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o Yong Pil/YPC Article

조용필 "데뷔 40년? 그거 숫자에 불과해요"

작은천국 2008. 4. 13. 12:59

데뷔 40주년을 맞은 조용필(58)을 지난 4일 서울 역삼동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금요일 오후 강남은 자동차 지옥이다. 그 지옥을 빠져나와 식당에 도착하니 환갑을 눈앞에 둔 가왕(歌王)이 먼저 도착해 숯불에 등심을 굽고 있었다.

조용필은 3시간 공연을 히트곡으로만 채울 수 있는 대한민국 대표가수다. 국내 최초로 음반 판매량도 1000만 장을 넘겼다. 올림픽 주경기장을 채운 4만5000여 관객을 폭우 속에 꼼짝 못하게 가둬둘 수 있는 마력(魔力)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기자는 2002년부터 조용필과 알고 지내왔다. 조용필 역시 기자를 동생처럼 대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번 인터뷰를 '공적인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오늘은 공식 인터뷰니 그간 물어보지 못한 것을 물어볼 겁니다.

"무슨 소리야? 그런 게 뭐가 있어?"

―데뷔 40주년 인터뷰니까 그동안 못 듣고 못 쓴 얘기를 좀 해주시죠.

"물어보세요, 뭐든지. 허허허."

긴장을 만들어보려는 수작을 그는 허허실실 넘겼다.

▲ 고교 시절 외국 음악의 영향으로 기타를 처음 잡은 조용필이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끊임없이 자신을 단 련시켜 최고의 뮤지션 자리에 오른 그는“최고의 비 결 같은 것은 없다. 오로지 연습, 연습뿐이다”라고 말 했다.
―이런저런 '신화'가 많습니다. 예전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엄청난 개런티를 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한 적도 있다면서요.

"아, 그거? 90년대 초쯤인가, 30회 출연에 25억원 주겠다고 했지. 그때 한 이틀 갈등을 했던 게 사실이에요. 액수가 워낙 크니까. 그렇지만 당시 밤무대는 물론이고 방송도 일절 않겠다고 선언을 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어. 공연만 하겠다고 결심한 뒤 밤무대에 서는 건 나를 배신하는 거지."

한 회 출연에 서너 곡 부르고 내려오는 나이트클럽 무대는 당시로선 많은 가수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90년대 초 개런티로 25억원이면 요즘 시세로 50억원을 훨씬 넘는다는 게 음악계 사람들의 말이다. 그 당시 조용필은 전국 체육관 공연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관객이 적었다고 했다.

그는 "어떤 도시에 가면 관객이 절반밖에 차지 않았다. 히트곡도 많고 인기도 있는데 왜 객석이 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이 안 왔다"고 했다. 그런 불면(不眠)을 뚫고 온 거액의 밤무대 스카우트 제의를 그는 냅다 차버린 것이다. 최고가 되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이다.

예술가들이 대개 그렇듯 조용필은 자신을 최고의 음악인으로 여긴다. 스스로 그렇게 말한 적은 없으나 음악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그 자부심은 천재적인 자신의 음악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용필은 악보를 한 번 보면 노래를 부르고, 어떤 노래든 한 번 들으면 바로 악보를 그리는 재능이 있다.

공연기획사 서울기획 이태현 사장의 증언이다. "일본에 처음 진출했을 때였어요. 그때 외국 가수가 NHK에 출연하려면 일본 노래 한 곡을 부르는 게 관례였지요. PD가 일본 노래 악보와 카세트테이프를 가져왔는데 조용필씨가 노래를 딱 한 번 듣더니 '이건 필요 없다'며 테이프를 돌려주는 거예요. 그때 일본인 PD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저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하는 놀람과 과연 한 번 듣고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뒤섞인 얼굴이었죠. 물론 그 노래는 기막히게 잘 불렀습니다."
▲ 지난 9일 서울 서초동에 있는 연습실에서 조용필이 혼자 기타를 조율하고 있다. 수만 명씩 모이는 화려한 무대에 서려면 이렇게 고독한 연습을 한 달 이상 해야한다. /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초견(初見)에 악보를 읽지 못하고, 초청(初聽)에 악보를 쓰지 못하면 뮤지션으로 인정하지 않으시죠?

"그런 건 아니야. 세계적으로 훌륭한 뮤지션 중엔 악보를 전혀 읽지 못한 사람도 많았어요. 그렇지만 그들이 악보를 읽거나 쓸 수 있었다면 더 훌륭한 음악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

경동고 3학년이던 1968년 조용필은 '벤처스'와 '비틀스'에 빠져 살았다. 결국 "음악을 하겠다"며 가출해 미군 클럽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화성학(和聲學)을 독학했다. 종이를 기다랗게 이어 붙여 건반을 그려 넣은 '종이 피아노'로 음계와 화성을 깨우쳤다.

음악에 대한 조용필의 자부심이 워낙 강하다 보니 주변에서 '금기 질문' 중 하나로 꼽는 게 있다. 조용필을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과 비교하는 투의 질문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의외의 대답을 했다.

―신중현씨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말 훌륭한 음악이지.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나왔을 때, 이게 컨트리인지 뭔지 잘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오고 있잖아. 신중현씨가 작곡한 김추자와 펄시스터즈 노래들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 그 당시에 누가 그런 음악을 하려고 했어."

―그런데 왜 신중현씨와 관련된 질문을 싫어한다는 말이 나오나요.

"싫어한 적 없어요. 다만 나와는 음악 색깔과 정서가 달라. 물론 근본적으로는 같지. 추상적인 감정을, 사랑과 기쁨, 슬픔을 음악으로 만들어 내고 뿌리가 록 음악에 있다는 것이 같아요."

그의 40주년 기념 공연(문의 1544-1555)은 5월 24일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다. 그 다음 주말 대전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가 시작된다. 화제는 자연스레 지난 2003년 폭우 속에서 벌어진 35주년 공연으로 이어졌다.

"이건 정말 처음 하는 얘기야. 공연 마지막에 트랙을 한 바퀴 돌았잖아.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승리했다. 내 인생에서 승리했다.' 그 감동은 아무도 몰라. 내가 음악을 한 이래 최고의 날이었어요. 평양 공연도 아니고 그날이 최고였어."

이 말을 할 즈음 조용필은 소주를 몇 잔 넘긴 상태였다. 기자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질문을 해야 했다. 바로 그의 첫 결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1984년 3월 박지숙씨와 느닷없이 결혼을 했으나 3년 뒤 이혼했다.

―박지숙씨와의 결혼의 실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죠?

"그건 나중에 내 회고록에 써야 할 내용이야."

―결혼식에 하객도 없고 기자만 잔뜩 있었잖아요. 뭔가 사연이 많은 것 같은데요.

"나는 그게 결혼식인 줄도 모르고 갔었어."

―그럼 '이런 결혼식은 안 한다'고 했어야 할 것 같은데….

표정이 약간 굳어진 조용필이 말했다. "그때는 매스컴이 너무나 무서웠어."

당시 조용필 나이 서른넷. 연말 방송사 가수왕을 모조리 휩쓸고 6집 '눈물의 파티'를 새로 내놨을 때다. 그 인기 주변엔 어김없이 스캔들로 먹고사는 연예 주간지들이 있었다.

갑작스런 결혼과 그의 일본 진출은 거의 비슷한 시기 이뤄졌다. 그는 이혼 후에 한동안 혼자 살다가 소개로 만난 재미교포 안진현씨와 94년 3월 재혼했다. 미국에서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던 안씨와 한국에서 활동하는 조용필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2003년 1월 조용필은 다시 한번 아내와 이별했다. 심장병을 앓던 안씨가 갑자기 숨진 것이다. 안씨는 조용필의 선산이 있는 경기 화성에 묻혀 있다.

―요즘도 꿈에서 부인을 보시나요.

"요즘엔 안 나타나요. 마누라 가고 나서 한 2년 반쯤은 꿈에 자주 나타났어. 이제 그 사람도 안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