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명옥헌 원림 : 이곳은 오희도(吳希道·1583-1623)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곳으로 아들 오이정(吳以井·1619-1655)이 헌(軒)을 짓고 명옥헌(鳴玉軒)이라 이름지었다. 소쇄원과 더불어 아름다운 민간정원으로 꼽힌다. 산기슭의 시냇물을 이용해 만든 위 연못과 가운데에 섬이 있는 네모난 아래 연못을 파고, 그 위쪽에 아래 연못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서북향의 정자를 세웠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사방이 마루이고 가운데에 온돌방이 있다.
위 연못은 석축을 쌓지 않고 땅을 파내어 만들었고, 아래 연못은 동서 20m, 남북 40m의 크기로서, 자연 암반으로 된 경사지에 모서리만 둑을 쌓아 만들었다. 아래 연못가에는 100여 년 된 배롱나무 20여 그루가 둘러서 있다. 정원 전체가 담장 없이 옆으로 벌어진 산자락과 입구의 작은 언덕으로 감싸여 있으며 연못의 서남쪽 가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줄지어 서 있다.
명옥헌이란 이름은 한천의 흐르는 물소리가 옥이 부서지는 소리 같다고 해서 지은 것이다. 위 연못 위쪽 암반 바위에는 ‘명옥헌 계축(鳴玉軒 癸丑)’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명옥헌의 현판은 이 글씨를 모각한 것이다. 전라남도기념물 제44호.
헌은 경관을 감상하고 심성을 수양하는 방으로 보통 사랑채에 많이 붙이는 명칭이다.
원림은 울타리 안에 조경이 이뤄진 곳을 말하는데 이 명옥헌 원림은 주변의 자연경관과 정자를
결합해 전통 정원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 앞에 있는 연못은 우아한 멋을 자아낸다. 1천 300여평의 넓은 뜰에 아담한 정자와 깨긋한 시냇물, 그리고 자연스런 연못, 그 연못가의 백일홍나무와 노송이 조화를 이루어 고아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오희도(1583~1623)는 이곳 후산마을 명옥헌 자리에 애초에 ‘망재’(忘齋)를 짓고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며 살았는데, 기질이 순수하여 말씀과 웃음이 절차가 있었으며 강직하면서도 과감하지 않았으며, 화평하면서도 우유부단하지 않았던 인물이라고 뒷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런 그가 살았던 ‘시속을 버린 사람이 사는 집’이 아들에 의해 명옥헌으로 재건된 것이다.
특히 명옥헌은 백일홍나무가 꽃을 피우는 늦여름~초가을 무렵에는 붉은 꽃구름이 원림 전체를 덮고 있는 모습이다. 백일홍은 한여름에서 가을에 들기까지 남도땅 어디에서나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꽃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사문학의 본고장인 담양지역은 아예 백일홍을 피우는 배롱나무를 가로수로 가꿨다. 이 백일홍은 어느 한 철 며칠 눈부시도록 화사하게 피었다가 냉정하게 꽃잎을 떨궈버리지 않는다. 무려 석 달하고도 열흘동안이나 꽃을 피운다. 그것도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오래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날마다 새 꽃을 피워낸다.
꽃을 피우는 기간이 긴 만큼 배롱나무의 이름도 여러 가지로 불린다. 100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고 해서 백일홍이라 한다.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고 해서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이 꽃이 지면 벼가 다 익는다고 해서 '쌀밥나무'라고도 한단다.
▼ 백일홍을 기대하고 찾아간 명옥헌 원림.. 후산마을까지는 명옥헌 원림 표지판이 있었으나
막상 마을입구에서 표지판이 없어져 마을안쪽으로 골목길이 자꾸 좁아서 길을 잘 못 든 줄
알고 다시 나왔다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다시 들어가니 인내심의 한계에
달할 좁은 골목길의 끝에 희끄무레하게 명옥헌옥림이 드러난다. 다른 곳과 달리 동네의
맨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정말 이런곳에 정자가 있기나 할까 싶은데.. 그저 놀라울따름이다

▼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 문을 통해 산 아래 동네로 흘러간다.. 시원함의 절정을 이룬다.
이곳에 앉아 연못을 내려다 보고 싶었으나 사람들이 정자에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엉덩이
조차 걸칠 틈이 없었다.. ㅠ.ㅠ ▼ 엄청난 크기의 배롱나무.. 족히 300년은 넘어보인다
■ 식영정 : 남면 지곡리 증암천 성산 기슭에 있는 정자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방을 한쪽 귀퉁이로 몰아붙이고 전면과 측면을 마루로 두고 있다. 자연석 기단 위에 두리기둥(圓柱)을 세운 굴도리 5량의 헛집구조다. 식영정(息影亭)은 16세기 중반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齡·1496-1568)을 위해 지은 것이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정철보다 11년 연상이었으나, 정철이 이곳 성산에 와 있을 때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했다. 식영정 건너편에 있는 환벽당은 어린 시절 정철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기거했던 곳이다.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김성원·고경명·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을 지은 것은 유명하다. 식영정이십영은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됐다. 이외에 정철은 ‘식영정잡영’ ‘소쇄원제초정’ ‘서하당잡영’ 등 수많은 한시와 단가 등을 남겼다. 그는 이곳을 무대로 하여 송순·김인후·기대승 등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고경명·백광훈·송익필 등과 교우했다.
식영정 옆에는 송강집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을 1973년에 건립했으며, 1972년에는 부속건물로 부용당을 건립하고, 입구에 성산별곡 시비를 세웠다.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노자암·견로암·방초주·조대·서석대 등 경치가 뛰어난 곳이 여러 곳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대부분 광주호 물속에 잠겼다.
달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식영정(息影亭)
남풍이 건듯 불어 녹음을 헤쳐내니
절기 아는 꾀꼬리는 어디에서 왔던가
희황(羲皇) 베게 위에 풋잠을 얼핏 깨니
공중 젖은 난간 물 위에 떠있구나.
-성산별곡(星山別曲) 에서 -
▼ 식영정은 송강 정철 성산별곡의 산실 ▼ 정면에 보이는 서하당.
▼ 식영정현판 ▼ 휘어진 나무의 모양을 그대로 서까래로
식영정은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란뜻 이용하여 운치를 더하게 한다
※ 담양의 가사문학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시대 사림들은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피하여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물산으로 인심이 넉넉한 호남 지방으로 낙남하여, 특히 이곳 담양에 많은 누정을 건립하고 인재 양성은 물론 시단(詩壇)의 결성과 시회(詩會)를 통하여 심금을 울리는 훌륭한 시가문학을 창작하였다. 그 같은 시문학 제작의 전통은 국문시가의 하나인 가사문학 창출의 비옥한 터전이 되었다. 조선 중기 이서의 낙지가를 필두로 20세기 정해정의 민농가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 동안 담양권 가사문학의 제작은 끊임없이 지속되었으니, 이는 국문학 사상 크게 평가되는 주목할 사실로 지적된다. 담양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이서(李緖)의 낙지가(樂志歌)는 서사ㆍ본사ㆍ결사의 3단 구성으로 되어 있다. 전체 내용은 중국의 처사(處士) 중장통(仲長統)의 삶을 흠모하여 권력 등 세속의 영화와는 멀리한 채 자연과 함께 하는 안빈낙도의 처사적 삶을 노래한 가사이다.
정철 (鄭澈)은 이곳에서 4편의 가사를 지었다. 성산별곡(星山別曲)ㆍ관동별곡(關東別曲)ㆍ사미인곡(思美人曲)ㆍ속미인곡(續美人曲) 등이 그것이다. 성산별곡은 서사ㆍ춘사ㆍ하사ㆍ추사ㆍ동사ㆍ결사 등 6단의 구성으로 시간에 따른 순차적 전개를 취하고 있으며, 강호 전원 생활의 풍류를 우리말의 어감을 한껏 살려 훌륭하게 드러내었다. 관동별곡은 당쟁으로 담양에 물러나 있던 정철에게 강원도 관찰사가 제수되자 그때의 기쁨과 관동 지역의 승경 탐승으로 고조된 정서를 진솔하게 읊었는데, 작자의 풍류와 함께 관료로서의 포부 및 연군의 정을 우리말의 묘미를 유감없이 살려 4단락에 나누어 매우 적절하게 노래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사미인곡 또한 성산별곡처럼 6단 구성으로 되어 있다. 서사ㆍ춘원ㆍ하원ㆍ추원ㆍ동원ㆍ결사 등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전개되어 있다. 그 내용은 임과 이별을 한 어떤 여인의 입장을 빌어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노래하였는데 속미인곡과 함께 충신 연주가사의 백미로 지적된다.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의 속편으로 춘하추동 사시의 절서 순에 따른 구성을 취하였다. 본의 아니게 임금에게서 버림받은 작자의 입장을 외롭게 된 여인의 처지에 비유한 충신 연주가사이다. 갑ㆍ을 두 여인의 대화체 진술 양식으로 전개되고 있음이 그 특색이다.
▼ 식영정에서 바라보는 정취.. 이런 정취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詩 한수가 떠오를듯
▼ 하루동안의 담양여행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기전 담양의 두번째 음식 '떡갈비'를 먹었다
가장 유명하다고 하는 신식당에 들렀으나 일인분 18,000 그 가격으로 따지면 너무 비싸단
생각만이... 근처 장성에 사는 대식군이 지리산으로 휴가를 가지만 않았어도 물어보는건데 ㅠ.ㅠ
♣ 문득 학교때 배웠던 <성산별곡> 이 가물가물한다.. 가사문학하면 고려가요로 부터 조선의 가사
문학이 꽃피웠으며 3.4조 4.4조의 운율이 있거 규방가사도 있고.. 등등...
인터넷검색을 해보니 "‘성산별곡’은 ‘성산’ 풍류를 읊은 것으로서, 성산은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에 있다. 1560년(명종 15)에 송강이 처가의 친척인 김성원(金成遠)을 위해 지은
작품이라고 한다. 김성원은 성산에 서하당(棲霞堂), 식영정(息影亭)을 세우고 풍류를 즐겨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이 작품은 이곳을 중심으로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경치
와 김성원의 풍류를 예찬하고 있다."로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성산별곡'은 송강 정철이 지은 가사 작품으로서 창작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
다. 25세 때 지은 작품으로 보기도 하고, 동부승지로 진출했다가 다시 물러나 고향에서
생활할 때인 42세 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송강 정철은 조선조 최대의 가사 작가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그가 지은 '전후미인곡'과 '관동별곡' 등은 조선조 최고의 시가 작품으로 평가받
았고, 특히 '사미인곡'은 동방의 이소(離騷)라고 격찬 받을 만큼 충신연군으로 가득 찬 작품
이다. 서사, 봄, 여름, 가을, 겨울, 결사의 형태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작자의 솔직한 생활
정서나 인생관 등이 잘 표현된 가사라고 할 수 있다. 후기의 가사에 비해서 표현력이 많이
부족하고 한문투의 어휘가 지나치게 등장하는 등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조 가사
등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에 소재해 있는 식영정은
경관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무등산의 모습과 우리의 전통 정원을 잘 보여주는 소쇄원 등이
있어서 유적답사로 찾아가 볼 만한 곳이기도 하다. 실제 답사를 해 보면 이 작품에 묘사된
경관에 대한 묘사가 허사가 아님을 쉽게 알 것이다." 로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해설처럼 담양은 슬로시티가 빈 말이 아니며 그 여유로움에서 이러한 가사문학이
탄생될수밖에 없는 필연성마저 느끼게한다. 다른곳과 달리 정자에 누워 있는사람, 걸터
앉아 있는 사람도 많고 다른 문화재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광경들이다. 또한 곳곳에
유명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모르지만 드물지 않게 경치가 좋은 곳에 어김없이 정자가
있다. 심지어 마을어귀에도... 이런 곳에서 삶의 여유를 가지고 사시사철로 바뀌는 계절을
보고 느끼고 있노라면 미사여구로 치장하지 않아도 담백하고 솔직한 심성이 표현될 수
밖에 없을 듯하다. 구름도 쉬어간다는 이 곳 식영정, 담양에서
다시한번 느리게 가는 슬로시티의 매력에 흠뻑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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