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eign Country/Japan

[일본] 담징이 그린 벽화가 있는 법륭사

작은천국 2008. 8. 6. 15:30
여행지
[일본] 오사카 여행 첫째날 법륭사 (나라에 위치)
여행기간
2008년 5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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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륭사 : 호류사 [ 法隆寺(법륭사) ] 일본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절. 창건시기 : 601∼607년 창건자 : 쇼토쿠태자, 스이코 왕[推古王]의 아들 쇼토쿠[聖德]가 601∼607년에 세웠다고 하며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다. 스이코 양식인 금당(金堂)·오중탑(五重塔)을 중심으로 하는 서원(西院)과, 덴표[天平] 양식인 몽전(夢殿)을 중심으로 하는 동원(東院)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미술품에는 불상으로 금당의 약사여래상·석가삼존불상·아미타삼존불상 등이 있고, 벽화에는 금당 4벽의 4불정토도(四佛淨土圖) 등 수백 점의 고미술품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일본의 국보급 문화재들이다. 특히 금당 내부의 벽화는 610년(고구려 영양왕 21)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그린 것으로 중국의 윈강석불[雲崗石佛], 경주의 석굴암 등과 함께 동양 3대 미술품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일본 미술의 최고의 정점인 호류지(법륭사)는 쇼토쿠 태자의 지시에 의하여 삼국의 조불사(造佛寺)들이 건립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이 호류사의 금당(金堂)에는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한 고구려인 담징을 위시한 한반도계 화공집단에 의하여 그려진 12면 벽화가 있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세계적 문화재인 이 금당벽화는 1949년 1월 내부보수공사 도중에 전기취급 부주의로 화재가 일어나서 소실되고 말았다. 현재 호류지 금당에 있는 12면 벽화는 소실 이후에 일본인 화가들에 의해서 복원 제작된 것이다. 일본은 이 사건을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서 '문화재 보존법'을 제정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우리 한반도 미술문화의 정수이기도 한 금당벽화는 그 어디에도 확인할 길이 없게 되었다. 실로 우리에게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 법륭사(호류사) 금당벽화 : 일찍이 출가하여 스님이 된 담징은 불교의 경전 뿐 아니라 그림을 잘 그렸으며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예술에 뜻을 두고 담징이 신라에 머물고 있을 때, 이 소문을 들은 일본은 담징을 모셔 가려고 사람을 보냈다. 담징은 망설인 끝에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예술에 대한 꿈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오긴 했으나 담징의 마음은 언제나 조국인고구려에 있었다. 그런데 중국 수나라가 고구려가 돌궐에는 사신을 보내면서 수나라에는 사신을 보내지 않은 것을 핑계로 백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담징은 고구려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일본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조국을 위해 부처님께 기도를 하고는 하였다. 어느 날 일본 스님이 찾아와 담징에게 부탁하였다. " 조금 있으면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큰 사원인 호류사가 완성됩니다. 벽화를 그려야 되는데 부디 대사님께서 그림을 그려주십시오. "
그러나 날로 위험해지고 있는 조국에 대한 걱정으로 담징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괴로움에 쌓여있던 담징에게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를 크게 물리쳤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담징은불경을 외우며 목탁을 두드렸다. 그리고 호류사로 돌아와 힘을 다해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그리기 시작한 며칠 뒤 마침내 그림을 완성하였다. 그림에 그려진 부처의 모습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정말로 살아 있는 부처님 같아. " " 어쩌면 저렇게 훌륭할 수가 있을까 ? "벽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8년 호류사에 불이 나서 벽화는 불에 타 버렸다. 그래서 지금의 금당벽화는 담징이 그렸던 원래 그림이 아니라, 일본 화가가 담징의 금당벽화를 본떠서 그린 것이다.

 

■ 담징 ( 579 - 631 ) : 담징은 고구려의 승려이자 화가로서 학문과 그림 솜씨가 뛰어났다.
일본의 초청으로 610년에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종이.먹.공예.채색 등의기술을 전하였다. 또한 일본의 호류사라는 절에 머무르면서 불법과 학문을 가르쳤다. 당시 고구려는 수나라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중이라 그의 마음은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고구려가 크게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자,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호류사의 금당에 <사불 정토도>를 그렸다. '금당 벽화'로 더 잘 알려진 이 그림은 경주의 석굴암, 중국의 윈강 석불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품으로 유명했으나, 1948 년에 불타 버리고 말았다. 일본에서는 종이와 먹의 시조로서 오늘날에도 존경을 받고 있다.

 

▼ 나라의 법륭사는 천황이라는 칭호가 쓰이기 시작한 아스카시대이 모습을 전해주는 사찰이다.

    또한 1993년 12월 세계문화 유산으로 일본에서 최초로 등록되었다

▼ 들어가는 입구

▼ 특이한 구조이다. 입구에 이렇게 길이 나있는데 법륭사 안으로 들어가니 금당과 5층탑을 담장으로

   둘러 싸고 있는 구조였다.. 이걸 회랑이라고 한단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 사찰에

   이런 회랑이 존재했으며 회랑은 내부의 톨로이면서 안과 밖을 구분짓는 담장이다. 평지의 사찰에서

   는 이런 회랑이 필요했으나 점차 산지사람이 되면서 경사에 의해 안과 밖이 자연스럽게 구분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졌다고 한다.

 

▼ 목조 5층탑, 이 구조도 본당과 같이 하앙식 구조이다. 이런 구조는 고려시대에 들어가면서

    주심포 형식으로 발전했다가 조선시대 들어가면 다포양식으로 발전한다. 주심포와 다포양식에

    익숙해서인지 신기하게 보인다.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진 곤도[金堂]라고 불리는 본당으로 법륭사의 본존을

   안치한 곳이다.

   건축양식이 고구려와 백제양식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시아권의 공통된 불교문화인점을 감안한다면 어느곳에 가서나 낯설듯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든다

▼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아랫기단을 쌓고 그 위에 상층 기단을 올렸는데 상층기단은 기와지붕처럼

   만들었다(위 사진 참조). 그 위에 2층 지붕을 올렸는데 공포가 매우 고식이다. 거까래와 평행한

   부재로 도리에 지붕의 무게를 받치고 있다. 우리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까지 존재했던 하앙식

   구조이다.  이런 구조의 건축물을 처음봐서 그런지 매우 신기하게 느껴지고 (육중한 무게를 이렇게

   받칠 수 있다니) 조각품들로 인해 목조건물이 가진 매력을 느낄수 있게한다.  

▼ 세계 최대라고 하더니 그 높이에 웅장함이 느껴지는 5층목탑

▼ 이런 곳에서 '백제'를 발견하다니.. 갑자기 욱~한것이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도 역사의 왜곡의 수준이 도를 넘어쓰고 있다.

▼ 이 곳에도 문화재가 있었는데 이 엄청난 줄을 서서 오랫동안 기다렸다..
▼ 담징이 그린 금당 벽화가 불타 없어서 일본인이 찍어 놓은 사진을 보고 다시 그린 그림이다.
 

▼ 처마끝에 꽃잎모양으로 달려있어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빗물을 받는 장치라고 한다.

   멋스럽다...

 

 

♣ 이 법륭사는 백제가 백제의 기술자를 총동원하여 나라지역에 법륭사를 지었다(창건 법륭사) 그러나 670년에 불타버리고 680년이나 690년 경에 통일신라는 다시 대규모 기술자를 파견하여 법륭사를 재건했다. 따라서 지금의 법륭사는 창건 법륭사가 아니고 재건 법륭사라고 한다. 창건 법륭사는 일본에서는 약초가람(若草伽藍 와카쿠사가람)이라 부르는데, 호류지 남대문 바로 오른쪽 공간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한 창건법륭사의 가람은 1탑 1금당 양식인데,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가람배치와 같다. 부여 정림사터의 배치와도 같은데, 백제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상 네이버 지식검색-

 

일본에서 백제문화는 심심치 않게 만나게된다. 고향이 신라쪽(?)인지라 백제문화에 대해서는 그리

깊이가 없지만 백제문화에 대한 경외심은 신라문화 못지 않은듯 하다.

역사적인 유적지에 서 있으면 그 시절은 어떠했을지 흐뭇한 상상을 하고 싶어지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법륭사가 그런곳이 아닐까 싶다.. 백제의 고도 문명을 일본에 전수해주고 먼나라에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만난다는것은 정말 흐뭇한 일이 아닐수 없다..

 

다만 이곳도 5월 연휴가 시작된터라 어딜가나 사람이 너무 많아 제대로된 관람을 할 수 없다는것..

사실 오사카에서 이곳으로 오는데만도 족히 2시간이 넘게 걸린듯하다 원래는 1시간전후면

도착한다고 했는데... 도로의 어마어마한 정체는 일본에 머무는 내내 .... 시간이 조금이라도

부족한 우리에겐 치명적이었다.... 담엔 다시는 5월에 일본은 안갈것이라고 다짐 또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