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nkook's Diary/Photo Essay

추석 명절 , 고향, 그리고 부모님

작은천국 2010. 9. 27. 08:30

추석 명절, 고향  그리고 부모님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자리를 잡은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강산이 한 번 바뀌는 동안 참 많은 것이 변한 듯하다.

무에 그리 바쁜것인지 명절 연휴와 부모님 생신 등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부모님 댁을 찾는다.

 

그러다 보니,,,

완전한 서울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향인 울산 사람도 아닌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서울에서는 지방사람,,, 울산에서는 서울사람...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 싶기도 하다가도 어떤 때는 가끔식 정체성의 혼란을 다소 겪기도 한다.

물론 언어적인 것에서 비롯하는 문화적 차이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칠 순을 몇 해 전에 넘기신 아버지

세월이 세월인지라 부모님의 모습은 한 계절이 지날 때 마다 참 허무하게도 유독 시간이 빨리도 간다는 생각이 들때면 괜시리 목이 콱 막히기도한다.  

 

멀리 떨어져 산다는 이유로 자주 못 뵙는지라 부모님 댁을 방문할 때면 거의 가족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추석 연휴... 모처럼 약수터 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오후에 서울로 올라가야하는 내가 아버지를 따라 나서니 엄마는 피곤하니 그냥 쉬다가 가라고 말리셨지만

추석을  몇 일을 앞두고 갑자기 지병이 악화되어 대학 병원을 수차례 다녀오셨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다행히도 회복되셔서 약수터 정도는 다녀오실 수 있음이 반가워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 성격이 급하셔서 '가자' 할 때 얼른 후다닥 나서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5분을 채 안기다리고 그냥 혼자 먼저 출발 해버리신다.. ㅠ.ㅠ.

예전에도 동네 뒷산에 운동간다길래 따라나선다 말하고 준비하느라 시간이 걸렸더니

혼자 휑~하게 가버리셔서 길도 모르는데 찾아 나섰다 길이 엇갈려 생고생을 했던지라

행여 이번에도 그렇게 될까봐 '가자'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버지!!!! 같이 가요!!!'를 사정없이 외치며 달려나갔다.

 

우리 아버지 여전히 내가 따라 오고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고 동네 텃밭을 돌아 앞만 보고 걸어가신다

 

어~~ 아버지 길도 없는데 어디로 가요? 

 

집 뒤로 새로운 도로가 날 예정이라 각종 먼지나 분진이 날릴 걸 대비해 구조물을 세우고 있는 중인듯하다

하여튼.. 이 사이로 내려다보니 사다리가 있어 일단 사사삭~~

 

그리고 여전히 신경도 안쓰고 성큼 성큼 걸어가신다.

 

사진만 보면 꼭 어디 사막을 걷는 것 처럼 보인다.

 

이렇게 도로가 날 예정이다.

원래 이 곳은 전부 나즈막한 산이 여러 개 있었고 한쪽으로 개간한 밭들이 있는 곳이었는데

혁신도시로 인해 이렇게 개발이 한창이다.

 

사진을 찍고 있다가 아버지가 저만치 가셔서 헐레벌떡~

 

 언덕을 하나 넘고 나니 휑 한 길이 계속 나탄다.

 

이곳에 있던 산들은 원래 소나무가 굉장히 울창하던 곳이었다.

어릴 땐 학교가 끝나면 동네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뛰어나디던 우리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봄이면 쑥캐고 진달래꽃따고 여름이면 망개라고 불리는 완전 새콤하다못해 시큼한 열매를 따 먹기도 했었고 소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었다.

가을이면 억새가 만발해 들판은 금빛 물결이 일렁이던 곳이었다.

무엇보다 그 많던 소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물론 개발도 해야한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어떤 것이 과연 현명한 것인지 늘 고민을 하게한다.

 

이젠 아버지도 많이 늙으셨다.. 

아버지 특유의 걸음걸이를 보니 웬지 시큰한다.

 

이런 날 빠질 수 없는 인증샷~~

아버지 사진 한장 찍어 주세요!!!

포즈를 취하고 후다닥 달려왔더니 줌이 끝까지 나와있어 너무 가깝게보인다고 하셔서

렌즈를 돌리시라 했더니 애꿎은 후드를 돌리셨다...

양쪽 모서리로 보이는 건 후드다.. ㅠ.ㅠ  흠~~ 그래도 이만하면 꽤 잘 찍으셨다.

 

캬 ~~ 전봇대만 남기고 어찌 저리도 이쁘게 깎아놓았을까?

 

이쪽은 돌산인가 보다... 이 부분만 제외하고 길을 내어 놓았다.

 

 

동네로 접어드니 할머니 한 분도 약수터에 가신다고 이렇게 유머차에 물통을 싣고 가신다.

여신 사진 찍고 있는 나를 보고 처자는 어디서 왔냐며 신기해하셨다.

생각보다 고운 얼굴의 할머니 사진을 한장 찍겠다고 했더니 수줍게 부끄럽다며 얼굴을 가리셨다.

그러면서..내가 아버지 따라 약수터 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아이고.... 물 뜨러 가면서도 사진을 찍냐며...' 한마디 거드셨다.

 

한참을 가다보니 아니 이건 또 뭔고...

 

이윤 즉선, 공사가 한참 진행중이었는데 보시다시피 유적이 발견된 것이었다.

곳곳엔 이렇게 고대인의 흔적이 남겨져있다.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이제 다 이전을 했나보다.

저 멀리 시가지가 발 아래로 보인다.

 

 비닐 하우스에 달린 문도 새삼스럽다.

 

우리 아버지 여전히 뒤도 한번 안 돌아보신다.. ㅎ

 

대부분 이주하고 이 집과 더 뒤로 몇 가구만이 남았다.

예전엔 이곳까지(동네 이름이 영 기억이 안나 아버지께물으니 '내약사'란다) 오려면

족히 산을 두어개 넘어 한 시간은 걸어야했는데 보시다 시피 흙길이긴하지만 도로가 나있어서 30분 이 조금 안걸려 도착했다.

저 집 너머 보이는 파란색으로 보이는 곳이 약수터이다.

 

이 곳은 아직 안변하고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더없이 반가웠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때만 해도 수리시설등의 기반 시설이 부족해 이곳은 아니지만 이 동네가 시작되는 곳(약사동)에  

빨래터가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빨래터에 가서 빨래를 하고 왔었다.

 여기에서 시작된 개울이 점점 넓어져 아래쪽엔 제법 넓은 폭을 가진 냇가가 되어 있어

이 동네를 비롯해 약사동에 살던 친구들은 비만 오면 다리가 물에 잠겨 건널수가 없기에 천재지변으로 인한 결석이 허용되었다.

어린 맘에 냇가에 물이 빠질때까지 며칠 씩 학교를 오지 않는 친구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사실,,, 우리집은 초등학교에서 2분 거리도 안되니 그 어떤 경우도 천재지변으로 결석할 일은 죽었다 꺠어나도 없기에 몹시도 부러웠다.

게다가... 학교 결석은 죽어도 안된다며 감기 몸살이 심해 몸져 누워도 학교에서 아파야한다며

아예 엄마가 나를 업고 학교 양호실에 뉘어놓고 하루 종일 같이 있기도 했었으니

정말... 결석 한 번 해 보는게 소원인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 6년 개근상을 받았지만... 이건 내가 받을게 아니라 우리 엄마가 받아야 마땅한 상이었다.

그런데 딱히 학교를 안 간다고해서 할 일이 있는것도 아닌데 어쨋든 ....

 

약간의 언덕길.. 숨차다..

 

어제 비가 온 덕분인지 계곡엔 물이 쉴새없이 졸졸졸~ 

 

이 냇가엔 거머리가 많아서 어릴적 이곳에서 놀다가 피를 빨린 기억이 ㅠ.ㅠ 

 

날이 더워 반바지를 입고 나올까 하다가 긴바지를 입길 잘했다.

억새에 잘 못 스치면 완전 따.갑.다.

 

메밀꽃이 피었구나~~

 

 

야호~!!!   약수터다..

 

물을 다 받고 숨을 돌리고 나니 할머니가 오신다.  할머니 유머차 끌어드리고 물통에 물도 받아드리고

 

잠깐 쉬고 우리 아버지는 또 혼자서 먼저 휘리릭 출발하셨다.

 

고구마 밭도 지나고

 

뒤늦게 심어놓은 가을감자밭도 지나고

 

겨울 김장철을 대비해 심어 놓은 배추는 지금 김장을 해도 좋을 만큼 튼실히 자랐다.

 

올 때 흙길이 너무 질어서 다른 길로 내려가는데 또 뭔가 형체를 보이며 덮어 씌웠으니...

 

 아버지 말씀으론 '성(城)'의 모습이 발견되어 이곳도 역시 발굴중이라고 한다.

 

고향집은' 병영'은 그 이름에서 부터 알 수 있듯이 '경상도 좌 병마절도 영 이 설치되어 있는 곳' 의 준말로

왜의 침입을 막기위해 세종 19년(1437년) 에 붙은 지명으로 아직도 병영성이 남아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한창 복원중에 있다.

따라서 아마 저 곳에 보이는 흔적도 지금 남아 있는 성의 일부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한 가지는 희안하게 정작 주소에는 '병영' 이 없다.

병영에는 남외동, 북동, 서동, 동동의 네개의 구역이 나누어져있는데 울산시 중구 서동, 중구 북동,,, 뭐 이렇게 사용한다.

그런데.. 서동 삽니다 하면 거기가 어디냐고 재차 묻고 다시  '병영'에 삽니다 해야 아신다..

흡사,, 서울에서도 '영동' 이 지명에서만 남아있고 행정명으로는 논현동, 학동..으로 표기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쨋거나...옛날에는 밭이고 논이던 지금의 시내인 삼산동 옥교동 보다 이곳이 중심지역이었다.

그리고 우리집은 부모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고고조할아버지, 고고고고조 할아버지.... 더더더.

족히 100년은 넘게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초등 학교 땐  이사 가고 전학도 해보고... 다 부질없는 바램이었지만..

 

오호호.. 하류의 하천에도 백로가 보인다.

그런데 얘네들은 이렇게 흐르는 물에 발 담그고 꼿꼿이 서있는게 생활인가?

동천강에 갔을때도 이러고 서 있는 녀석들을 많이 봤는데..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야하는데.. 아버지 힘드셨던게다.  온통 땀으로 흥건하게 젖으셨다.

며칠전 심하게 아프셨던 분이라고 하면 거짓말처럼 느껴질만큼 어른들의 건강은 장담을 못하겠다.

이렇게 같이 산책도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다음번에 집에 가게되면 아버지와 좀 더 멀리 있는 동네 뒷산을 다녀와야겠다.

 

분명 사진찍자고 하면 싫다고 하실께 뻔하기에 요렇게 겨우 한 장 남겼다.

내가 본격적으로 나만의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윤미네 집' 같은 컨셉으로 부모님의 일상의 모습을 찍어두고 싶었다.

작년부터 집에 갈때마다 카메라를 가지고 가긴 하는데 부모님 모습을 찍는게 여간 힘든게 아니다.

일단 두 분이 늙은 모습이 싫다며 사진찍는 걸 극구 사양하심에도 불구하고

손도 찍고 발도 찍고 일하는 모습도 줄창 찍어대니

참다가 참다가 결국 '일하는데 글거친다(방해된다)' 는 소리에 그만 카메라를 놓아야했다.

정말 작픔사진처럼 찍어보고 싶은데... 그리고 부모님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데

아~~~ 내 마음도 몰라주고 ㅠ.ㅠ  하여튼 몇 번 잔소리 듣다가 결국 접었다 ㅠ.ㅠ

 

동네 어귀엔 어느 집에서 심어놓은 대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약 한시간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동생은 혼자 부모님 차까지 세차를 하느라 땀을 뻘뻘~

 

 초등학교 때 부모님, 동생과 함께

그레고리 펙을 능가하는 잘 생긴 외모를 가지셨던 아버지도 이젠 할아버지가 되셨다.

 언젠가 한 번은 집에 전화를 했는데 아버지가 전화를 받으시길래

'아버지세요? 엄마는요? '  했더니 너희는 다 엄마만 찾냐며 서운해하셨다.

그래서 지금은 일부러 아버지와 따로 통화를 하기도 하고 엄마와 통화하면 아버지를 바꿔달라고도 한다.

 

올 해 봄 모든 가족들이 모여 해외여행을 가자고 했었건만 부모님도 바쁘시고 각자 서로의 일정이 맞지 않아

가을로 미뤘는데 아버지의 지병이 악화되셔서 당분간 비행기는 타기 힘들 듯하고 장거리 여행도 이젠 무리일듯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밀어부칠걸 그랬다며 오빠와 때늦은 후회를 해야했다.

작년부터 좀 좋아진다 싶어도 계절이 바뀔 때면 증세가 악화되어 입.퇴원을 반복하시고 계신다.  

부모님과도 헤어질 날이 나에게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부모님 건강하게 오래 오래 곁에 머물러 주세요

 

내 꿈을 찾기 위해 부모님 품을 떠나 있지만 자주 찾아 뵙지도 못하고

 아직 끝내야 할 숙제를 못마치고 있어 부모님께 걱정만 끼쳐드리고 있기에

불효한 마음 한 가득 앉고 서울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그래도 사랑하는 가족들 떄문에 늘 마음 든든한 작은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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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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