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추억 찾아 나선 골목길 투어
가족들이 다 같이 오랫만에 모이는 추석
이제 다들 나이가 나이인지라 모이면 이상하게 옛날 기억찾기에 소일을 하게 된다.
이번 추석도 예외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동네 지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지명은 '병영' 이라고 불리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병영이라고 사용하지않고
'서동, 동동, 북동, 남외동' 크게는 4개의 행정명이 있었는데
현재는 북동이 서동에 편입되어 3개의 행정명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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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 이란 지명은 '경상좌병영'으로 태종 1417년에 경주에서 울산으로 옮겨왔던 경상좌도의 육군본부였으며
이때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어릴 적 기억을 드덤어 서동, 동동, 북동으로 불리던 동네이름은 그냥 방위가 그대로 지명에
남았다고 생각을 했었지만 어른들은 '너 어디사니?' 라고 할때 '서동삽니다' 라고 하면
'응 서무낭개 사는구나' 라고 말씀을 하시곤 했는데
왜 서동을 서무낭개, 동동을 동무낭개라고 부를까 궁금했었는데
나중에 병영성이 있었고 그중 4개의 문을 기준으로 북문이 있던 곳은 '북동'
서문이 있던 곳은 '서동', 동문이 있던 곳은 '동동',
그리고 남쪽의 성곽 밖은 '남외동' 이렇게 행정 지명으로 남은 것이었다.
최근 새로 바뀌게 되는 행정명은 병영성길로 전부 통일되어 병영성 1길에서부터 9길까지인가로 바뀌어 있었다.
또한 오른 쪽 표지판의 곽남도 행정명에는 '남외동'으로 사용되는데 결국 성곽의 남쪽이라는 뜻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쨋던,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가고 하다가
그런데 도대체 '병영성'은 어딘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는 말에
친오빠가 우리집 뒤로 언덕배기가 전부 성곽이라는 설명을 하는데
어떤 지역은 알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지역은 전혀 기억에도 없고 설왕설래를 하던 중
말난 김에 성곽투어를 한번 해보자는게 발단이 되어 동네 투어를 하게 되었다.
오빠도 나도 명절을 제외하고 고향에 다니러 오는 경우가 극히 손에 꼽는지라
울산에 한 번 다니러 올 때마다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울산은 솔직히 적응이 힘들다.
그 중 가장 적응이 힘든것이 혁신도시때문에 어릴적 뛰어 놀던 산이 몽땅 없어지고
도로가 생겨나고 태화강변 주위로 주상복합 건물로 채워지고 있는 것은 그리 반가운 현상은 아닌 듯하다.
게다가 우리 동네 역시 그 변화 물결을 벗어 날 수가 없는지라
이젠 외지인들의 비중이 훨씬 많아져서 원래 사시던 어르신들 외에는
서울 아파트촌에서 처럼 동네 이웃사촌이란 말은 이미 실종된지 오래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어린 시절 기억을 찾는 '성곽투어'라는 말이 솔깃해서 따라 나섰다.
<사진출처 : 울산박물관 >
집에서 얼마 걷지 않아 도착한 병영성 인근 이다.
설명을 읽어보니 해자도 있었다고 하는데 흔적도 없어져 버렸고
다만 오빠와 기억을 더듬어 우물을 찾는 것만 성공했다.
울산 병영성은
이 성터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영성으로 조선 태종 17년(1417)에 쌓았다. 처음에는 성벽과 여장 등의 기본적인 시설만 갖추었으나, 세종때에 이르러 국방력 강화의 일환으로 4개의 문에 옹성을 쌓고, 성벽이 곧게 뻗은 곳의 방어력을 높이는 적대를 축조하였으며, 성벽 바깥으로 해자도 파는등 시설을 더했다. 사방에 옹성을 갖춘문을 두었고, 성벽의 기단을 두었으며 겹쌓기를 하였다. 둘레는 3,732척 혹은 1,621보로 기록되어 있고, 높이는 9척, 여장높이는 3척이라한다. 성안에 군창과 마르지 않는 우물이 7개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병영성은 민가의 밀집으로 대부분 훼손되었고 사방 문지외에 다른 구조는 현재 알 수가 없다. 다만 서,북,동문지의 경우 주변에 옹성형태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데 동문지의 경우 북쪽부분이, 북문지는 동쪽 부분이, 서문지는 북쪽부분이 각각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문지와 문지 사이의 곳곳에는 사각대지의 곡성, 또는 각루지가 있는데 기단부만 남아있다.
이곳도 국가 문화유적지로 지정되어 복원이 되고 있는 중이라고 했는데
이제 시작단계로 예산등의 문제로 인해 지지부진한 느낌을 받았다.
성곽의 흔적은 곳곳에 이런 식으로 남아 있었다.
이 길은 나도 기억하고 있는 길이었는데 밭의 경계가 되어 있어 그냥 돌담인 줄 알았더니
그게 전부 다 성곽의 흔적이었다니..
이 말에 오빠는 '성곽이 꼭 돌로만 쌓는게 아니다며 토성도 있지 않냐'는 한마디에
완전 깨깽했다... 아놔~~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한거지?
하여튼 새삼스러운 기억찾기 위해 열심히 쳐다보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이렇게 밭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어떻게 성곽이라고 생각을 하겠냐구...
보존 정비를 위해 농작물 경작을 금지 한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곳곳은 농작물 경작이 한창이었다.
성곽으로 올라서니 이 쪽 부분은 복원이 된 듯했다.
별로 높지 않은 성곽이지만 지리상으로 상당히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는 덕분에
저 멀리 화봉동은 발 아래로 보이고
시야를 조금 올리니 울산공항이 한 눈에 들어온다.
늘 그렇듯이 아쉬운 건 주위로 온통 집들이 들어 있어 복원하기도 힘들겠구나 싶다.
이러니 아무리 다녔어도 이게 성곽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으며
기본적으로 성이라면 망루 정도는 있어야하는데 왜 그런것도 없었냐는 나의 말에
오빠 왈... 이 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망루가 있다며 망루를 보여주겠다고 해서 다시 길을 나섰다.
주위로는 온통 강아지풀이 투성이다.
어릴 적 친구들과 장난을 심하게 치면서 활달하게 놀았던 나는 강아지풀에 얽힌 추억도 상당히 많은데...
세대가 다른 우리 오빠도 하는 말..'야~~~ 니네도 그러고 놀았냐.. 우리도 그렇게 놀았다' 며
길을 걸으면서도 서로의 추억 더듬기에 바빴다.
우리 동네도 그랬지만 이 동네도 엄청난 대나무 숲을 자랑하고 있다.
울산은 십리대밭이 있을 정도로 도시 전체가 대나무가 굉장히 많은 곳이다.
어릴적 온 산과 들이 놀이터였던 지라 자연스레 대나무밭에 들어가 많이 놀았는데
바람이 불면 대나무 이파리끼리 부딪치며 사그락 사라락 대는 소리
대나무 이파리에 빗방울이 부딪쳐서 내는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늘 궁금한 건 왜 도시 곳곳에 대나무를 식재했을까 싶은데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한참을 걸으니 드문 드문 다시 또 성곽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곳곳에는 경작 금지표지판이 붙어 있지만 본격적인 정비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아마 계속 이 상태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약 10여분을 더 걸어 오빠가 기억하고 있는 망루가 있는 곳 까지 왔지만
망루는 온데간데 없어진 상태로
'여기가 아닌가?' '저긴가?' '좀 더 가야되나?' '이상하다 아까 거기가 맞는데'
이러면서 여 저기를 헤매다니기를 또 한 참..
결국 흔적도 희미한 성곽투어는 한 30분만에 끝이났고
'야!!! 망루는 둘째치고 동네가 너무 변해서 이젠 내가 궁금해서 오기가 난다'며
생각지도 않게 오빠의 추억 속을 따라 골목투어가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알지도 못하는 오빠 친구들의 이름을 줄줄이 읊어 대면서
여기는 누구집, 저기는 누구집, 저쪽은 용가리집, 이쪽은 00집,,, 이러면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오빠 친구집의 흔적을 찾아 골목 이곳 저것을 헤집고 다녀야했다.
그렇게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면서 내 기억속에도 영원히 잊혀지고 없을 골목이
오빠의 설명을 한참 듣고 나니 '어~~ 나 여기 알어.... 기억났어'를 연발하며 초반은 분위기 화기애애했ㄷ.
근데 저 대문안으로 기와 한옥집 큰 거 있었는데 이젠 없구나~~
양옆으로 신식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요즘에도 이런 골목이 있었나 싶을 만큼 오래된 골목은 딱 이 부분은 고스란히 살아 남았다.
심지어는 정겨운 흙담이 남아 있는 집도 있었다.
이렇게 보니 이 골목이 가물가물하며 와 봤던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
골목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다시 발 걸음을 옮겨 다른 골목을 향해 가 본다.
이 골목은 내 기억에도 존재하고 있는 골목인데
어린 시절에는 이 담이 무척이나 크고 높았다는 생각인데 지금 보니 아무것도 아닌 듯하여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담 넘는 사람을 위해 병을 깨서 박아 놓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오빠의 기억을 따라 이 골목, 저 골목을 쏘다니기도 거의 1시간 30분이 넘어 가고 있는 중이건만..
오빠의 친구 집 찾기를 위한 골목길 투어는 끝날 줄을 모른다.
결국 하다하다 지쳐 투덜거리며
'야!!!! 나는 성곽투어를 나온거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오빠 버전을 하기위해 온 게 아니다'고
볼멘소리를 줄창 해댔건만..
여전히 우리 오빠의 '내 친구 집은 어디인가' 뉴 버전은 끝날 줄을 모른다.
00네 집이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
이쪽에서 00집 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는데 없어졌구나...
00집은 없어지고 달랑 나무만 남았네....
등등등..
'여기가 거기가 아닌가배' 를 열 번도 더 하고 나니
결국,,, 아까 없어진 장소가 내 친구의 집이었는데 그 집 사진을 찍어 왔어야 한다며 안타까워 하며
내 입에서 단내가 폴폴 날 지경이 되어서야 능소화가 곱게 핀 마지막 골목을 끝으로 골목 투어는 끝이 났다.
골목투어를 이렇게 끝낼 순 없다며 찾아간 외솔 최현배 선생님의 기념관
'한글이 목숨'이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기신 외솔 최현배 선생님은
세간의 표현대로 병영이 낳은 한글학자이시다.
어릴 적 국어 책에서 외솔 최현배 선생님이 등장하고 난 뒤 우리 동네 출신이란 걸 알고 신기했었고
외갓집 뒤에 살았다며 엄마가 최현배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실때는 더더더 신기했었더랬다.
삭막한 동네에도 국내 최초의 환글 기념관인 외솔기념관이 생겨있어
한글에 일생을 바친 선생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으니 참 좋은 것 같다.
외솔기념관 : http://blog.daum.net/chnagk/11263895
그리고 외솔기념관에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내가 졸업한 병영초등학교로 올라가 보았다.
물론 집에서도 걸어서 3분이면 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계단도 편하게 바뀌긴 했지만 예전의 큰 돌 계단이 훨씬 더 운치가 있었는데 살짝 아쉽다.
이제는 전부 인조잔디로 깔려 있어서 옛날의 추억과 기억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 옛날 학교 운동장이 유일한 놀이 시설이었던 그때처럼 요즘도 동네 주민들이 운동을 위해 즐겨 찾는 공간이다.
오호... 이게 누구니? 6촌 작은오빠와 조카 혁진이가 한창 공차기 놀이중이다.
일년에 단 두번, 거의 명절때 만나는 6촌 작은 오빠와는 같은 동네에서 자라서 그런지
여전히 초등학교때 보았던 그 옛날 그대로 서로의 기억속에 머물러 있는 듯 하지만....
볼 때마다 쑥쑥 자라고 있는 조카들을 보면 추억은 추억일 뿐 인 듯하다.
이 건물은 얼마전에 새로 지었다고 하는데 건물에도 외솔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학교에는 인조잔디가 깔리고 농구장이 생긴 덕분에 이곳에 있던 미류나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내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곳 병영은 역사적으로도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다.
바로 3.1운동이 이 지역에서 거세게 일어났던 곳으로
병영초등학교에서는 해마다 3.1절을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또한 병영초등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훌쩍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집은 엄마를 제외하고 모두 초등학교 동문이고 친적들 대부분이 동문인지라
초등학교 동창회를 하면 온 친척들을 다 만나는 곳이 되기도 한다.
군포에 살고 있는 조카는 시골이라고 투덜대다가
아버지도 아빠도 고모들도 모두 같은 학교를 다닐만큼 역사가 오래된 곳이란 말에
시골이란 소리는 쏙 들어갔다.
다만 이곳도 학생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해마다 8월 15일 광복절을 기념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동 대항(서동, 북동, 동동, 남외등) 축구대회를 열었는데
지금은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이 곳에 그대로 터전을 잡고 사는 경우가 드물고
외지인들이 워낙 많이 살고 있는지라 선수 멤버 구성하기도 쉽지 않아 동대항 축구대회의 공동체 의미는 퇴색되어
몇 년 전부터 축구대회는 열리지 않고 있다고 한다.
여름 방학 동안 큰 즐거움이자 재미였는데 축구대회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
어쩌면 현대사회의 바로미터를 보는 것이 아닌 가 싶어 많이 아쉬웠다.
산업 도시의 주축이었던 울산이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병영은 농촌의 공동체가 오랫동안 남아 있던 곳이라
내 어릴적 추억을 이야기하면 친구들은 너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리 엄마, 아버지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다며 핀잔을 주기도 했었다.
그 추억을 따라 성곽투어를 하겠다고 나선 길은 결국 오빠의 추억 찾기로 마무리가 되었고
나는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2시간을 넘게 걸어다녀 너무 피곤했지만
집에 들어서니 '어딜 갔다오냐'는 가족들의 말에
성곽투어가 순식간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버전으로 바뀐 골목길 투어를 생각하니
갑자기 웃음보가 터져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항상 집에 다니러 와도 동네를 이렇게 헤집고 다녀 볼 일은 거의 없었던 지라
2011년 추석의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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