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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표암 강세황 그는 누구인가?

작은천국 2013. 6. 27. 05:42

표암 강세황,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 특별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8월 25일까지)

 

 

 

표암 강세황, 나는 이사람이 참 궁금했다.

한국화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게 되면 '강세황' 이라는 이름을 만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강세황' 이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된 것은  지난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이라는 전시에서 

조선시대에는 흔치 않았던 자화상이 등장했고 바로 그 사람이 '강세황'의 초상이었다.

 

그리고 작년 '중국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이라는 전시에서 다시 만나게 된 '강세황'의 그림들,

 

61세라는 나이에 처음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72세에 중국 사행을 떠나며

'중국 학자들과 만나서 막힌 가슴을 터 놓는게 소원이었다'고 적을 만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삶을 살았으리라 생각되었던 강세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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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강세황' 이라는 이름이 각인이 되고 나니

 서화관에서는 심심치 않게 강세황의 그림들을 만날 수 있었고

 '강세황' 이라는 인물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단원 김홍도의 스승으로 알려진 조신시대 문인화가인 강세황.

 

그의 탄생 300주년을 맞이해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이라는 주제로 만나게 된 표암 강세황 특별전은

그의 예술세계를 조명함으로써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의 르네상스로 불리던 18세기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표암 강세황전은 무료관람이다.

 

문인화가를 대표하는 강세황은 '시.서.화 삼절'에 능했기에 '예원의 총수'라고 불렸던 강세황은

18세기 조선 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문인으로서, 조선시대 미술사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산수, 화훼, 화조 등 다양한 화목의 소재를 그림으로 남겼고 풍속화, 인물화 등을 통해

다양한 회화 발전에 기여하였고 사군자, 산수화등에 부분적으로 서양화법을 채용한 점,

색에 대한 섬세하고 정확한 견해, 중국 사행을 실경으로 남긴 그림등등

그의 독창적인 작품세계에 대해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문인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전시실 중앙에는 영상을 마련해 '강세황'이란 사람의 이해를 돕고 있다.

 

 

강세황이 손수 자신의 모습으로 그린 자화상으로 조선시대 흔치 않을만큼 자화상을 여러 점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관모에 평상복을 입은 모습은 예법에는 어긋나지만, '마음은 산림에 있으면서 조정에 이름이 올랐다'고 찬문을 적어

출사와 은일을 동시에 지향하는 사대부의 마음가짐을 보여준다고 한다.

 

<강세황의 자화상 >

 

대 여섯점의 초상화를 남길만큼 초상화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으며

한 치의 오차 없이 형체를 닮게 그리며 내면을 옮기는 전신을 강조했다고 한다.

 

사대부로서 반듯하고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대쪽같았을 그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 가능한 강세황의 초상이다.

 

부채에 그린 강세황의 초상은 69세때의 초상으로 노송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는 야외초상이다.

 

산수를 배경으로 인물의 일상을 통해 내면의 일단과 존재감을 시각화했던 18세기 이후 보편적인 형식이라고 하며

당시 정조의 어진을 그렸던 한종유가 그린 초상화이다.

 

요즘의 사진매체와 비교해 보자면 소위말하는 설정사진에 견주어도 좋겠다 싶은데

독서하는 모습을 통해 은근하게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노년에 접어 들면서 깐깐했던 인상이 푸근하고 한결 여유가 더해지고 있음이 느껴지는 자화상이다. 

 

 

강세황 초상 중 유일하게 정면상인 초상은 이마와 미간 사이, 눈과 법령, 턱 부분의 주름을 굵은 선으로 구륵한 다음

음영을 가함으로써 18세기 초상화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강세황의 가문은 삼대가 연속으로 기로소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린 몇 안되는 가문이다.

하지만 강세황의 일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우여곡절을 거쳤다.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 출세를 포기하고 32세에 안산으로 내려갔고

그의 나이 61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뒤늦은 출사를 통해 말년에는 남부럽지 않은 출세길을 달렸다.

 

그의 청, 중, 장년 시절 재야에 묻혀 지내며 시절인연을 기다리는 동안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았기에 오늘의 강세황이 있는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강세황의 아버지 강현 초상>  

 

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강세황까지 삼대가 기로소에 들어갔던 가문임을 칭송하는 문구로 추사 김정희 글씨이다.

 

  

강세황의 예술적인 재능은 아들에 이어 손자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 강이오의 송하망폭도, 강안주유도 , 강완의 묵국도, 강이천의 묵죽도 >

 

 

안산에서 보낸 중.장년시절 여러 문사들, 화가들과 함께 예술을 논하고

유람을 다니면서 문인화가의 탄탄한 기반이 다져졌고

훗날 정조가 강세황을 일컬어 '고상한 풍류와 삼절의 예술' 이라 평가하는 초석이 마련됐다고 한다. 

 

특히 이 시기에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남종문인화풍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개성있는 문인화 세계를 구축하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안산에서 만난 평생지기들 11명과 함께 복날에 개를 잡아먹고 난 뒤 느긋하게 즐기고 있는 상황을

그림으로 남긴 <현정승집도>는 훗날의 볼거리로 삼기위해 그렸다고 하는데 

요즘과 비교해보자면 기념사진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바둑을 두는 등 조선시대의 문인들의 풍류와 멋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는 듯하다. 

중간에 책을 펴 놓고 앉은 사람이 강세황이다.

 

 

화첩형식으로 제작된 <무이구곡도>는 중국 복건성에 있는 무이산의 아홉골짜기를 중심으로 자연경관을 화폭에 담았으며

성호 이익과 처남인 유경종의 발문이 함께 실려있다.

 

직접 중국의 무이구곡도를 가보지는 못했지만 직접 가보게 되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강세황의 작품 중 유일하게 금니로 그려진 <이금산수도>  이다.  

 

맑은 선염의 채색은 강세황 화풍의 전형이라고 할만큼 특징이라고 한다.  

 

강세황과 허필이 부채의 면을 반으로 나누어 각각 그린 산수도로 

오른쪽이 강세황, 왼쪽이 허필의 그림이다. 

짭은 점선과 담황색 등 담채로 처리한 산의 표현의 강세황의 전형적인 산수화풍으로 

서로 닮은 듯 그러나 서로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것으로 둘의 각별한 인연을 생각해 보게 한다.

 

전시를 둘러 보고 있는 사람들  

 

중국의 진귀한 문방기물을 간결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는 <문방구도>

 

가장 눈여겨 보았던 여행과 사생섹션이다. 

'그곳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속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그림'으로 여겼던 강세황의 태도에서 

발견되어지는 20세기 사진이 가진 역할과 진배없었던 강세황의 진경산수화였다.

 

<삼척의 죽서루>  

 

 

 <경남 밀양의 칠탄정>  

 

 

금강산 유람을 한 다음해 기억을 더듬어 그린 <피금정도> 이다.

화면 아래 왼쪽에 피금정을 향하고 있는 문인과 시동의 모습이 그려져있는데

한국화가 재미있는 건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의 숨은 의도가 아! 하며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양화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매력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빈 여백이 많아 그게 그거같고 이게 그거같다고 하지만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꼼꼼히 하나하나 뜯어보면 발견할 수 있는 화가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절대로 빠지지 않는 작은 위트, 이것이 바로 한국화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작년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이란 전시에서 이미 한번 만났던 영대기관첩  

 

한 겨울 빙희를 즐기는 중국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신기했을런지 그림으로도 충분히  느껴진다.  

 

오죽하면 중국 빙희의 풍경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기까지 하다.

 

 

중국 사행길에 만났던 기인한 풍경을 그리고 있는 사로삼기첩은

배를 타고 갔던 사행길에서 만난 기이한 세가지 경치를 담은 시화첩이다.

 

이 중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는 계주의 계문연수는 강세황의 그림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안개 자욱한 호수에 섬들이 원근의 풍경으로 아스라함이 전해지는 것이  

그림을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아득함이 전해온다.

 

 

 

 

자신의 아들 완이 부안현감으로 재임하던 기간중에 변산일대를 유람하고 우금암 일대 유람이 그림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실지로 부안을 가본 분들은 지금도 이 그림과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현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 박물관 소장 작품으로 이번 전시회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그림이다.

 

<우금암>

 

<용추>  

 

또한 강세황은 흔히 사용하지 않는 소재들을 적극적으로 선택했을 뿐 아니라

산뜻한 노란색, 푸른색을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문인 필치에 감각적인 채색이 어우러진 독특한 미감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강세황의 담백한 필치, 먹빛의 자연스러운 변화, 맑은 채색을 통해

독자적인 화풍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산수와 사군자>

   

표암첩에는 다른 사람들은 거의 소재로 사용하지 않은 '무' 등의 참신한 소재가 선택되었고

 현대에 그린 그림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색채감각이 시대를 초월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강세황 스스로가 난죽에 가장 자신이 있다고 했을만큼

난죽은 그의 그림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다.   

 

<난초와 대나무>  

 

 

훗날 강세황이 더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었을 때 자신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살려

비평을 남겼고, 이런 평들이 18세기 화단을 조망한 기록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강세황은 김홍도가 38세에 그린 나비 그림에 대해

 "나비의 가루에 손에 묻을 듯하다" 고 평을 적었을 만큼 그의 재능을 극찬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균화에서의 모임> 은 균와라는 장소에서

강세황, 심사정, 허필, 최북, 김홍도, 김덕형등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화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 장면을 그린 아집도이다.

 

특이할 만한 점은 이 그림이 공동작업이라는 것이다.

 

능숙한 필치로 나무와 바위를 그리고 담황색의 옅은 채색을 가한 것은 심사정과 최북이고

가는 붓으로 간략한 인물묘사는 당시 19세였던 김홍도,

그리고 강세황은 전체적인 구도를 잡았다.

 

조선후기 당대에 내 놓으라고 하는 화가들이 강세황의 코치에 따라 공동작업을 통해 완성한 그림.

서로의 장점만을 부각시키면서도 한 사람이 그린것 마냥 느껴지는 조화로움.

 

이들이 서로 주고 받았을 예술적인 교류들이 가히 어떤 것이었을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 바이다. 

 

한 사람이 남긴 예술작품을 통해 300여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만나는 한국적 문화 예술의 정수.

 

시. 서. 화 두루 팔방미인이었던 그를 통해 삶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 되었던 통합적 경지는

300년이 흐른 지금 오히려 과거의 문화 역사를 찾아가는 길잡이로  더 빛이 나는 것이 아닌가 느껴지던

<표암 강세황,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 전시다.  

 

<국립중앙박물관 가는 길>

지하철 4호선 이촌역에서 하차,

매주 월요일은 휴관  

 

 

Posted by 작은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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