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o Yong Pil/YPC Article

[정홍택의 지금은 말 할 수 있다 ] 조용필이야기

작은천국 2008. 8. 1. 14:58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7>조용필 이야기

대마초 사건으로 실의 빠진 조용필 재기 엿봐
"내 동생" 뉴욕서 식당하던 누나와 뜻밖 인연
카네기홀 공연 성사 시키려 발벗고 나서기도


가수 조용필이 해금된 이듬해인 1980년 나온 1집 음반(오른쪽)과 최근 그의 공연 모습.

조용필이 얼마 전 기자회견에서 “제발 나를 국민 가수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그렇다. 옳은 말이다. 국민 가수라는 말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용필 뿐만이 아니라 다른 가수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아가서 국민 배우니 국민 여동생이니 하는 말들을 쓰지 않아야 한다. 이러다간 국민 아버지, 국민 어머니, 국민 아저씨, 국민 아줌마, 국민 누나 등등 마구마구 나오게 될 판이다. 국민 가수라고 불리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는 조용필의 판단은 옳았다.

그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노래도 잘 하고 가수로서 또는 스타로서 품위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인기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조용필이라는 스타가 탄생할 때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본인은 알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적지만 내 도움도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가수가 데뷔할 때 아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 하지만 조용필이 가수 생활을 시작할 무렵, 즉 지금부터 30년, 40년 전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원더걸스라든가, 소녀시대 같은 화려한 데뷔는 꿈도 꾸지 못할 시절이다.

1968년에 만 18살의 조용필이 조용히 데뷔를 한다. 미군 부대에서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그룹사운드의 한 멤버가 된 그는 모든 그룹들이 다 그렇듯이 비틀스의 음악을 모델로 삼다가 자기 것을 만들어 가기 시작 할 무렵 충격적인 대마초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조용필은 대마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때는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절이었고, 또 어쩌면 그 사건이 전화위복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는 새로운 인생 설계를 하게 된다. 서울 명동 2가 사보이 호텔 뒤편 골목길에 있는 별로 크지 않은 규모의 클럽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75년, 나는 미국 뉴욕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자주 가던 선지 해장국집이 맨해튼에 있었다. 식당이름이 인천집이었다. 어느 날 이 식당 주인 남자가 나한테 “신문기자시니까, 혹시 조용필이라는 가수를 아십니까?”하고 물어 왔다. “조용필이요? 알지오. 내가 기사도 썼는데요?” 내가 조용필이란 가수를 안다고 하니까, 이번엔 안 주인까지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안 주인이 조용필의 친 누나라는 것이다. “가수를 그만 두라고 그렇게 야단을 치는데도 말을 안 들으니 어쩌면 좋아요?” 조용필 누나의 말이다. “대마초인지 뭔지 피우다가 잡혀 들어가지를 않나, 비싼 기타를 산다고 돈 때문에 고생을 하지 않나. 속상해 죽겠어요.”

더구나 며칠 전에는 편지를 보내 왔는데 미국에서 전자 오르간 좋은 것으로 하나 사서 보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알아보니까 값이 굉장히 비싸던데 이거 사서 보내 줘야 할까요? 가수로서 크게 된다는 보장이 있으면 사서 보내 줄 텐데, 지금으로 봐서는 영, 아닌 것 같으니 말입니다.” 조용필 매형의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 두 말 없이 사서 보내 주라고 했다. “나중에 유명한 가수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가수 되기를 포기 하지 않는 한 악기는 좋은 것을 가져야 하니까, 보내 주구려. 더구나 누나 매형이 이 고생하면서 번 돈으로 사서 보냈다는 것을 알면 더욱 열심히 노력 할겝니다.”

얼마 후에 전자 건반악기 한대가 한국으로 보내졌다. 조용필에게는 이 악기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몇 달 후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발표 되었고, 조용필이란 이름이 만 천하에 알려 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일본 사람들도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 진출을 한다. 일본에는 영화배우 최지희가 요식사업으로 크게 성공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조용필의 일본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이를테면 스폰서 역할을 한 셈이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또 엉뚱한 일을 기획했다. 그 당시만 해도 세계 최고의 공연장인 “카네기 홀” 무대에 조용필을 세워 보자는 기획이다. 그의 인기가 한참 올라가고 있을 때 카네기 홀 공연이 그에게는 큰 홍보도 되고 뉴욕에 사는 교포들에게 큰 위문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우선 장소 섭외를 하고 날짜를 잡아야 한다. 맨해튼 57번가에 자리잡고 있는 카네기 홀은 1891년에 개관을 했다. 처음에는 그냥 “뮤직 홀”이라고 불리웠는데 1898년에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가 이 건물에 큰 돈을 희사하면서 이름을 “카네기 홀”이라고 붙였다. 흔히 볼 수 있는 신식으로 된 멋쟁이 건물이 아니라 얼핏 보기에는 우중충한 낡은 빌딩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영광이다. 오직 클래식 음악에게만 대관을 할 뿐 대중음악에게는 문을 열지 않다가, 비틀즈가 공연을 했다. 비틀즈 공연 때에는 맨해튼 중심의 교통이 완전히 마비가 되었다.

2,000석 쯤 되는 메인 홀이 있고, 그 옆에 300석 규모의 리사이틀 홀이 있다. 나는 작은 홀이 아닌 메인 홀을 대관하기로 마음먹고 대관 책임자를 찾아 갔다. 한국의 클래식 가수라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고, 대중가수인데 한국에서 무지무지하게 인기가 있는 가수이니 메인 콘서트 홀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빌려 달라고 했더니 더 이상 말을 들을 생각도 않고 거절을 당했다.

이쯤에서 대충 물러설 내가 아니다. 자료를 만들었다. 우선 뉴욕에 살고 있는 교포들의 숫자와 그들의 문화 수준이 아주 높다는 점, 그리고 한국의 노래는 한이 들어 있어서 카네기 홀의 명성에 흠을 내지 않을 것이니 재고를 해 달라는 내용의 문서를 만들었다. 조용필의 프로필과 연주 경력 등도 빠뜨리지 않았다. 물론 대마초 사건은 제외했다.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8>조용필 이야기 두 번째

카네기홀 관객옷차림·노래 레퍼토리 등 깐깐한 조건…
혼자 끙끙 앓다 결국 사인하고 미주한국일보에 홍보기사
"조용필 보자" 필라델피아·보스턴 동포까지 원정 흐뭇


조용필이 올해 5월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4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열창을 하고 있다.

조용필은‘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기가 급상승을 하고 있었지만 카네기 홀 무대에 서기까지는 난관이 많았다.

조용필을 카네기 홀 무대에 세우려는 나의 노력은 계속 되었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 해둘 것이 있다. 처음에는 조용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이미자, 또는 패티김을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하도록 기획했다. 그리고 나서 그 공연이 성공을 하면 연속해서 ‘Korean Artists in Carnegie Hall’이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공연을 기획 했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모든 좋은 일에는 항상 장애물이 등장 하게 된다. 이 두 가수에게 그 무렵 이런저런 개인적 사정이 있어서 힘들 것 같아 조용필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조용필은 노래도 잘 부르지만, 운도 따르는 것 같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기가 상승을 하고 있지만 아직 톱클래스 가 되지 않은 상태의 가수가 카네기 홀 무대에 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본인에게는 최고의 가수로 올라가는 아주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봐야한다.

문제는 카네기 홀이 그렇게 호락호락 않다는 점이다. 대관 심사에서 한번 탈락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철저히 준비를 해 가지고 다시 책임자를 찾아 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책임자가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동양사람 하나가 열심이 뛰어 다니는 것이 딱해 보였나? 서류를 놓고 가서 며칠 기다리라고 했다. 한 일주일 정도 지났나, 카네기 홀 측에서 연락이 왔다. 대관 심사를 통과 했으니 계약을 하자는 것이다. 내가 무대에 서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신이 나던지, 즉시 달려갔다.

흥분된 마음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려고 하니까, 매니저가 서두르지 말고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라고 했다. 계약 조건을 잘 보라는 것이다. 차근차근 들여다보면서 나는 “이거 골치 아프게 생겼구나”라고 생각했다. 조건이 아주 까다로웠다. 음향, 조명, 무대 관리 등등 모든 부대시설과 그에 따르는 인원은 모두 카네기 홀 측이 제공한다. “노래 레퍼토리는 사전에 제출 해야하고, 공연 도중에 노래 순서를 바꾸지 말아야 한다. 공연 시작 시간은 칼같이 지켜야 하고, 앙코르가 많아서 끝나는 시간이 길어지면 노조와의 협약에 따라 오버타임 노임을 추가로 내야한다. 노래를 녹음하거나 녹화 할 때에는 돈을 따로 더 내야한다.”

이건 정말이지 장난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지킬 수 있지만 그 다음 조건에는 입을 벌릴 수밖에 없다. 관객들이 블랙 타이, 즉 턱시도를 입고 오든지 아니면 최소한 정장을 하고 들어오도록 권장을 하라는 것이다. 카네기 홀의 전통인 모양이다. 우리나라의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 그런 조건을 내 세울 수가 있을까?

어쨌거나 그런 까다로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약서에 덜컥 사인을 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에서 사인을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모든 책임을 내가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즉시 서울로 왔다. 조용필을 만나서 사인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가 전속으로 있던 지구레코드사의 임정수 회장을 만났다. 해리 벨라폰테처럼 실황 녹음 디스크를 내자고 제안을 했다. “조용필 카네기 홀에 서다”라는 타이틀로 레코드도 내고, 비디오도 발매 하자는 것인데 사업 판단이 빠른 임 회장은 즉시 오케이를 했다.

조용필에게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말해 놓고 나는 다시 뉴욕으로 갔다. 그리고 그의 누나와 매형을 만나서 공연 티켓을 얼마에 또 어떻게 판매 하는 것이 좋을지를 의논했다. 미주 한국일보에 기사와 광고를 내고, 뉴욕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 매표를 하도록 했다. 홍보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뉴욕 한국일보가 많이 도와주었고 조용필의 누나와 매형이 앞장서서 뛰는 바람에 표 파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터졌다. 녹화를 하거나 상업용으로 녹음을 하려면 다시 돈을 내라는 것이 카네기 홀 측 이야기다. 그 돈이 만만치 않았다. 이거 큰일 났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나는 노조 위원장을 찾아 갔다. 아마추어식 녹음이 아니라 디스크용으로 녹음, 녹화를 해야 하는데, 한국시장이 미국처럼 큰 것이 아니니까 협조해 달라고 했지만 요지부동이다.

교포들이 낸 입장료 수입만 가지고는 조용필과 악단 멤버들의 왕복 비행기 표 값이나 체재비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인데 추가비용을 내라니까 주저앉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노조를 찾아 갔다. 혼자서 왔다갔다하는 것이 안돼 보였는지 싱글 레코딩을 하라는 것이다. 멀티 채널로 하지 말고 단순 녹음을 하라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하면 디스크를 내는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더구나 녹화를 하려면 카메라를 한대만 쓰라는 것이다. 또 사정사정해서 카메라 두 대 쓰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젠 문제가 없으려니 했는데 또다시 문제가 생겼다. 조명 플랜을 만드는데 기본 조명을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추가비용을 내라는 것인데, 말인즉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이 들지만 매우 야속했다.

이런저런 어려움을 조용필에게 얘기 해봐야 노래 부르는데 지장만 생길 것이어서 나 혼자 끙끙 앓기로 했다. 공연 날은 다가왔다. 뉴욕, 뉴저지는 물론이고 인근 필라델피아, 워싱턴DC, 보스턴 등지에서도 공연을 보러 왔다. 지금 내가 기억하기로는 관객들 가운데 점퍼나 티셔츠 차림으로 온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공연 시작 전에 계속해서 들어오는 관객들을 보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9>조용필 이야기

조용필 보러 표 없이 워싱턴DC·LA서 온 사람들
책임자 찾아 통 사정… 보조의자 50개 겨우 허락
끼에 노력까지 겸비… 앞으로의 활약에 기대 높아


▲ 카네기홀 공연이후 25년이 지난 2005년 8월23일 평양 류경 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조용필 광복 60주년 기념공연’ 에서 열창을 하는 조용필과 환호를 보내는 북한 관객들.

▲1980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있었던 조용필의 라이브 공연 앨범.

카네기 홀에서 한국 가수가 공연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흥분되는 일이다. 그래서 그렇기도 하고 인기가 막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조용필을 보기 위해 정말로 많은 교포들이 찾아왔다. 문제는 이 부분이다. 미리미리 예약을 한 사람들이야 걱정이 없지만 그냥 현장에서 표를 사겠다고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자, 이 양반들을 어찌한단 말인가. 더구나 청소년소녀들을 어찌한단 말인가. “표 없으니까 미안하지만 그냥 가십쇼”라고 할 수도 없고 아주 난처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100명이 넘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또 관리 책임자를 찾아 갔다. 어쩌구 저쩌구---그러니 부탁 좀 합시다. 보조의자를 복도 사이사이에 놓읍시다. “예? 당신 미쳤소? Are You Crazy?"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녹화 카메라 설치하는거나 조명등 갖다 놓는 것은 협조 할 수 있지만 객석 보조 의자는 “Are You Crazy?”라는 것이다.

그래, 난 미쳤다. 당신 같으면 안 미치겠냐? 밖을 좀 봐라.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할래? 워싱턴DC에서 오고 LA에서도 왔다. (사실 LA에서 일부러 온 사람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나는 통 사정을 했다. 실제로 그때 난 약간 미쳐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정확한 숫자는 기억이 안 나지만 50개 정도의 보조의자를 갖다 놓을 수 있었다. 녹화 카메라 바로 뒤에서는 사람이 앉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대신 보조의자를 허락한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런저런 어려움은 나하고 조용필의 누나와 매형이 겪으면 되고 가수는 열심히 노래만 잘 하면 되는 일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런저런 어려움을 말 하지 않았다.

역시 조용필이었다. 무대와 객석이 하나가 되어 훌륭한 공연을 마쳤다. 역사적인 카네기 홀 공연을 국내가수 최초로 해내었다는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객석을 가득 채운 교포들도 가슴 뿌듯한 감동을 안고 돌아 갔다. 그런데 문제는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내가 아닌가. 애초에 모든 경비는 매표한 돈으로 커버가 되지만 추가로 들어간 경비는 어쩔 것인가? 또한 녹음 상태도 안 좋고, 녹화된 비디오 품질도 안 좋고, 지구레코드 임정수 회장은 마음에 안 든다고 얼굴 찡그리고 있고…. 나는 뉴욕-서울을 왔다갔다 몇 번 하느라고 돈만 쓰고.

결국 나는 쪽박만 찼다. 그러나 그렇게 큰일을 기획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고 조용필이 오늘날 대 가수가 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 것이 기분 좋은 일이다.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1983년인가. 나는 한국일보의 월간 편집국장(출판국장)을 하고 있었다. 이 무렵은 전두환 정권시절이었는데 사회의 저명인사들, 즉 정치계의 유력 인사들, 재계의 총수들, 군 장성들, 신문 방송의 국장급이상, 종교계 지도자들, 대학교 원로 교수들, 문화예술계 원로들, 고참 판검사들 등등을 뽑아서 경기도 판교에 있는 정신문화연구원에 입교를 시켜 한국의 역사와 정신, 전통문화 등에 관한 교육을 받고 원생들 간에 친목도 도모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도 그 속에 뽑혀 들어갔다.

우리 동기 원생들 속에는 불교계의 큰 스님인 월운 스님이 계셨다. 이분은 불교 역경원 원장을 하고 계셨고, 광릉내에 있는 큰 사찰인 봉선사의 방장 스님이신데, 하루는 나한테 이런 질문을 하셨다.

“정 부장, 뭐 하나 물어 봅시다.” “스님, 잠깐만요. 부장이 아니고, 국장입니다.” “아, 그래요? 부장이 더 높은거 아닌가? 난 높여 부른건데. 중앙정보부 좀 봐. 부장 아래에 국장들이 있던데.” 이런 분이다.

그 스님이 하시는 말씀. “조용필이라는 젊은이가 날 찾아 와서 절에서 결혼을 하고 싶은데 주례를 서 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서 줬는데, 뭐 하는 젊은이인지 아슈?” 나는 기가 찼다. “아니 뭐하는 친군지도 모르고 주례를 서 줘요?” “젊은 녀석이 와서 간절히 부탁 하는데 뭐하는 친군지는 알아서 뭐해. 잘 살면 되지.” “가수예요. 가수. 그것도 아주 유명한 가수.” “어쩐지 자가용이 수 십대 오더군. 내가 TV를 안 보니까 모르지 뭘.” 잘 살면 되지 라고 말씀 하신 큰 스님의 바램은 무산 되고, 조용필은 얼마 후에 이혼을 했다. 그때 그 여인은 박지숙씨였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국회의원 박모씨의 딸이다.

조용필은 과연 어떤 가수일까. 국민가수라는 수식어는 본인도 싫다니까 없던 걸로 하고, 어떤 이는 최고의 아티스트, 가왕 등등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또는 거저 찾아 든 것이 아니다. 내가 대학 가요제의 심사위원을 할 때, 마침 조용필과 함께 심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노래를 아주 썩 잘 부르는 K대학 남학생이 있었다. 나는 그 학생에게 대상을 주자고 제안을 했다. 그랬더니 조용필은 생각이 달랐다.

“선생님, 저 학생이 분명히 노래를 잘 부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끼가 안 보이네요, 끼가요. 선생님 어떻게 보세요, 그 점을.” 정말 그랬다. 프로가 되려면 ‘끼’가 생명이다. 조용필은 그걸 중요시 여긴 것이다.

흔히들 그를 천부의 소질, 타고난 가창력이라고 말 하는데, 그건 약간 빗나간 것 같다. 지독하게 노력해서 만들어진 가수이고, 가창력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끼’를 타고난 것이라고 말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대학 가요제에서 노래만 잘 하는 학생에게 대상을 주기 싫어했던 것이다.

사실 그의 노래를 주의 깊게 들어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끼로 옷을 입혔다는 걸 알 수 있다. 창밖의 여자, 킬리만자로의 표범 같은 노래를 들으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를 때하고 크게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는 수많은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약간씩 창법을 달리하고 있다. 자칫하면 생길 수 있는 지루함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다.

조용필, 그는 ‘끼를 타고난 노력하는 가수’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인간적인 고뇌가 어찌 없을 것인가. 결혼의 실패, 다시 결혼하고 부인과 사별하고. 군중 속의 고독을 그도 느낄 것이다. 그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기사출처 :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7/h200807220249258480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