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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부작 드라마 노무현 전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인생

작은천국 2009. 5. 28. 11:41

기사출처 : 민중의 소리 http://www.vop.co.kr/2009/05/26/A00000253235.html

'63부작 드라마' 노무현 전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생애

배혜정 기자 bhj@vop.co.kr

 

노무현 전 대통령의 63년 생애는 '63부작 드라마'라고 불릴 만큼 도전과 승부의 연속이었다. 가난, 학벌, 지역주의 타파를 부르짖으며 때로는 무모하게 때로는 타고난 승부사적 기질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정치입문 후 지역주의의 벽 앞에 번번히 고배를 마시기도 했지만 결국 16대 대통령 자리에 올라 '정치적 자수성가'의 표본이 됐다. 우여곡절의 5년을 보낸 노 전 대통령은 퇴임 대통령으로서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겠다며 고향인 봉하마을로 내려간 지 15개월 만에 '박연차 게이트'라는 수렁에 빠져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난과 학벌 콤플렉스 딛고 인권변호사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린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린시절 사진. 앞에서 왼쪽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민중의소리

노 전대통령은 1946년 8월 6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으로부터 10여리쯤 떨어진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농부인 아버지 노판석(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李順禮)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막내인 데다가 재주도 많고 비상한 두뇌를 지녀 '노 천재'라는 별명과 함께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까마귀가 와도 먹을 게 없다'고 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환경에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공부도 잘했고 성격도 명랑한 편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엔 2등, 2학년엔 1등, 절대평가로 바뀐 3~5학년엔 우등상, 졸업식날엔 교육감상을 탔다. 6학년 땐 선생님의 권유로 학생회장에 출마해 전교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경험이 남 앞에 나서는 일에 자신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고 소회했었다.

성격도 대찼다. 교내 붓글씨 대회에선 교사였던 아버지 도움으로 시험지를 한 장 더 쓴 학생에게 1등 자리를 내주고 2등을 하자 이에 대한 항의로 시상식날 2등상을 반납하기도 했고, 중학교 1학년 땐 학교가 3.15부정선거를 얼마 앞두고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란 작문을 시키자 '백지동맹'을 주도해 1주일 정학을 받기도 했다.

진영대창초등학교, 진영중학교를 졸업 후 어려운 가정형편에 부산상고에 진학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삼해공업이란 조그마한 어망회사에 취직을 했으나, 변변치 않은 대우에 실망해 고향에 돌아가 고시공부에 매달렸다. 1966년 10월에 고졸 출신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 시험'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책 값을 벌기 위해 울산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함바'에서 가마니 깔고 자며 받은 일당은 180원. 공치는 날이 더 많아 '밥먹듯 굶기'가 일쑤였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중에 1968년 군에 입대, 최전방 을지부대에 복무한 뒤 71년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고시공부 중이던 1973년 1월 고향에서 같이 자라면서 알고 지낸 권양숙 여사와 연애 결혼을 해 73년 아들 건호, 75년 딸 정연을 낳았다. 두 차례 낙방 끝에 1975년 제 17회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1977년 대전지방법원판사로 임용됐지만 7개월만에 판사 생활을 접고 1978년에 변호사를 개업, 부산지역에서 잘 나가는 조세전문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다. 동아대 요트반 동아리 학생들과 요트를 배울 당시였다.

인생의 전환점을 준 사건은 1981년 '부림사건'이었다. 20여 명의 학생들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었다는 이유로 좌익사범으로 구속기소된 용공조작사건인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게 되면서 노 전 대통령은 조세전문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행방불명된 학생들을 찾아다니던 어머니의 모습, 고문으로 인해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돈'과 '명예'보단 '인권'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바르게 살아야겠다. 비겁하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뒤로 요트반 학생들과 요트를 타던 것도 아예 그만 두었고, 잘 나가던 조세전문가의 길도 접게 되었죠. 그때 얻은 별명이 지금도 자랑스러워하는 인권변호사 '노변'입니다"라고 말했다.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변론에 참여한 노 전 대통령은 84년 발족된 부산공해문제연구소의 이사가 되었고, 85년에는 송기인 신부를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재야운동에 나섰고 '노동법률상담소'를 차린 후 부턴 아예 운동판으로 뛰어들었다. 이어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으며 '부산민주화운동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렸다.

그 해 9월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가 파업 중 거리시위를 나왔다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고 사망하자 노동자편에서 임금협상과 보상 등의 문제를 상담해줬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돼 '3자 개입',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됐다가 23일만에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났다. 당시 부산의 개업변호사가 100명을 조금 넘던 시절 99명의 변호사가 선임계를 내는 화제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검찰의 불구속 기소로 변호사 업무가 정지됐다.

구속 수감중인 노무현 전 대통령

노동자 이석규씨의 시신부검과 임금협상을 거들어 주다 '3자 개입'금지 혐의로 구속 수감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민중의소리


지역주의 벽 앞에 계속된 도전

지역에서 무료 상담 등으로 소일을 하던 그를 정치계로 불러들인 건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였다. 대우조선 투쟁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열정적인 연설을 한 모습이 김 총재의 눈에 띈 것이다. 1988년 노 전 대통령은 김 총재의 공천 제안을 받고 부산 동구에 출마, 민정당 실세인 허삼수씨를 꺾고 제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 정치계에 입문했다. 당시를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재야 몫으로 처음에 남구를 제의 받았는데, '기왕이면 허삼수와 붙겠다'며 동구를 역제의했다. 마침 사람들이 피하던 지역이라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이후 노 전대통령은 국회의 대정부질문, 노동위 등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노동위에서는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초선의원에 지나지 않던 그를 '정치계 스타'로 만든 것은 1988년 5공 청문회였다. 노 전대통령은 '5공비리조사특위'의 청문회 활동에서 '전두환 살인마'를 외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의원 명패를 집어던져 TV 앞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또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 5공실세이자 증인들에 대해 송곳 질문, 날선 추궁을 펼치기도 했다. '청문회 스타' 노무현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그는 계파 줄서기나 대세 편승을 거부한 채 과감히 현실에 도전하는 정치적 소신을 보여줬다. 노 전대통령은 1990년 1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3당 합당에 반대해 정치적 스승인 김영삼 총재의 손을 뿌리치고 당 잔류를 선언하면서, 민주당 창당의 주역이 됐다. 그러나 민자당 합류를 거부한 이후 선거 때마다 낙선을 거듭하는 등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통일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반대 발언중인 노무현 전 대통령

3당합당을 위한 통일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반대 발언중인 노무현 전 대통령ⓒ 민중의소리


1992년 3월 14대 총선에 '꼬마 민주당'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해 허삼수씨와 재대결을 벌였지만 완패했다. 낙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뜻을 함께 하며 1992년 12월의 대선에선 물결유세단 단장으로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다음해인 93년 3월 전당대회에서는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당선되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노 전 대통령은 이 때를 "90년 3당 합당때 여당에 따라갔다면 국회의원이야 세 번, 네 번 하고, 장관도 일찍하고 도지사 시장도 한 번 지냈을지 모르지만 떳떳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적어도 잘못된 정치 풍토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것이 큰 자부심이고 행복"이라고 회고했었다.

노 전 대통령은 1995년 조순 서울시장후보로부터 부시장 러닝메이트를 제안받기도 했지만 이를 고사하고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민자당의 문정수 후보에게 패배,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 노 전대통령은 "부산시민들이 민주당을 탈당하면 뽑아주겠다고 권유했지만 지역주의에 영합하는 일이기에 거부했다"고 밝힌 바 있다.

1995년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야당이 분열했을 때도 노 전대통령은 민주당에 잔류했다. 96년 15대 총선에선 민주당 간판으로 서울 종로구에 도전했으나 다시 실패했다. 이후 국민통합추진회의 활동을 하다가 97년 대선 국면에서 통추 내부의 의견이 '3김청산과 세대교체'를 내건 이인제씨로 분위기가 기울자 노 전 대통령은 김원기, 김정길씨 등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부총재가 됐다. 98년 7월 치러진 '정치 1번지' 종로 보궐선거에서 노무현은 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해 한나라당 정인봉 후보를 꺾고 당선되며 6년 만에 다시 국회의원이 됐다. 국회의원 재선 후 98년 8월의 현대자동차 파업 중재, 99년 삼성자동차 매각 협상 중재 등을 주도하기도 했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선 노 전대통령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종로대신 '지역감정을 극복하겠다'는 황당한(?) 각오 하나로 부산출마를 감행했지만 한나라당에 패했다. 그러나 선거패배에도 불구하고 무모하다시피한 그의 소신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애칭을 만들어냈고,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결성의 단초가 됐다.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된 노 전대통령은 격의 없이 직원들과 이메일 대화를 하는 등 당시로서는 '신선한' 공직활동으로 눈길을 끌었다.

정치계에 불어닥친 '노풍(盧風)'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 출마부터 당선까지의 과정도 드라마틱하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3월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에서 치러진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노풍(盧風)'을 일으키며 이인제씨를 꺾고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됐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파란'이었다. 변변한 조직도 자금도 없었던 그가 국민참여경선제에서 '노란 풍선', '노란 목도리', '희망돼지' 바람을 일으키며 '이인제 대세론'을 무너뜨린 것이다.

16대 대통령선거 유세중인 노무현 전 대통령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지지자들로 부터 희망돼지를 선물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민중의소리


노 전 대통령은 국민이 후원금을 내고 대통령 후보를 지원하는 방식을 공개적으로 요청,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 60억원 이상의 국민성금을 모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 때부터 노 전 대통령에겐 '깨끗하고 청렴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부여됐다. 그해 11월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와 후보단일화를 하는 등 이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대선 전날 정몽준 대표가 노 전 대통령의 명동유세 발언 등을 문제 삼으며 후보 단일화를 철회하는 위기를 맞았지만 특유의 승부수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를 꺾고 48.8%의 지지를 얻어 청와대에 입성했다.

보수와는 갈등의 연속..진보와는 애증관계

그러나 청와대 입성 후 노 전 대통령의 앞 길은 장밋빛이 아니었다. 재임기간 '오락가락'한 행보로 진보와 보수 양쪽세력들로부터 모두 공격받기도 했다. 보수진영으로부턴 '친북좌파', 진보진영으로부턴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보수세력과는 재임기간 내내 대립과 반목의 연속이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검찰 개혁을 화두로 삼았던 노 전 대통령은 당시 검찰 총장보다 후배인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으로 앉히면서부터 검찰과 척을 지기 시작했다. 역대 대통령 처음으로 '대통령과 평검사간 대화' 시간을 가진 자리에선 일부 검사들이 수사 외압 의혹 등을 거론하자 "이쯤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라는 말을 해 유행어로 만들기도 했다. 평검사간 대화 시간 직후 김각영 당시 검찰총장이 참여정부의 검찰 개혁 방향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자진사퇴하면서 참여정부와 검찰과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2004년 3월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이 여소야대 국면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를 걸어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메가톤급 역풍을 불렀다. 4월 총선에서 탄핵을 주도했던 한나라당은 '몰락'했고, 제3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152석이라는 원내과반을 점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 해 5월 헌법재판소의 탄핵안 기각 결정이 나기까지 63일 간 직무정지를 당하기도 했으나 결국 거대 여당을 지원군으로 얻으며 업무에 복귀했다.

고개 숙인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이 5월 1일 새벽 13여시간의 조사를 마치고 귀가하기 위해 검찰청 밖으로 나와 "최선을 다했다"는 짧은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그러나 우리 사회 전 분야에서 이어진 그의 정치 실험은 그에게 '환희'보단 '시련'을 안겨줬다.

2005년 7월 노 전대통령은 '선거 현실론'을 들며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박근혜 전 대표의 '원칙'에 의해 일언지하에 외면당했다. 이 일은 많은 정치적 동지들과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2007년 노 전 대통령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시도에 대해 "나의 자만심이 만들어낸 오류"라며 "아주 뼈아프게 생각한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재보선에서 참패해 의회 과반을 잃고 흔들리던 열린우리당은 결국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참패했고, 노 전 대통령의 국정운영의 동력은 점점 상실돼 갔다.

보수언론들과도 질긴 악연을 자랑한 노 전 대통령이었다. 조선일보는 2004년 3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된 뒤 김대중 칼럼에서 "(노 대통령이) 대통령직에 복귀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고, 류근일 칼럼에선 "노무현 시대는 생각보다 일찍 말기적 증세에 빠지고 있다"고 독설을 했다. 동아일보는 2006년 칼럼에서 "노 대통령은 사회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정치를 시작해 자칭 민주화세력과 운동권 386으로부터 좌파논리를 편식했다"고 주장했다.

청와대도 만만찮은 반격을 가했다. 청와대는 2004년 7월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행정수도 이전비난에 대해 "저주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라"고 비판했고, 2006년 5월엔 부동산 정책 비난에 대해 "불량식품만 욕할 게 아니다. 불량기사 역시 피해를 주게 된다"고 주장했다. 급기야 2006년엔 청와대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대해 취재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들 언론과의 대치는 임기 말 '통합브리핑룸' 건으로 정점에 이르기도 했다.

진보진영과는 '애증'의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과의 첫 번째 갈등은 2003년 대북송금특검이다. 국민의 정부 시절 남북정상회담 당시 현대아산이 북한에 4억달러를 비밀송금했다며 한나라당 등 보수세력들이 대북송금특검을 요구했고, 국민의 정부와의 차별성을 부각하는 것이 필요했던 노 전대통령은 진보진영의 바람을 뒤로 한 채 대북송금특검을 수용해 비난을 사기도 했다.

"국가보안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는 발언으로 인기를 모았지만 결국 국가보안법을 폐지시키는 결단을 내리진 못했고, "반미주의면 어떠냐"면서도 이라크 파병을 했다.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밀어부치다 진보진영으로부터 '배신자'란 욕을 먹기도 했다. 갈등은 한미자유무역협정(FTA)체결에서 정점을 이뤘다. 그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자'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면서까지 한미 FTA 체결의 필요성을 항변했지만, 한미 FTA 강행은 진보진영의 강한 반발을 샀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 이유다. 추락하던 노 전 대통령의 인기는 임기 말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2차 남북정상회담으로 그나마 면을 세웠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잃어버린 10년'을 주장하며 나온 한나라당에게 대권을 넘겨 준 노 전 대통령은 밀짚모자 하나 달랑쓰고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 봉하마을에 내려가 터를 잡았다. 퇴임 후 귀향한 첫 대통령이었다.

"야~기분좋다"는 인사말로 시작된 노 전 대통령의 귀향생활은 역대 대통령들의 퇴임 후 생활과는 달리 낯설지만 신선했다. 오리농법을 이용해 친환경 봉하 오리쌀 농사를 짓고, 봉하마을 앞 화포천 정화운동을 벌이며 생태습지로 되살리려는 노력을 했다. 장군차를 심고, 봉화산 나무 간벌에도 직접 나서 주목받았다. 밀짚모자에 자전거를 타고, 동네 구멍가게서 담배를 태우는 노 전대통령의 털털한 모습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에 충분했다. 봉하마을은 '자연인 노무현'을 보기 위해 몰려든 관광객들로 들끓었고, 노 전 대통령은 하루에 한 번씩 사저 앞으로 나와 관광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담소를 나눴다.

재임 기간에도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기를 즐겨했던 노 전 대통령은 지난해 9월엔 '건전한 토론문화 조성'을 취지로 인터넷 토론 사이트인 '민주주의 2.0'을 열기도 했다.

활짝 웃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활짝 웃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영정사진ⓒ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그러나 고향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는 지난해 12월 형 건평씨가 세종증권 비리에 연루돼 실형을 받자 치명타를 입었다. 건평씨가 구속되면서 노 전 대통령은 "따뜻해지면 돌아오겠다"는 말을 뒤로 하고 사실상 칩거에 들어갔다. 뒤이어 정치인생의 후원자였던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은 것도 노 전 대통령의 도덕성과 청렴한 이미지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달 22일 "이제 저는 민주주의나 진보, 정의를 말할 자격을 잃었다. 더 이상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으며,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저를 여러분이 버리셔야 한다"는 글을 마지막으로 민주주의 2.0를 폐쇄했다.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건호씨가 검찰의 수사를 받았고, 그 자신도 결국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3번 째로 검찰의 '포토라인' 앞에 섰다. 노 전 대통령은 "해도 너무한 정치보복"이라고 반발하면서도 박연차 회장, 강금원 회장 등 줄줄이 구속된 측근들을 보며 큰 심리적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은 검찰이 권양숙 여사를 불러 조사를 진행하기로 예정됐던 23일 새벽 결국 고향마을 봉화산에서 63년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말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그가 사저를 나서기 30분 전 평소 애용하던 컴퓨터에 남긴 마지막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삶은 이렇게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