록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대중들이 더 억울해 할 일이다. 그리고 조용필의 인기는 최고정상에 오른 시점이었다. 조용필의 말처럼 “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너무 짧아요’ 노래처럼 되었다”

대마초파동이후 다시 트로트음악 일색으로 전환되었다. 더군다나 이미자. 나훈아. 남진. 패티김도 이미 개인적인 사유로 일선에서 후퇴 한 상황이었다.
당시 대마초파동을 겪지 않고 승승장구한 가수가 과거 조용필과 ‘히식스’ 보컬경합에서 허스키한 음색 탓에 매인보컬과의 조화가 되어 선택되어졌다는 최헌이었다. 79년 4월 17일자 한국일보에 의하면 최헌의 ‘오동잎’은 5만장이라는 판매고를 기록하였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10만장을 돌파했다. 라는 기사가 있다.
10만장이라면 경이로운 기록으로 받아들여졌던 대중음악 환경이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대중들이 받아들일 무엇이 없었는가, 아니면 정서부재로도 단정하지 못한다면, 경제적인 가난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80년 이전 우리나라에 팬클럽은 존재했다. 외국가수들의 팬클럽이다. 또한 오빠부대가 결성되지는 않았지만 그 시초를 보였던 것은 1969년 ‘클리퍼 리처드 내한공연’ 과 1980년 ‘레이프 가렛 내한공연’ 때 여학생 중심의 관객들이 이화여대 강당과 숭의 음악당에 몰려 소리 지르고 환호했다는 기록도 있다.

청명하다고 할 수 있는 맑은 가슴일지라도 무언가 채울 수 없다면 유리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유리가 아무리 깨끗하고 맑아도 유리를 통해 보이는 사물이 없다면, 차갑게만 느껴져 오래 버티지 못하고  쨍하고 금이 가버릴 것 같은 메마름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넓고 넓은 세상이지만 무엇 하나도 함께 하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는 그런 공간에서 유리 같은 가슴을 지녔던 이들에게 ‘오빠’하고 뜨겁게 소리 지르고 환호하며 함께 묶어주는 일이 1980년도에 이르러 생긴 것이다. 즉 우리나라에도 스타다운 스타가 처음으로 탄생한 것이다.

필자는 ‘창밖의 여자’를 흘려들었을 뿐 모르고 지냈다. ‘단발머리’ 전주 음을 들으면 오락실 생각이 났다. 즉 1집 음반에 대한 이해는 세월이 지난 후 해 본 것이다.
하지만, 1집 활동을 할 때 여기저기서 ‘소름 끼친다’ ‘창을 익혔나’ ‘득음한 것인가’ 등의 놀라움을 주변 어른들에게 듣고 자랐고, 80년도 1월 TV컴백 쇼에서 한오백년을 부를 때는 ‘지리산 가서 노래연습하며 세 번 피토했다’ 는 설화 같은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호기심 갖고 궁금해 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확인시켜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에야 스스로 알게 되었다. 불과 한 두 해  혹은 더 많은 해를  먼저 살아온  인생 선행자들의 말들을 이해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70년대 음악은 나의 음악이라 할 수 없다’  라고 말할 만큼 조용필은 70년대 음악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다.  미8군 시절 밴드연주자를 꿈꿨다. 그리고 가수를 시작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로는 스타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부족함을 탓하며 살았다.
목소리를 바꾼다는 것은 일반사람들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은 아닌가.

2차 대마초파동은 조용필에게도 활동금지를 내린다. ‘너는 더 이상 음악을 하지 말라’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법적인 조치를 받는 절망인 상황에서 조용필은 돌파구를 찾는다. 故김대환을 찾아가 일본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아 달라고 했다는 기록은 음악을 어떻게든 하겠다는 의지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일본에서의 음악활동의 길은 열리지 않았고, 암흑 같은 어둠속에서 보내야 했던 그의 내면을 어떻게 헤아려 보겠는가?

추상적인 대중가요의 가사를 특정흐름에 개입시키기는 맞지 않다. 하지만 추상적이기에 상상은 무한정 허락도 되는 일이다.

‘기다려요 한마디에’ ‘갈길 잃어 서성이며’ 긴긴 세월을 구름이 되어 그렇게 살았다. 구름처럼 정처 없이 보내야 했던 세월 안에서 무엇을 버렸는지, 무엇을 기다렸는지 모를 일이다. 고국을 떠나 일본도 될 수 있고, 극단적이었던 정부이기에 법적인 조치지만 해제 또한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무엇 하나도 기약 할 수 없는 기다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암흑 같은 어둠속에서  세계대중음악사 어느 기록에도 찾기 쉽지 않는 경험자의 경험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활동을 못하던 3년간 보이지 않는 기대 속에 피고름 나도록 소리연습 했어요. 평범한 진성으로는 스타가 될 수 없는 시대입니다. 먼저 목청을 떨게 하는 탁성, 다음에 가성에 도전했어요. 탁성은 구토할 때의 음부터 내야 하는데 처음에는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온몸이 가렵고, 그러다가 기침이 나오고 토하게 돼요. 이 고통을 반복하다보면 속이 곪아 피고름이 나옵니다. 토하고 소금 먹고 냉수 마셔 가며 어느 고비를 넘어갈 때까지 문 닫아 걸고 이 짓을 계속 했어요‘ (문화부기자는 재밌다 中에서 조용필 어록)


‘한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 라고 말한 사람은 니체이며 이 문구를 반드시 상기해야 할 사람들은 예능프로에서 전혀 준비 없이 시선을 의식하여 흥미삼아 조용필 모창 하는 자, 또한 가벼이 선배님 호칭하나로 동일선상에 설려고 하거나 득을 세우려는 가수들이다.  
조용필 목소리를 담고 싶어 담배를 태웠다는 김종서는 냉수라도 마셔서 그 가벼움부터 채울 일이다. 그런 후 진지하게 존경심을 표현하라.
조용필은 이런 수련을 통해 3옥타브 5음까지 음폭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다.

조용필의 목소리가 청음이거나 아름다운 소리를 지녔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팔색조처럼 여러 가지의 색이 혼합되어 있다. 복잡한 소리의 색깔 또한 하나로 단정하여 설명 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쉽게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창법을 지녔다. 특유의 소리와 창법만큼은 고유영역이고 그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힘이다.
소리와 귀는 궁합이 맞아야 한다고 한다. 맞는 소리를 듣기 위해 스피커도 취향에 따라 브랜드를 따지고 기기를 살피는 거 아닌가.
많은 대중들이 그의 소리에 의해 정서를 달래고, 공허를 채우고, 호흡을 하고 있다는 건 신기(神技)에 가까운 일이다. 신기가 맞다. 그러지 않고서야 밤낮으로 음악을 듣고 평론하는 평론가들의 조용필 관련 글들을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미사여구를 동원하는 일 외에 그에 대한 평론은 설명 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단일앨범 최초로 100만장을 돌파한 개벽에 가까운 앨범에 대해 나 역시 개인적인 감상을 어줍게 설명하지 않겠다. 많은 평론가들의 글을 인용하지도 않겠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연주와 터질듯 한 가창력을 선보였다는 윤시내의 열애와 ‘창밖의 여자’를 결부 시키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창밖의 여자는 70년대 말 밴드음악 분위기를 지탱하면서 신디사이저를 새롭게 최초로 도입했다. 그 모태를 찾는다면 윤시내가 아니라 외국 프로그레시브음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가슴이 터질듯 한 창법과 조용필의 끌어 올리는 창법이나 목소리에 배어 있는 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다르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차라리 배명숙이 드라마 주제가로 작사한 노래를 두고, 조용필이 대마초로 옥중에 있을 때 연인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설을 믿겠다.


신화의 시작이 된 제1집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이후 계속 되고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언제의’ 라는 표현이나 ‘80년대’ 라는 국한된 표현은 맞지 않다는 것을 깨우치는 일이 된다. 우린 비틀즈의 노래들을 추억으로 듣지 않는다. 현재 U2의 공연도 80% 이상이 과거 히트곡으로 채워지지만 일본에서조차 매진을 이루고 한국 팬들도  그곳으로 날아간다.

80년대 조용필은 대학가 공연을 할 수 없었다. 당시 사회배경에서 기성의 문화를 거부하고 모든 대중가요는 통속적으로 받아들이며 민중적인 이념에 합당한 문화를 추구했던 운동권 문화를 형성한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늦게 변화된 사회에서는 과거의 노래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되었다.
‘세월이 지나고 나니 조용필의 노래가 느껴진다.’  말할 수 있는 현재의 기성세대가 된 386세대들은 과거 사회적인 분위기와 이념을 추구하며 닫아버린 다소의 억지로 인해 오늘날 조용필의 오류평가에 한몫 단단히 했음을 인식해야 한다. 젊음과 지식, 낭만을 가장 크게 어필할 수 있는 대학생들은 그들이 추구해야했던 문화 때문에 당대의 스타조차 그냥 눈감아야했던 시대의 아픔은 그럴지언정, 오늘날까지  과거의 기성가수로 인식하고 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386세대들은 추억을 상기하고자 조용필의 노래를 듣는다면 과거 민주화의 향수병에 빠지는 일만도 못하다.
거룩했던 민주화 운동에 일조했던 탓에 386세대들도 이젠 동시대의 문화와 호흡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전환되었기에, 눈감아야했던 노래들을 제대로 느껴 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음악활동에서 80년대를 과거로 끊어서도 안 될 일이며, 동시대의 동행자들의 노래로 쉼 없이 계속 이어져 온 음악들을 바르게 알고 있을 때 외국의 대중문화의 역사가 부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 해였던가.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이소라가 더듬더듬 어눌하게 소개했던 오프닝멘트가  기억난다.

‘영국에는 비틀즈가 있고 미국에는 엘비스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이분이 있죠?
여러분 조용필입니다‘


비틀즈의 존레논은 조용필의 신화가 시작된 1980년도 말경 권총 피살로 20년도 안된 음악활동을 마감했다. 그러나 존레논은 지금까지 여전히 신화로 남아있다. 비틀즈의 전기를 다룬 많은 서적 가운데 한국인 일반 청년 팬이 2003년에 발간한 서적이 있다는 것을 이곳의 팬들도 기억하기를 바라는 것은  조용필에 대해 가장 정확히 알고 있고, 그를 위한 일을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조용필 충분히 신화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괄호안의 신화로 남을 것인지 ‘영원한 신화’로 남을 일인지는 대중들의 몫임을 상기하며 어느 고인을 글을 올리면서 이만 줄인다.


[영국의 대중예술은 비틀즈의 전설이 있었기에 역사가 되었고, 미국의 그것은 엘비스의 신화가 있었기에 또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회고하는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그들의 음악은 살아있는 음악이 되기에 그들의 역사는 현재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역사가 되기에 오늘의 대중예술사의 살집은 여전히 두텁고 탄탄하다.
대중예술 역사의 현재화는 구체적으로 말해 지난 것을 끊임없이 현재로 호출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뿌리 없고 과정 없는 역사는 없다.
우리에게도 그 뿌리와 과정을 온 몸으로 증명해 온 뮤지션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뿌리와 과정을 온전히 복원하는 일이다.

조용필 미학의 확인은 그런 작업의 연장선 위에 있어야함은 당연하다.]  ‘난세의 영웅이 되어버린 아티스트 조용필’ 본문에서  (저자 : 故  이성욱 문화연대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지냄)   소설가 이인화와 표절논쟁으로 유명) 

  참고한 것 : 대중문화의 이해 (김창남 문화평론가)  한국 TV예능, 오락 프로그램의 변천사(강태영)
                                한국 대중 가요사(이영미) 우리 대중음악의 큰 별들(임진모)


PS :  민주화운동과 민중가요 내용이 들어갔는데 부족합니다. 민주화운동에 대해 폄하하거나, 민중의 소리와 거리가 먼 조용필님을 표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1980년도 사회의 아픔으로 인한 대학생들의 대중가요 외면으로 오늘날 조용필님을 과거 기성가수 정도로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19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청년들은 젊음과 낭만 이외에 민주화운동이 함께 했습니다. 눈치 안보고 선택 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의식이 강했습니다. 두부김치와 곁들여 마셨던 동동주에 취해 학사주점이 떠나가도록 합창했던 노래들, 왜 그런 노래들만 불러야 했는지.

하지만, 1980년도는 사회적으론 전두환 통치가 시작되었고, 실질적으로 조용필 시대의 시작. 그리고 당시 매체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젊은 층에 지지를 받았던  들국화, 동서남북(김광민). 이 활동을 했는데 모두 핑크플로이드 혹은 프로그레시브음악을 추구했다는 공통점.  민중가수 정태춘은 어느 날 최성원을 찾아가 ‘들국화가 민중에 도움이 되지 않는 노래를 할 거라면 하지 마라’ 했고 최성원은 암묵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만큼 민중의 소리를 외면 할 수 없는 시대였고, 결코 조용필님도 외면하지 않았음을 피력하고 싶었는데 조용필과 민중의 소리를 연결하려면 최소 4집부터가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낭만마저 허락 안한 민주화운동은 모든 것을 닫아야 했던 열사의 길이었나 봅니다.

한국대중음악사라는 큰 틀을 학습하려면 조용필님을 중심에 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부적인 금속 톤의 소리를 지닌 김종서를 평가절하 하지 않습니다. 많이 부족한 글에서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글출처 : 조용필 팬클럽 위대한 탄생에서 아뒤 ms 분이 쓰신 글...

 

단지 기성가수로만 평가절하되고 있는 조용필에 대해 늘 분노를 느끼며...

그의 인생과 그의 음악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