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o Yong Pil/YPC history

조용필의 노래가 전하는 말. 그의노래, 우리 시대의 자화상

작은천국 2009. 2. 25. 14:16

글출처 : The Opera of Ciy (조용필 2007년 성남아트센트 오페라하우스 공연 프로그램 리플렛)

 

돌아와요 부산항에 (대중가요, 마침내 온 국민의 심금을 울리다)

 조용필의 대표곡이자 한국의 대표가요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1972년 황선우에 의해 처음 만들어져

 몇 명의 가수에 의해 불리긴 했지만 결국 사장되어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곡이다.

 그러나 1976년 조용필에 의해 발표되며 엄청난 대중적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 대중음악사의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 곡이 히트 할 수 있었던 음악적 근거는 락을 음악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조용필이 전형적인

 트롯 넘버였던 원곡의 바탕위에 4/4박자 락 리듬을 가미해 새롭게 창조한 데에 있다.

 이처럼 대중가요가 히트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음악 자체가 좋아야 한다.

 그러나, 이른바 '빅히트' 라는 것은 그에 더해 당대의 사회상과 교감하는 '시대정신'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조용필이 통속적이고, 진부한 원곡의 "님이여"라는 노랫말을 '형제여'로 바꿔 부른 순간,

 이 곡은 1970년 대 중반, 처음으로 고국땅을 밟은 조총련 모국 방문단의 가슴을 애절하게 뒤흔들었고,

 이것이 마침내 온 국민의 정서적 호응으로 이어지며 공전절후의 빅히트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최근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관광공사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부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

 이 곡이 압도적인 표를 얻었고, 부산시는 이 노래를 관광상품과 연계하겠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동백섬에 조용필 노래공원을 조성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복안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하나의 대중가요가 음악 자체로 끝나지 않고 제2의, 제3의 문화상품으로 까지 개발되고 있는 것이다.

 이 뿐 아니라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동남아 휴가지에서는 민속공연 중 이 노래가 불려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단순히 조용필의 음악만이 아니라 아리랑과 같은

 우리나르이 대표적인 노래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그러나 조용필 개인적으론 이 노래로 인해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며 음악인생이 끝날뻔도 했으니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가 이 노래 때문에 자신에게 닥친 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과연 한국인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 1위로 선정될 수 있었을까

 

 

창밖의 여자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수퍼스타를 탄생시키다)

1979년 12월, 동아방송의 한편의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가 슈퍼스타의 화려한 등극을 예고한다.

 1979년 말, 대마초 사건으로 음악활동을 금지당했던 가수들에게 해금 조치가 내려지면서 조용필 역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그러나 그에게 기다리고 있던 시대는 단순한 시대가 아니었다. '조용필 1인 제국' 이라는 대중음악, 아니 대중문화에 있어 전무후무한 기록이 세워지는 시대였다. 드라마와 동명 주제가인

"창밖의 여자"는 조용필 음악의 진정한 서막이요, 한국 대중가요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신호탄이었다.

곡을 의뢰했던 당시의 안평선 PD는 이 곡을 듣는 순간 전율이 느껴지며 '이건 되었다'는 직감이 스쳤다고

훗날 술회한다. "창밖의 여자"로 돌아온 조용필은 이미 과거의 조용필이 아니었다. 창을 익히면 오랜 득음의 과정을 거쳤고, 공식적인 음악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독자적인 창작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밖의 여자"는 당시 유행가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멜로디 진행에 심금을 울리는 절절한 가창이 어우러지면서 듣는 이의 감정을 극도로 고조시키는, 대단히 드라마틱한 노래였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에서 클라이맥스가 되는 이 곡은 단순한 흥얼거림의 노래가 아니라 가히

영혼의 울림이라고 할 만한 조용필식 가창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러한 드라마틱한 감정의 분출은 1980년 당시 억눌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숨죽여 있던 대중의 한을 일시에 폭발시키며 대리 위안의 효과를 이끌어 낸다. 더불어 이 노래를 당시까지의 가요사를 통틀어 처음으로 본격적인 '주류 싱어송라이터'의 존재를 등장시키는 곡이기도 했다.

이 곡이 정식 앨범으로 발표된 것은 1980년 3월, 그러나 한참 앨범 홍보를 해야하는 시기에 조용필은 미국

공연으로 인해 수개월 동안 한국을 비우게 된다. 하지만 가수 본인이 없는 상황에서 이 노래는 단숨에 최고의 히트곡이 되었고, 100만장 돌파라는 최초의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게 된다. 1980년의 밀리언 셀러라면

지금의 사, 오백만장은 족히 되는 조용필은 이 곡을 통해 그 해 각 방송사의 최고가수상, 최고 인기가요상,

작곡상등 모든 상을 휩쓸고, 그야말로 가황의 시대를 활짝 열게 된다. 이 노래 없었다면

어쩌면 지금의 조용필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대중음악계는 조용필과 같은 최고의 뮤지션을 탄생시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창밖의 여자"를 받아들인 대중들의 판단은 아주 현명했던 것이다 

 

꿈 (성인음악은 '트롯'이 아니다)

"꿈(13집 1991)이 발표되자 많은 사람들이 조용필도 이제 갔다고 했다.

다음 해에 발표된 "슬픈 베아트리체(14집 1992)는 대중의 호흥을 크게 받지 못했고 랩과 함께 폭풍우 같이 휘몰아친 신세대에게 드디어 그 오랜 왕좌를 물려주고 권자에서 밀려나는 듯했다. 조용필이 사라진 듯한

가요계는 뮤직비디오, 외모, 스타일 등의 비주얼적인 요소가 음악 자체보다 더 중요시 되고, 댄스음악과

립씽크가 가요계 전반을 휩쓰는 등, 질적 후퇴가 이어진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와 함께 성인들은 자신들의

음악이 무엇인지,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성인음악=트롯=뽕짝'이라는 강력한 등식이 성립되면서 성인들은 더 이상 음악다운 음악을 듣기 어려워졌고 방송에서도 철저히 소외되어갔다.

나이 마흔 조용필. 그가 찾아내고 고민해야 할 음악은 무엇이었을까. 10대의 초상으로 1980년대를 보냈지만, 이제는 어른으로 성장한 팬들에게 무엇을 들려주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았을까.

"꿈"은 바로 그러한 조용필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곡이다. 본인 스스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고

밝히기도 한  "꿈"은 꿈을 찾아 헤매이며 성장해 온 대중들에게 이제는 힘겹고 정신없이 달려 온 길을 차분히 돌아보라고 한다. 이 곡을 통해 우리들은 비로소 어덜트 컨템포러리(Adult Contemporary)라는 새로운

성인 음악의 가능성을 접한다. 나이가 들만큼 들었으니 트롯을 해야만 대중에게 먹힌다는 주위의 무수한

권고와 조언을 무시한 채 자신의 음악세계를 끊임없이 구축해 갔던 조용필, 1990년대에 들어서며넛 방송을

자제하고, 음반판매량 역시 예전과 같은 파괴력이 사라졌지만 오히려 음악은 더욱 깊어갔다.

그는 뮤지션으로서의 모든 영광을 누리고 기록을 세운 사람이다. 인기란 바람과 같은 것이며 새로운 스타에

의해 기존의 세력은 밀려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다. 하지만, 밀려난다 해서 음악을 포기했다면

대한민국 성인들은 "꿈"이나 "추억속의 재회"같은 음악을 접할 수 있었을까.

우리들은 여전히 나이가 들면 좋던 싫던 트롯을 우리의 음악처럼 안고 살아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트롯은

음악의 여러 장르 중 하나일 쁜 성인음악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 이 노래는 음악다운 음악을 접하고자 하는 성인들에게 희망의 노래이며, 철학적 사색과 음악적 깊이가 없는 가벼움 속에서 단비 같은 곡이다.

"꿈"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며 조용필의 음악적 고뇌가 계속되고 이루어지는 날 '성인음악=트롯=뽕짝' 이라는 등식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비련 (10대의 초상)

기도하는 꺄악~!!!!!

대중가요로서 이 부분만큼 드라마틱하고노래하는 사람과 관객과의 교감이 강렬하게 표현되는 것이 있을까

4집(1982년) 수록곡인 "비련"은 대중음악의 주 수용자층인 10대를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적인 노래라 할 수 있다.

70년 대 말 까지 대중가요는 청통맥(청바지, 통기타, 생맥주)으로 대변되는 청년문화의 음악과

이미자, 남진, 나훈아 등의 성인층 트롯 음악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다. 즉, 대중음악은 어른들의 것이지

아이들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용필의 등장은 이러한 음악 수용층의 주 구성원 자체를 바꾸며

음반 산업의 지각변동을 가져온다. 칼라 TV의 등장과 함께 화려하게 컴백한 조용필은 그때까지 없었던

 새롭고도 세련된 음악으로 기존 음악 수요자들은 물론 10대들마저 한순간에 사로잡게 되는데,

1집 "단발머리"로부터 시작된 10대들의 열광은 '비련"의 가사 일부분이 되어버린 '갸악~~악!!' 하는 비명,

절구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팬을 가진 '유명인'에게 흔히 붙은 고유명사

'오빠부대'라는 신조어를 탄생케 한 인물이 조용필이었다.

10대에게 어필하기 시작했던 무렵, 그는 이미 30대였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한물간 중견 가수'에나 속할

법한 나이였다. 치열한 입시의 중압감에 짓눌려 있던 10대들의 엄청난 에너지가 그를 통해 분출되면서

조용필은 당당히 '10대의 초상'으로 자리매김하며, 10대를 대중음악 수용층의 중심 세력으로 끌어 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유례없는 10대들의 열광은 한 때 기성세대의 우려를 낳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저 기우에 불과했으며,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 된 '그때 비명지르던 아이들'은 여전히 공연장에

나가 '기도하는~꺄악!'의 전설을 이어가고 있다.

10대의 문화를 선도해 나간 10대의 초상 조용필.

그런데 이제는 마땅히 자기 문화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20대이상의 중장년층에게 또 다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 가게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조용필에 열광했던 부모들이 스타를 좋아하는 자녀들의 심정과 입장을 이해하며 세대간의 의사소통과 감정의 교감을 가능케 하고 있으니, 세대간의 화합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하면 지나침일까

 

님이여(Lead me on), (가황(歌皇), 눈을 뜨다

조용필은 원래 기타리스였다. 음악을 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기타였고, 친구들과 가출하며 만든

밴드에서도 기타를 쳤던 그의 꿈은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타줄의 쇳물이 녹아

스며들어 손톱밑이 푸르딩딩해지도록 밤낮으로 기타에 매달렸던 그에게 노래는 '아아아~'로 가끔씩 넣어주는 코러스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런 그에게 가황의 길을 열어 준 것은 뜻하지 않게 한 흑인 미군병사였다.

미군부대에서 밴드로 활동하던 당시, 보컬을 맡았던 멤버가 군대에 가게 되면서 조용필은 대타로 노래를

하게되었다. 어느날, 한 흑인 병사가 좋아하는 노래라며 생일을 맞은 자신을 위해 <lead on me>를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그 댓가는 맥주 한 박스였고, 강한 호기심을 느낀 조용필은 밤새워 연습하여 다음날

그 병사를 위해 노래를 불렀고, 흑인 병사는 그가 부른 <Lead  me on> 에 눈물을 흘렸다. 먼 타국에서의

외로움과 노래의 카타르시스가 최고점에서 융합되며 눈물샘을 자극했을 것이지만 조용필은 자신의 노래로

누군가가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에 노래의 매력을 크게 깨닫게 되고,

그 후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가게된다. 이 곡은 조용필에 의해 70년대 여러번 불리워졌다가 "님이여(3집)" 라는 제목으로 정식 앨범에 수록된다.

기타리스트 조용필을 대한민국의 최고의 가객으로 이끈 이름 모를 흑인병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한 21세기이다.

 

 

일편단심 민들레야 (할머니의 망부가)

6.25전쟁의 비극은 일천만 이산가족을 낳았다. 부모형제, 혹은 남편을 가슴에 묻은 채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살아야 했던 세월. 우리 민족의 숙명이자 애환 그 자체였다.

조용필의 자작곡 중 유일한 트롯 넘버인 3집의 "일편단심 민들레야"는 한 여인의 끝없는 기다림을 담고 있다. 6.25전쟁 당시 남편이 납북되자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며 30여년을 홀로 살아온 이주현 할머니는 자신의 한 맺힌 마음을 노랫말에 담아 신문기자를 통해 조용필에게 전했다. 조용필과 이주현 할머니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가사를 받아 본 조용필은 애절한 사연에 감동해 즉석에서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게 된다.

조용필은 전문 작사가를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네 인생의 회로애락을 표현하고 음악으로 만들기 위해 때론 잘 연마된 옥석보단 질경이의 거침음이 더 적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편단심 민들레야"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님 주신 밤에 씨 뿌리고 사랑의 물로 꽃을 피운' 이라는 다소 은유적이면서도 과감한 이 노랫말은 질기디 질긴 민들레의 모습으로 한 평생을 망부석으로 살아온

이주현 할머니의 얼굴이었고, '긴 세월을 하루 같이 하늘만 쳐다보는' 기약없는 기다림은 한국 여인들의

정한과 사모의 정이었다.

 

생명 (암울한 시대의 진혼곡)

군부독재로 상징되는 1980년대 초는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흔미한 떄였따. 역사의 주체이기보다는 방관자로 자유와 권리를 감금 당한 채 숨죽여야 했던 시대상황, 그 불확실한 시대의 슬픔과 희망을 노래한 곡이

"생명(4집)"이다. 민주화에의 열망과 자유의지는 80년 5월 '광주 민주화 항쟁'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정점에 서는 대사건이자 핏빛 학살로 점철된 시대의 비극이었다. 1982년, 조용필은 당시 절친했던

김지하씨를 통해 알게된 전옥순 여사와 함께 가사를 고민한 끝에 "생명(4집)"을 내놓는다. 군정이라는

암울한 시대 상황하에서 다분히 상징적인 언어들로 인간의 존엄을 노래한 "샘영"은 주류 ㄷ중가수 조용필이 택했던 나름의투쟁이었고, 외침이었다.  그러나 서슬퍼런 군사정권 아래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처럼 이 노래 역시 가사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여 여러번의 수정을 거듭해야만 했다. 그 결과, 결국 이 곡은 원안과 거리가 멀어진 채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러나 비감 어린 가사와 멜로디, 장대한 편곡을 통해

우회적으로 그 시대 모두의 아픔을 담아내기에 충분했다. 특히, 곡의 종결부에서 새 생명의 탄생으로 차용된 갓 태어나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그가 바라는 희망과 자유의 세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용필은

순수 예술을 지향하는 대중가수이고 별다른 본인의 설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1987년(10집)",

"친구의 아침(17집)", "일성(18집)" 등을 통해서 시대의 아픔을 놓치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I LOVE 수지 (조용필의 어린 애인, 수지)

조용필과 그의 둘째 형 영일의 사이는 각별했다. 둘째 형과는 어릴때 한방을 쓰며 자라 다투기도 많이

했지만, 조용필이 음악을 시작하게 된 것이 둘째 형의 기타 때문이었고, 음악을 하겠다고 가출을 해서

떠돌아 다닐 때 용기를 북돋아 준 사람도 둘째 형이었다.

그런 형에게 수지라는 딸이 있다. 형 내외는 79년 수지를 낳자마자 이민을 가야했고, 조용필은 형이 미국에서 자리를 잡을 때 까지 수지를 돌볼 것을 자청했다. 조용필은 이후 수지가 미국으로 갈 때까지 7년간

아버지처럼 돌보았다. 수지는 미국으로 떠나기전 조용필과 떨어지기 싫어 밤새도록 울었는데 이 때의 수지 모습을 떠올리며 "I LOVE 수지(10집)"라는 곡을 작곡한다.

가사를 쓴 양인자씨는 '수지가 누군지 모르지만 조용필의 얘기 속에서 그의 일곱 살짜리 어린 애인 수지를

만났다. 그 아이가 미국에 살고 있다는 얘기만으로, 그의 음성에 고여있는 그리움만으로도 그 아이의 눈물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수지는 우리 모두의 이름이 아니겠는가?' 라고 가사를 쓴 배경을 설명했다.

이 노래를 작곡한 사람은 조용필이지만 앨범에 조 수지 작곡으로 표기한 것은 그 만큼 수지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음을 전해준다. 수지와는 삼촌과 조카사이 이상으로 마치 친아버지와 딸 같은 사이였다.

그런 수지는 이제 20살이 넘은 어여쁜 숙녀로 자랐다.

 

고독한 러너 (숨결처럼 묻어나는 고독의 극)

13집 <<THE DREAMS>> 와 14집 <<고독한 러너>> 앨범의 조용필의 디스크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자전적인 앨범이다. 절정에 이른 작곡 역량으로 자신의 음악적 영감과 상상력을 고스란히 불어넣은 이 앨범들에서

조용필은 지난 시절 품었던 꿈과 현재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특히 14집의 타이틀 곡인 "고독한 러너"는 그의 개인적인 불행과 음악적 고뇌가 교차하던 시기에 발표된

곡으로 당시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1991년, 대중들의 급변하는 취향과 함께 번민을 피할 수 없었던 조용필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어린 시절 음악을 하겠다며 가출을 일삼던 그의 엄한 아버지에게 늘 질책의 대상이었지만 어머니만큼은

비상구였고 피난처였으며 정신적 안식처였다. 일본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어머니의 부재를 절감하는 순간 비로소 주체할 수 없는 외로움에 눈물을 삼키며 악상을 떠올려 만들었다는 "고독한 러너"

이 곡은 어머니에 대한 추모의 정과 최정상의 스타로서 그리고 음악하는 사람으로서의 고독감,

그러나 딛고 달려가겠다는 강한 의자가 표현된 곳이었다. 견디기 힘든 인간적인 아픔이 예술혼에 뜨거운

기운을 불어 넣으 준 것일까?

14집은 조용필읟디스코 그래피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명반이면서, 더불어 자신이 처한 고독의 극한 경계에서도 희망과 전화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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