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o Yong Pil/YPC Concert

[2000년 예술의전당] 조용필 , 고독한 runner

작은천국 2007. 2. 14. 22:10

 

[작품해설] 고독한 Runner 조용필 음악평론가/ 임진모

조용필이란 이름은 이제 보통명사라고 하지만 '조용필에 대한 찬사'도 우리 음악팬들에게 이제는 너무도 친숙한 언어들이다. '가왕(歌王)'을 비롯하여 '영원한 음악황제' '20세기 최고가수'등등 우리 역사에서 그만큼 무제한의 칭송을 누려본 음악가는 없을 것이다. 서구인들에게 비틀즈가 그런 것처럼 한국인 치고 그와 그의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그의 음악세례를 받지 못한, 오로지 자기 시대의 스타들만을 최고로 고집하는 신세대들도 유독 그의 이름 앞에서는 숙연해진다.

지나간 그리고 지금의 음악계에서 그가 펼쳐놓은 의미망은 과연 무엇인가. 참으로 싱거운 말이겠지만 그것은 한마디 바로 '음악'이란 말이다. 무엇보다 가수 조용필은 음악이 좋았다. 거기에 그가 씨를 퍼뜨린 오빠부대는 물론이고 만인이 열광했다.

오빠부대란 하더라도 당시 10대 소녀들의 조용필에 대한 애정은 무엇보다 그의 탁월한 노래에서 비롯되었다. 음악 외적 이미지에 붙들린 지금의 오빠부대와는 근본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오빠부대 원조들은 TV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지 않은 다른 조용필의 숨어있는 레퍼토리도 챙겼지만 지금의 오빠부대들은 죽고 못사는 스타라도 거의가 그들의 히트 곡 테두리에 머물러있음을 본다.

 



1980년대 그가 음악천하를 호령하면 우리 가요는 신기원이 열렸다. 서구 팝 음악 일방적으로 맹종하던 시절에 록, 불루스, 소울, 포크, 스댄더드 팝 그리고 우리의 전통음악 등 모든 종의 음악이 그의 손을 거쳐 통합되면서 '한국음악'으로 새롭게 주조된 것이다. 조용필은 '스펀지 같은 흡수력'으로 기존의 음악들을 모두 소화해 자신의 음악으로 전화(轉化)했고 그것은 곧 한국 대중음악의 정체성으로 직결되었다.

그는 실제로 국내 대중음악과 그 음향의 절대 미학을 완성한 인물이다. 그 없이 한국 가요의 재 탄생과 도약을 논하기란 불가능하다. 대중들은 <단발머리> <고추잠자리> <자존심> <눈물의 파티> <그대 발길이 머무는 것에> <꿈> 등과 함께 전에 접해보지 못한 곡의 질(質)과 경이로운 사운드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 곡들에 구현된 장르의 광대한 퓨전 그리고 세션과 편곡에 대한 그의 민감성은 과거에 그랬듯 지금 들어도 여전히 날카롭다.

어디 음악의 질뿐인가. 그를 계기로 음악시장의 규모와 양(量) 이를테면 음반산업도 지금과 같은 형체를 갖추게 되었다. 그는 장르통합뿐 아니라 '세대통합'도 단행해 <일편단심 민들레야>와 <난 아니야>로 '할아버지에서 손녀까지' 전 연령층을 가요구매자로 포섭하면서 음반시장의 덩치를 비약적으로 키워냈다. 그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음악계의 유일한 국민가수로 받아들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 또 그 말이 지닌 상징성도 바로 이 대목에 위치할 것이다.

 

 



그러나 조용필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그것은 근본의 문제인 '음악가는 누구인가'를 따져보면 곧바로 답을 얻는다. 아티스트란 자신의 음악세계와 혼을 진실하게 소리로 풀어내는 사람, 다시 말해 좋은 음악을 창조해내는 사람이다. 수백만 팬이 있던 산에, 레코드사가 어떻든 간에,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든 간에 다 떠나서 뮤지션이 기본적으로 취해야 할 자세는 먼저 '자신이 만족하는 참된 음악'을 만들어내

는 것이다.

팬과 음반회사를 의식하고 판매량을 고려하고 언론에 화려하게 포장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2차·3차 적인 일이다. 만약 이 순서가 도치되어 무게중심이 후자에 있다면 그는 스타일지는 몰라도 아티스트는 결코 아니다. 조용필은 언제나 음악이 먼저인 사람이다. 그의 음악에 대한 욕심과 천착이야말로 그의 첫 번째 미덕이며 바로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음악 판의 '고독한 러너'이다. 평범한 얘기로 들릴 테지만 이것이 바로 후배 뮤지션과 지금의 음악계에 던지는 보이지 않는 경고장이며 동시에 모든 음악인들이 새겨야 할 산 교훈이다.

과거 '위대한 탄생'에서부터 함께 연주해왔던 밴드에 대한 집착은 무엇을 뜻하는가. 과거 음(音)을 터득하기 위해 그가 쌓은 피나는 노력과 공력은 이미 인구에 회자된 터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또 녹음과 공연 관계자들이 질린 정도로 지독한 연습벌레라는 사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입버릇처럼 되뇌던 "죽더라도 무대에서 노래하다 쓰러져 죽겠다"는 말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가. 그 모든 일화들과 사건들이 단
하나의 어휘, 즉 '음악'으로 모아진다.

음악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 그는 좀처럼 늦는 법이 없다. 설령 새까만 후배들과 합동무대에 임할 때도 그는 늘 먼저 와서, 일찍 와서 준비와 점검을 거친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래야 좀더 좋은 음악을 관객에게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구축한 범접불허의 독자적인 음악벨트에도 그렇지만 그것을 가져온 제1의 거름이 음악을 향한 열정임을 확인하면서 객석은 또 한번 감동으로 소용돌이친다.

그는 음악이 사람들을 뭉치게 하고, 과거의 기억들을 잊게 하고, 심지어 사람의 미래를 바꾸는 힘이 있음을 안다. 그는 음악을 사랑한다. 그 음악에 대한 절대적 헌신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그래서 노장의 역습이 빈번한 팝 음악계와 비교할 때 근래 그에 대한 대중들의 음반구매(음악의 최종행위가 이것이다)가 전과 같지 않다는 게 더더욱 아쉽다. 이게 진정상과 동떨어진 우리 음악시스템의 모순 그리고 수요자들의 문제 아닐까.

이번 공연은 늘 그랬듯 또 한차례의 음악환상을 제공할 것이다. 관객들은 모처럼 가수로부터 혼의 울림을 듣게될 것이다. 그것은 '조용필의 힘' 아니 '음악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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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이야기 권혁종/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고독한 러너'라는 이번 콘서트의 제목을 보면서, 몇해 전 특집 기사를 취재하느라 조용필 형과 둘이 차를 몰고 1박 2일 부산에 다녀올 때 일이 기억났다. 돌아오는 길에 필자가 운전하며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점심때가 한참을 지났었다. 별 생각 없이 "밥 먹고 가죠"하고는 가까운 휴게소에 차를 대고 자율식당에 들어갔다. 커다란 식당엔 사람이 많이 않았지만, 일부러 맨 구석 테이블을 골라 앉았다. 아무리 작은 자율식당이라도 '수퍼스타 조용필'이 식판을 들고 돌아다니게 하기는 민망한 노릇이 아닌가. 필자가 식판 두 개를 들고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주위 사람들은 형을 힐끔거리며 뭐라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는 수저를 들며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했다. "나 이런데 처음이야." 순간 필자는
'스타의 비밀'을 훔쳐 본듯한 미안함에 멋적게 웃고 말았다.

누구도 부럽지 않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음악 외길을 걸어온 '한국 대중음악의 거인(巨人) 조용필', 하지만 그는 사람들과 어울려 휴게소 식당에서 마음 편히 밥 한끼 먹는 즐거움조차 포기하
고 살아온 '고독한 스타'였다.

필자가 곁에서 지켜 봐온 '가수 조용필'은 말수가 적고 수줍음을 많이 탄다.. 어느 자리에서건 묻는 말에나 겨우 대답을 할까 속내를 잘 풀어놓지 않는다. 낮 모르는 사람을 새로 만나기도 꺼려한다. 콘서트에서
드넓은 무대와 객석을 목소리 하나로 휘어잡으며 포효하는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다. 하지만 속을 털어 놓을만한 사람들과 마주 앉으면 그처럼 흉금 없고 소탈할 수가 없다.

우리 나이로 쉰인데 아직도 그렇게 세상물정 모를까 싶게 순진하고 세파에 때묻지 않았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을 집으로 불러 소주잔을 기울이며 몇 시간씩 얘기하기를 즐긴다.
소주 반병을 넘기지 않는 요즘도 그 버릇은 여전하다. 그리고 언제나 음악얘기를 즐긴다.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 어떤 뮤지컬을 봤는데 어떤 작품에 얼마나 기가 막히게 좋았느니, 나도 공연 때 그런 걸 보여주고 싶은데 국내에선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어 답답하다느니, 내가 앞으로 해야할 음악은 어떤 것이어야 되지 않겠냐느니, 모든 화제는 결국 음악으로 돌아오고 만다.

조용필 형과 얘기하다가는 가수가 되지 않았으면 무엇을 했을 것 같으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글세 상상이 안돼. 내가 딴 걸 무얼 하겠어?" 그는 또 "음악은 따로 있는게 아니라 내 몸 속에 흐르고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필자는 조용필 형이 음악을 해온 발자취를 되돌아 볼 때마다 이런 대답이 결코 헛말이 아니라는 걸 느끼곤 한다. 조용필 형이 음악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5세가 되던 중학교 3학년 때 손윗 형이 사다놓은 기타를 손에 잡으면서였다. '벤치'와 '비틀즈'를 좋아했던 그는 그 후 선생 없이 독학으로 기타연주 테크닉과 작곡 습작을 익혔다. 하지만 "딴따라는 안된다."는 아버지의 모진 반대에 부딪치자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68년 기타 하나만 들고 가출했다. 7년 반 동안 집안과 연락을 끊고 음악에 빠져들었던 '무단가출'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파이브 핑거스'란 그룹에 기타리스트로 스카우트되어 미8군 무대에 서면서 본격 가요인생을 시작했다. 74년 '조용필과 그림자'를 결성한 조용필의 화려한 음악인생은 76년 '돌아와요 부산항'이 말대로 '공전 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첫 걸음을 내딛었다
"앨범을 낸 지 몇 달이 지나 밤무대에서 느닷없이 이 노래를 신청 받았는데 전혀 준비가 안돼 있어 당황했었다."는 회상이 재미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 노래의 인기 열풍은 부산에서 먼지 일기 시작해 서울로까지 몰아쳐 올라왔다. 방송출현 요청이 잇따랐고, 밤무대에서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