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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에는 개그맨 이경규를 만났다. 이 대목에서 분명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들이 많으리라 짐작된다. 개그맨 이경규가 ‘문화계 인사’라니, 비약도 한참 심한 비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탤런트나 연극배우·영화감독은 문화부 장관도 하고, 가수나 춤꾼도 경지에 이르면 ‘선생님’으로 불리는데 27년간 현장을 지켜온 개그맨은 왜 ‘딴따라’여야만 하는가? 바로 이 점이 그를 만난 이유다. 그래서 오늘의 인터뷰는 그 나름대로 새로운 의미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자체로 한 편의 개그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1. 빨간 피터의 유혹
이경규가 진행하는 ‘방과 후 학교’라는 프로그램에서 섭외전화가 왔다. 게스트로 나와달라는 것이다. 원래부터 그가 나의 인터뷰 대상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었다. 녹화가 진행된 두 시간 동안 그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녹화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인터뷰를 제안했다. 그가 승낙하는 순간부터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가 뒤집혔다. 인터뷰이가 방어막을 치기 전에 속곳을 고스란히 들여다보고 게임을 시작한 셈이다,
Q: 중·고교 시절 공부는 별로 안 했을 것 같고, 혹시 문제학생이었나요?
“아, 아닙니다. 그때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어요. 문예반 친구와 시화전 다닐 정도로 나름대로는 건전했죠. 그때 안도현 시인도 같이 다녔으니까요. 운동도 하고, 연극도 보러 다니고… 그냥 놀았죠 뭐. 그즈음에 작고한 추송웅 선생님이 부산에서 ‘빨간 피터의 고백’을 공연하셨는데, 그걸 보는 순간 연극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Q: 개그맨이 됐을 때 사람들이 성공할 것이라고 여기던가요?
“막상 해보니 어렵더군요. 제가 성공할 거라고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PD들도 안 믿더군요. 더구나 저는 연기보다 아이디어와 말이 무기였는데 얼굴은 비디오가 안 되죠, 연기는 더 안 되잖아요. 당시엔 ‘말보다 연기’가 우선이던 시절이었어요.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게 인기였어요. 저는 늘 아이디어 회의에만 불려 다녔어요. 아이디어는 기발했거든요. 그런데 정작 출연은 안 시켜요. 그러다가 라디오 프로인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뻐꾸기를 날리면서 소위 떴죠.”
(그는 지금도 ‘음식’이라는 말 대신에 ‘먹을거리’, ‘뜰 줄 알고’ 대신에 ‘뜰 것으로 생각하고’라고 말한다. 발음이 안 되기 때문이다. 사투리가 낀 부정확한 발음은 그의 최대 난적이었다.)
Q: 재능과 노력 둘 중에 어떤 것이 오늘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재능 7에 노력 3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씩 재능이 있는 곳이 있어요. 저는 이쪽에 재능이 있었죠. 연예계에도 재능은 사람마다 달라요. 연기를 잘하는 친구, 감이 뛰어난 친구, 언어감각이 있는 친구… 각각 그 재능이 달라요. 여기서 성공하려면 정확하게 자기 재능을 알고 그것을 살리려고 해야 하죠. 노력은 그것을 살리는 데 집중되어야 합니다.”
Q: 강호동·김구라 등을 비롯한 많은 후배를 이끌었다고 하는데, 그것도 그들의 재능을 간파한 결과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저는 보면 알아요. 얘가 어디까지 클지, 어떤 것에 재능이 있는지, 재능이 있으면 끌어주고 없어 보이면 그만두라고 해요. 그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거죠.”
Q: 그럼 강호동씨는 그때 보니까 재능이 보이던가요? 이 정도까지 클 줄 알았나요?
“음, 강호동은 흐름을 탄 거죠. 그 흐름에 서 있는 운도 재능이죠. 이후는 그의 노력의 결과고요. 개그맨이 운동하면 안 웃기지만 운동선수가 개그를 하면 웃깁니다. 그것도 씨름선수가 개그를 하면 새롭죠. 대중은 무엇인가 늘 새로운 것을 원해요. 그 새로움이 강호동을 필요로 할 거라 생각했어요. 물론 그런 케이스도 처음 한두 명이죠. 그 다음부터는 식상해져요. 다른 친구는 잘 안 됐잖아요. 강호동은 시류와 본인의 노력, 거기다가 뛰어난 두뇌가 어울려서 만들어진 겁니다.”
2. 변화만이 살길이다
(그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시류를 읽는 탁월한 감각으로 위기를 극복하며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새로운 트렌드를 스스로 만들어 갔다. 그에게 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고 강박이었다.)
Q: 그렇게 처음에 벽에 부딪혔을 때 돌파구로 택한 것이 기존의 코미디와 다른 새로운 형식이었는데, 어땠습니까? 얼떨결에 그렇게 된 겁니까? 치밀한 고민의 결과물입니까?
“전략이었어요. 저는 늘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고민합니다. 오락프로그램에서 캐릭터를 정하고 들어간 건 제가 처음일 겁니다. 예전에는 캐릭터란 ‘바보’ 캐릭터밖에 없었죠, 대본을 따라 하는 콩트와 달리 버라이어티에서는 캐릭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2000년 초 ‘대단한 도전’부터 김용만을 물어뜯기도 하고, 버럭 개그를 선보이기도 했죠. 성격이 아닌 설정이지만 제 캐릭터를 만든 거죠. 그 다음에 ‘이경규가 간다’에서는 공공의 요소를 끌어들였고, 다큐멘터리 보고서에서는 지금 유행하는 리얼리티 형식을 처음 도입했죠. 이제 새로운 변신을 고민 중입니다.”
Q: 고민한다는 것은 뭔가 막혀 있다는 뜻인데, 정상에서 내려올까 봐 두렵습니까?
“많이 두렵죠. 지난 20년 내내 불안 불안했습니다. 인기는 유리창에 낀 습기 같은 거예요. 새로운 해가 뜨면 금세 사라져 버리죠. 그러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요. 대중은 습기가 사라진 창밖에 비치는 새로운 세상만 바라보는 거죠. 항상 그런 두려움이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불안합니다. 다시 한번 변화에 성공하면 살아남고 아니면 잊혀지겠죠.”
Q: 최근 몇 개의 프로그램이 실패하면서 ‘이경규의 시대는 갔다’라고들 하는데요? 그건 변화에 실패한 탓입니까?
“제가 20년 이상을 해왔는데 대체 왜 끝났다고 하죠? ‘쟤 언제 끝나나’ 하고 도끼눈 뜨고 쳐다보지 말고 ‘언제까지 할 수 있나’라고 생각해주면 안 되나요. 그런 얘기 하는 기사를 봤습니다. 그때마다 상처를 입죠.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들은 굳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주눅이 들어요. 옆에서 멀쩡한 사람 보고 ‘너 얼굴이 왜 그래? 요즘 어디 안 좋아?’ 자꾸 이러면 그 사람 정말 병들어 죽어버려요. 나, 안 죽어요.”
Q: 그래도 몰래카메라가 식상한 것은 맞지 않나요? 돌아오지 않았어야 할 몰카라고들 하던데요?
“그게, 약하게 하면 재미없다고 하고 독하게 하면 너무한다고 욕하고, 그래도 시청률이 굉장히 높았어요. 욕을 해도 재미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30∼40분씩으로 방송 분량이 늘어났어요. 그래서 점점 재미가 덜해졌죠. 예전에는 타이트하게 편집해서 15분, 20분 했거든요. 그러니 과거에 비해 재미가 적다는 소리가 나오죠. 긴장감이 떨어지고, 느슨하다고. 그럼 몰래카메라 없애라는 비판으로 이어져요. 제가 그만두자 한 거예요. 그건 잘린 거 아니에요.”
Q: 그럼 후배들이 방송에서 이경규씨를 공격하는 것도 설정인가요?
“아니죠. 대중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코드라면 무슨 짓이든 해야죠. 그게 저를 대상으로 한 거라면 더 좋은 일이고요. 편집돼서 그렇지 사실은 훨씬 심해요. 지금 후배들이 저를 까는 것은 그들이 웃음코드 한 가지를 제대로 찾은 거예요. 저는 또 다른 걸 찾아야죠.”
Q: 그런 후배들에게 밀려나는 느낌이 있을 텐데, 솔직히 기분이 어떠십니까? 강호동씨는 연예대상을 받고 ‘이경규씨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이경규씨가 범을 키운 셈 아닙니까?
“대중은 어차피 새로운 사람, 새로운 트렌드를 원해요. 그러면 나도 그들도 밀려가고, 그걸 메우는 새로운 사람이 또 나타나겠죠. 거기서 살아남는 것, 그것이 중요할 뿐 새로운 파도를 시샘할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나는 호동이가 한 수상소감이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짐작하는 이상으로 호동이와 나는 인간관계가 끈끈해요.”
Q: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굉장히 싫어하는 말입니다. 떠나면 뭐해요? 떠나서 잘된 사람 누가 있어요? 잘나갈 때 죽어야지, 박수가 다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남아있다가 박수가 사라지면 떠나야죠. 대중은 과거를 기억하지 않아요. 자존심도 필요 없어요. 내 직업인데, 죽어라고 계속해야지, 그러다 안 부르면 가서 ‘요새 나 왜 안 불러주느냐’ 물어도 보고 그래야지, 박수칠 때 떠나라면 안성기도 떠나야 하고, 유재석·장동건도 떠나야 하게요? ‘박수칠 때 더 잘해라’가 맞아요. 난 절대 안 떠나요.”
Q: 양심냉장고가 히트친 후 일본 유학을 했죠, 이유가 뭐였죠? 단순히 재충전이었나요?
“아이고, 말도 마세요. 양심냉장고 하고부터요. 사람들이 저보고 ‘이경규 선생님’이라고 했어요. 검찰에 강연도 오라고 하고요. 무슨 ‘시대의 양심’이라나. ‘아이쿠’ 싶었죠. 그래서 일본 프로그램 공부도 할 겸 공부하러 갔죠. 그때 ‘양심’이라는 이미지에 제가 도취되었다면 지금 저는 없어요. 대중은 연예인의 역할과 실제를 구분하지 않아요. 그건 독배죠.”
Q: 그런데 연예인들은 그걸 착각하는 수가 많지 않나요? 이경규씨도 지난 대선 때 MB 지지 연예인이었잖아요?
“전 정치적인 견해가 없어요. 견해가 있으면 계속 쭉 해야죠. 김장훈처럼 계속 선행하고, 안치환처럼 사회성 짙은 음악 계속하고, 배가 고파도 소신을 지켜야죠. 그냥 한번 해보는 말, 편승하는 건 영합이죠. 그거야 말로 착각인 겁니다. 예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책을 내셨는데 제목이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인가 그래요. 그때 기념회에 초대를 받았는데 안 갔어요. 하지만 가끔 인간관계란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있어요. 이름 올린다고 하면, 거절 못하는 경우도 있죠. 저는 성향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그래서 제게 무슨 덕이 되겠어요. 하지만 가끔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죠.”
(장자는 글은 뜻을 다 담을 수 없다고 했다. 이 글도 그럴 것이다. 특히 개그맨의 발언이라 농담과 진담이 함께 뒤섞여 있어, 문장으로만 보면 부적절한 언사라고 오해받을 수도 있다. 그는 대단히 유머러스한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가혹한 질문을 연속적으로 쏟아냈다. 웃음 뒤에 숨은 진실,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3. 꿈의 의미
Q: 세간에 이경규씨가 연예권력을 손에 쥐었다는 말이 돌던데, 후배들을 키우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까?
“그건 아니에요. 저는 권력이 없어요. 물론 이런 친구 한번 써보면 어떨까? 추천할 때는 있죠. 하지만 진짜 쓸 만해야 받아들여집니다. 제가 추천한다고 PD가 써요? 저도 잘리는 판에? 물론 제가 진행하며 호흡을 맞추는 데 필요한 친구들은 아무래도 제 의견을 존중하기도 하죠. 그 외에는 없어요. 무슨 라인이니 하는 것도 웃음코드의 하나일 뿐이에요.”
Q: 그래도 이경규씨가 이끈 후배가 많지 않습니까? 그들이 혜택을 입었다고 여기지 않을까요? 또 누군가는 끌어주기를 바랄 거고요. 그 자체가 권력 아닌가요?
“우리 누나가 조카를 데뷔시켜 달라고 부탁하기에 단칼에 거절한 적이 있어요. ‘내가 부탁한다고 다 배우가 되면 최불암 선생님 주변사람은 모두 탤런트겠다’ 그랬죠. 재능이 있어 보이는 친구에게 조언하거나, 누군가에게 추천해주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죠. 만약 그것도 권력이라면 할 말이 없는 일이고요.”
Q: 여러 가지 사업을 하시는데 이제 돈은 어느 정도 버시지 않았나요?
“물론 어느 정도는 벌었죠. 하지만 제 진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해요. 사업이 꿈이 아니라 그것은 꿈을 이루기 위한 발판이죠.”
Q: 그 꿈이 영화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처음에 ‘복수혈전’으로 망가지고, 뭐 사실 크게 망가진 것도 아닌데, 후배들이 개그 소재로 쓰는 바람에, 거참…. 하여간 그래서 다음이 더 힘들었어요. 영화로 말아먹었다는 편견 때문에.”
Q: 영화에 왜 그렇게 집착하나요? 연극영화과 출신이라는 자긍심인가요, 아니면 개그맨이라는 꼬리표가 부담스러워서 그걸 떼내려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개그맨 오래하려면 웃기기만 하면 되지만 사실은 그게 더 어려워요. 영화는 판이 크죠. 보여줄 수 있는 게 많아요. 그리고 영화는 진짜 어려워요. ‘복면달호’도 3년 준비해서 겨우 나왔고, 이번에는 시나리오 작업만도 2년은 걸릴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이미 ‘복면달호’에서 조금 번 돈을 다 까먹었죠. 그런데도 영화는 남아요. 명작이 있는 거죠. 노래도 남죠. 사람들이 비틀스를 기억하잖아요. 그의 노래를 부르고 추억하고요. 하지만 개그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Q: 남지 않는다. 그것이 영화에 대한 애착의 본질입니까? 의미를 찾고 싶으신 거.
“이주일 선배 말입니다. 그분 최고였잖아요. 그런데 돌아가시니 금방 잊어버리더군요. 활동 안 하면 우리는 잊혀져버리죠. 결국 그 순간밖에 없더군요. 예술가는 남는데, 연예인은 남지 않아요. 우리가 가끔 젊을 때 본 영화 이야기하면서 추억에 젖잖아요. 하지만 아무도 그 시절 코미디 얘기는 안 하죠. 조용필 형님 같은 분은 공연을 하시면 지금도 구름같이 팬들이 오죠. 하지만 개그맨은 나중에 공연하면 아무도 안 와요. 저는 뭔가 남기고 싶어요.”
(인터뷰가 주는 긴장과 웃음이 교차하던 공간에 습기가 내려앉았다. 그가 자세를 고쳐 잡았고, 어느덧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그는 갈망하고 있었다. 그것이 편견에 대한 소리 없는 저항이건, 아니면 호소이건, 그것도 아니면 아예 한 편의 코미디이건 간에,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대중에게 기억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듯했다.)
4. 개그맨으로 산다는 것
Q: 개그맨으로 살아가면서 어떨 때 비애를 느끼시나요?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에서 누가 타요. 혼자 심각하면 ‘개그맨이 왜 안 웃니?’ 이런 반응을 보여요. 그럼 속으로 이렇게 말하죠. ‘너는 심각할 때 웃니?’ 그러다 다음 사람이 타요. 그리고 폰카를 꺼내면서 나를 보고 웃어요. 그땐 우울하죠. 그런데 더 문제가 뭔지 아세요? 그 순간에 나를 보고 안 웃으면 그게 진짜 문제예요. 이렇게 두 가지 가치가 공존하죠. 그래서 보통 때 밖에 잘 안 나가요.”
Q: 사생활에 제약도 많겠군요?
“연예인은 말이죠, 뜻밖의 일로 흥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어요. 그게 어디서 터질지 몰라요. 어디 가서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상대방이 ‘인터넷에 글을 확 올려버릴 거다’고 말해요. 그럼 꼬리를 내려야죠. 손해보고 살아야죠. 그래서 늘 조심조심하죠. 사람들이 연예인보고 ‘딴따라’라고 부르잖아요. 그리고 사생활보고는 ‘쟤 왜 저래?’ 하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죠. ‘쟤 왜 저래’가 아니라 걔는 원래 그런 거예요. 그런 끼로 이 일을 하는 거예요. 딴따라는 딴따라 끼가 있어요. 그런데 대중은 고도의 정신적 가치를 요구하죠. 그러니 그저 조심조심해야죠.”
Q: 사적인 질문을 하나 드리죠. 남의 애경사에도 잘 안 가지만, 자신의 애경사에도 초대를 안 한다면서요? 심지어 본인 결혼식에도 초대를 안 해서 연예인이 고작 9명 참석했다면서요.
“어, 더 많은데. 어쨌건, 남에게 피해 주는 것 같고 괜히 오라 가라 하기 싫어요. 그래서 안 불러요. 남의 경조사도 마찬가지예요. 누가 그냥 전화해서 결혼한다고 하면 안 가요. 찾아와서 직접 초청장을 주면 가죠. 내가 오는 걸 진짜 원하는데 안 갈 이유가 없지만, 괜히 형식적으로 언론에 눈도장 찍으러 가는 들러리 같은 건 싫어요. 그런 인간관계란 다 형식적인 것이잖아요.”
Q: 인생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꼼꼼하고 철저하지 못했어요. 이기적으로 살지 못한 게 후회가 돼요. 매사에 그래요. 아무리 잘나갈 때도 출연료 좀 올려달라는 소리도 못했어요. 좋아서 하는 일이라 그러기 싫기도 했고… 지나고 보니 후회되는 점이 없지 않아요.”
Q: 가장 고통스러울 때는 언제였습니까?
“아무래도 인기의 기복이 있을 때죠. 극복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죠. 옛날에는 제가 자존심이 강했어요. 제가 하는 프로그램이 재미없으면 거리에도 안 나가고 집에만 있었어요. 재미없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요. 심지어는 ‘일밤’에서 밀려난 적도 있었어요, 문자 그대로 까인 거죠. 이휘재·이문세·이홍렬이 진행하고 저는 떠돌았죠. 그런데 ‘일밤’이 제가 없어도 너무 잘나가더라고요. 그 후 2년간 변방을 떠돌았죠. 그러다 ‘이경규가 간다’와 ‘양심냉장고’로 돌아왔어요. 일본 갔다 와서도 좀 헤맸어요. 그때마다 힘들었죠. 하지만 그게 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오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Q: 자신의 지난 삶에 점수를 매기면 몇 점을 주시겠어요?
“음, 65점요.”
Q: 지나치게 낮은데요, 겸손 아닙니까?
“아닙니다. 지금은 그래요. 하지만 5년 후에 진짜 그림이 나올 것 같습니다. 만약 그게 제대로 안 나오면 나는 망하는 거고, 그러면 낚시나 하면서 소일해야죠. 그래서 사실 이제 시작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진짜 인생의 승부를 걸기 시작하고 있어요.”
Q: 그 승부가 뭔지 이야기 안 하실 거죠?
“당연한 말씀, 먼저 말로 할 것이 못 돼요. 지켜봐 주세요.”
솔직히 인터뷰 전에 만난 그의 첫인상이 그리 좋았던 편은 아니었다. 컨디션이 나쁜 탓인지 얼굴은 지쳐 보였고, 진행이 여의치 않으면 스태프들에게 간간이 짜증을 드러냈다. 하지만 막상 카메라만 돌아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래서 천생 개그맨이었다. 그는 변화만이 살길이라고 말하지만, 최근의 위기는 기실 그 변화가 부족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는 시청률이 높았다고 강변했지만, ‘돌아온 몰래카메라’ 앞에 붙은 ‘돌아온’이라는 수식어가 상징적인 사례다. 같은 강물에 발을 담가도 강물은 그때 그 강물이 아니다.
하지만 인터뷰 뒤 그에 대한 호감이 급상승했다. 이경규는 말 그대로 쿨하고 솔직했고, 확고한 자기 철학을 가진 사람이었다. 헤어지며 악수를 할 때 사전 취재를 위해 만났던 한 원로 방송작가의 말이 생각났다. “경규는 재능은 천재가 아닐지 몰라도, 노력 하나는 정말 국보죠.”
글=박경철 donodonsu@naver.com
사진=권혁재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