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s like traveling/Gyeongsang

[통영] 한국의 피카소를 만날 수 있는 전혁림미술관

작은천국 2010. 9. 3. 09:00

 

한국의 피카소를 만날 수 있는 전혁림 미술관

 

2010.9.4 다음 블로그 베스트에 소개되었습니다.

 

 

 

 

경남 통영을 무대로 현역 최고령의 화가로 활동하던 전혁림 화백(향년 94세) 이 지난 2010년 5월 노환으로 별세했다.
1916년 통영에서 태어난 전혁림 화백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 상황 탓에 미술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 

통영 가진 원초적인 느낌을 코발트 블루를 이용해 표현했을 뿐 아니라

한국 고유의 오방색을 자유자재로 사용했기에 색채의 마술사 또는 바다의 화가로 불린다.  

<작업중인 故 전혁림 화백 생전의 모습, 전혁림 미술관 홈페이지 발췌>

 

 

아마도 탁월한 색채와 조형감각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오면서

그의 나이 아흔이 넘도록 끊임없이 작품활동을 해 온 故 전혁림 화백은 흔히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운다.

피카소의 게로니카를 보았을 때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故 전혁림 화백의 그림이었다.

게로니카를 보니 왜 故 전혁림 화백을 한국의 피카소라 부르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2009년 12월  성소피아 미술관 , 피카소 게로니카

 

내가 故 전혁림 화백의 그림을 직접 보게 된 것은 지난 2006년 창원 도립 미술관에서  마산 MBC 창사 37주년 전혁림화백 특별초대전이 열렸을 때였다.

코발트 블루를 이용해 바다의 풍경을 그리는 화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 그림을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갤러리에 들어섰을 때 넓디 넓은 벽면을 하나 온통 코발트 블루로 채운 故 전혁림 화백의 그림,

파란색이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에 한참을 넋을 잃고 쳐다만 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코발트 불루가 가진 계조의 차이에서 보여주는 묘한 느낌은 그렇게 나를 사로잡았다.

 

파란색은 색채심리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상실된 마음을 치유하는 색이라고 한다.

故 전혁림 화백의 초기 작품에서 코발트블루 계열의 색을 많이 사용했는데

혼자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화가가 되기까지 어려웠던 과정, 그리고 열학한 환경들에 대한 자신만의 해결방식이 아니었던가 감히 짐작해본다.

 

혹시 전혁림 미술관에서 그 작품을 볼 수 있을까 기대를 했었는데 소장하고 있지 않아서 다소 아쉬웠다.  

 

 

故 전혁림 화백은

“색채의 마술사” 또는 “바다의 화가”로 불리는 전혁림화백은

한국적 색면추상의 선구자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조형의식을 토대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왔다.

연륜(1916년생)이 말해주듯이 현대사의 격동기와 다양한 문화 변동을 살아낸 몇 안 남은 이 시대의 위대한 원로 대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부산미술전(1938년)에 '신화적 해변', '월광(月光)' 등의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가기 시작하였다.

지방작가들의 흔한 보수적 성향에 비하여 거의 유일하게 그는 현대미술의 전위적(前衛的) 조형 방법으로서 전통을 표현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로 인해 실험의욕이 자기 영역의 확대를 시도하여 발랄한 생명감의 발산에 빠져든다. 그는 광복의 감격과 곧이어 닥친 여러 시련속에서도 유치환, 윤이상,

김춘수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 를 창립(1945)했다. 6.25 이후 부산에서의 유랑 생활을 거쳐 국전에 특선했다. 피난지 부산의 화단은 전혁림을 화가로서의

토대를 굳혀주었다. 1950년대 앵포르멜이 주류를 이루는 비정형 회화를 부산에 최초로 선보이기도 한 부산 근현대 미술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며

영남지역 비구상회화의 근원도 바로 전혁림 화백이다.

"중앙"화단과의 거리를 두고 미술계의 폐단인 학연 등에 연연하지도  일시적인 유행에 타협하지도 않으며 고향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와 풍경을

이룩한 이 노대가의 작품은 현재 망백(望百)을 지난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비롭게도 나날이 성숙해지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로 많은 예술인들을 인도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에도 그의 탐구혼은 쉴 줄 모르고 또 다른 차원의 조형 세계를 모색하고 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과 미의 탐구,

예술에 대한 열정이 오늘도 그를 젊게 불태우고 있다.  - 전력림 미술관 홈페이제서 발췌-

 

1933년 통영수산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38년 재야전인 부산미술전에 처음 출품했으며 2년 뒤 일본화단을 둘러보고 귀국했다.

1950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첫 개인전을 여는 등 1950년대에는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회화 이외의 매체에도 관심을 보여 도예전·목조전을 열었다. 그는 반세기에 걸친 화력을 통해 추상과 구상의 경계영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표현영역을 확대해왔다. 자유로운 구성과 형태, 향토성 짙은 색채의 초기 구상회화는 후기에 들어오면서 점차 추상화되었는데

단순화와 응집화를 통해 한국적 미감을 밀도 있게 표출해내고 있다. 1962년 부산시 문화상, 1984년 충무시 문화상을 받았으며,

1984년 국전 심사위원을 지냈다.  -브래태니커 사전 발췌 -

  

 

 

 

故 전혁림 화백의 작품을 볼 수 있는 통영의 명소 전혁림 미술관은 통영의 미륵도 용화사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이 미술관은 화백이 1975년부터 30년 가까이 생활하던 집을 헐고 새로운 창조의 공간으로 신축한 건물로써 2003년 5월 11일 개관하였다.

'가장 통영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개념을 가지셨던 전 화백은 바다의 길을 안내하는 등대와

 전통사찰의 중요 요소인 탑의 형태를 접목하여 건물의 외형을 표현하였다.

보시다시피 외벽은 전화백의 작품 다섯점과 아들 영근의 작품 다섯점을 선택하여 20x20cm 의 세라믹타일로 제작,

7,500여장의 조합으로, 통영의 이미지와 화백의 예술적 이미지를 표현하였으며,

3층 전면의 벽은 화백의 1992년의 작품, 창(Window)을 타일조합으로 재구성한 가로10X세로3 미터의 대형 벽화로 구성되었다.  

 

미술관 내부의 모습

 

故  전혁림화백은

초기에는 구상과 추상의 중간 지대의 화풍인 반 추상적 표현을 구사했으며 코발트블루 계열의 색을 많이 사용했으며

작품의 주제는 민화에 등장하는 한국의 전통적 기물이나 두루미, 항국의 풍경 등이다.

 

중기에는 추상적 풍경과 함께 도자기와의 접목, 목조각과의 접 목 등 다양한 실험을 통한 탐구적인 작품을 제작하였고 당시의 유화에는 쓰이지 않았던

한국의 전통색채인 오방색을 실험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작가로서의 분명한 작품세계를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후기에는 초기작품에서 볼 수 있는 민화적 미감과 중기에서 시도했던 원색의 강력한 대비로서 저의 단청이나 전통 보자기 옛 장신구 등에서 느낄 수 있는

 고유의 민족정서를 재해석하여 현대화하는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故  전혁림 화백의 작품들

 기둥과 목어 ,2000

 

 

 민화적 풍물도, 2009

 

단순한 구성과 오방색으로 표현되는 색채감각은 동화적 순수한 환상감 마저 느끼게한다.

 

 

 

왼쪽부터 사원으로부터(2006), 정물(2006), 하늘과 바다(2006)

목조각으로 실제 작품을 제작하기전에 이렇게 스피로품으로 만든 에스키스 작품으로 미리 스티로폼으로 만들어 본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부산에 있은 대한 도자기 회사에서 7년가량 도예연구를 하셨다고 한다.

이때 도자기 그림이라는 또 다른 표현방법을 찾아 화법을 평면에서 입체로 확대되었고 그 이후 꾸준히 도자기 작품을 선보이셨다.

모란(1965), 청색노을(1962), 산수도(1965)

 

 故 전혁림 화백은 2000년대 들어 재조명되기 시작해 2002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돼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고

2005년에는 경기 용인의 이영미술관에서 '구십, 아직은 젊다' 전을 열어 신작을 선보이는 등 말년에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2005년 전시 때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전시 관람 후 1천호(가로 7m, 세로 2.8m) 크기의 '통영항' 그림을 구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그림은 노 대통령 재직 시절 외국 귀빈들을 접대하는 청와대 인왕홀을 장식했다.

 물론 아직까지 이 그림이 청와대에 걸려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목안이 있는 정물(1967)

  

화조도(1949)

 

 

 

전시실을 둘러보고 아트숍을 지나 외부로 나가 건물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타일을 눈여겨보았다.

정면에서 보이는 타일 장식외에도 건물 전면을 이렇게 타일 작업이 되어 있었다.

故 전혁림 화백의 아들이신 전영근 화백의 타일 작품

꽃을 입체감있게 세라믹 작품으로 표현했는데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라고 한다.

 

외벽 곳곳은 통영의 아름다운 모습이 세라믹작품으로 표현되어 한쪽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전영근 화백이 세라믹으로 꾸민 외벽도 하나의 작품을 보는 듯하다.  

 

전혁림 미술관을 운영하고 계시는 故 전혁림 화백의 아들 전영근 화가

내가 이 곳을 방문했을 2010년 3월에는 전혁림 화백께서 살아 계실 때라

미술관 옆 건물 1층에 있는 화백의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혹시 뵐 수 있을까 생각했으나

이때도 건강은 좋지 않으셔서 만나지는 못하고 대신 미술관 관장이자 화가이신 전영근님과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눌수 있었다.

 

故 전혁림 화백은 자신의 아버지이기전에 존경하는 예술계의 선배로서의 마음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으셨다.

그래서 지난 2003년  자신의 아버지가 중앙을 거부하고 지역에서 자리잡아 고집스럽게 작업을 하셨듯이

故 전혁림 화백의 예술혼을 잇고 지역사회에 예술문화를 환원하기위해 이 곳에 미술관을 건립하셨다.

 

그러나 서울도 아닌 지 방 소도시 골목에 위치한 전혁림 미술관의 운영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이 곳이 무료개방이기에 더욱 운영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아버지인 故 전혁림 화백의 예술을 널리 알리고 지역민들에게 쉽게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높이기위해 고집을 꺽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전혁림 화백은 이 곳에 안 계신다. 그러나 故 전혁림 화백이 직접 작업을 했던 현장을 전시길로 보존해 개관할 예정이며

도자기를 직접 생산 할 수 있는 설비를 완비해 문화상품의 생산성을 높여 미술관의 자생력을 키워가고 있는 중이다.

 

오랜 대화끝에 아들의 입장에서 보는 전혁림은 화백은 어떤가를 여쭈었는데 이런 대답을 해 주셨다.  

나이가 젊었을 때는 미술에만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를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다. 

그러나 자신도 운명처럼 아버지와 같은 화가의 길을 걷게되었고 아버지가 걸어간 미래로의 창조적인 예술의 길에 대해 어느순간 자신도 매력을 갖게되었다. 그리고 아흔이 넘는 연세에도 아직 젊다며 작품활동을 해내세고 자꾸 좋은 그림이 나와야 예술가에 미래가 있다는 말씀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전혁림 화백은 아버지이자 스승이자 같은 길을 걷는 동료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 잠깐 물기가 스친다 싶은 건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아마 이제 다시 자리에서 못 일어나실것 같다는 그의 이야기에서

아버지이자 스승이자 같은 길을 걷던 동료와의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통영에서 태어나 한 편생 고향을 지킨 화가

그림을 사랑했고  가족을 사랑했고 늘 아직은 젊다며 작업을 멈추지 않으셨고

그 무엇보다 더 높은 예술혼을 지니셨던 故 전혁림 화백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지난 2005년 그의 나의 아흔에 "90, 아직은 젊다" (이영미술관) 당시  인터뷰 내용을 덧붙인다.

 

정규 미술교육 받은적없이 홀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고 23세의 어린 나이에 부산 미술전에 입선,

통영이 낳은 윤이상, 김춘수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서 활동을 했다.

" 날마다 탁주집에 모여 앉았지, 시 얘기 음악얘기 그림얘기. 사실 그런 얘끼보다 오히려 나날이 먹고 사는 얘기를 많이 했지요

저 세상에 가면 나는 맨 먼저 그이들을 찾아가지고 여러분이 남긴 음악과 시를 내가 열심히 화폭에 옮기다 왔다 하고 싶어요'

 

전화백은 "끼니가 없어도 물감만은 당시로선 최고급인 일제 분포도 제품을 썼다'고 했다.

값비싼 일본 미술잡지도 꼬박꼬박 사 봤다. 참다 못한 부인이 전 화백의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여자가 달겨드니 우짤 도리가 없데, 때릴 수도 없고, 내 하도 기가 막히서 나중에 물어봤지,

' 니 그런거는 어데서 배웠나'하고 처가 '주위에서 이러라고 가르쳐 줍디다' 하데요

전 화백은 '그래도 처는 평생 단 한번도 내게 그림을 그리지 말라' 소리를 안 했다고 했다.

그는 투병중인 부인에게 '내 보다 먼저 가지마라' 말하곤 했다. 부인의 상여가 나가던 날 노인은 지인들에게 목메어 중얼거렸다

'살아만 있으면 내 눈에 얼마나 이쁘겠나, 작기대 집고 걸어 댕긴다 캐도, 그것도 못해 누워만 있다해도 얼매나 이쁘겠나 "

그는 1953년 국전에서 특선한 그림을 10만원에 팔아 부인에게 양산을 사줬다.

처에게 뭘 사준건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그는 일흔을 넘겨서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다.

남들이 은퇴하는 나이에 생애 처음으로 그림을 팔아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청년시절부터 나는 된다, 언젠가 반드시 된다는 자신가 희망이 있었기에 거지가 되어도 그림을 그리고 말겠다는 각오가 있었다고 한다.

예술이라는 것은 '선생' 이 없어요. 배워서 하는 게 예술이 아니라는 말이오. 힘들게 살았지요 그러나 돌이키면 딱히 슬픈 것도 없어 인생이 그런거니

다만 가난 떄문에 외아들을 대학에 보내지 못한 것은 한스럽지요'

 

 

 

※  전혁림 미술관 홈페이지 http://www.jeonhyucklim.org/main.htm

     1층 : 전혁림 화백 관련자료와 2000년대 이후 작품전시

     2층 : 전혁림 화백 과년자료와 50년대~90년대 사이 작품 전시

     3층 : 전영근 화백 작품전시 80년대 ~200년대

 

 찾아가기 :  북통영 IC → 산복도로 통영대교방면, 통영대교건너 도남관광단지 방면 → (봉평동) 용화사 방면

  

평   일 : 10:00 ~ 17:30 (하절기 :3월 ~ 10월)

            10:00 ~ 17:00 (동절기: 11월 ~ 다음해 2월)

휴관일 : 1월 1일, 구정, 매주 월요일, 화요일

무료관람 

 

단체 관람일 경우 사전에 미술관에 통보하시면 관람편의를

제공하며, 어린이 및 학생들일 경우

보호자나 지도교사의 동반을 부탁드립니다.

 

일반관람 및 단체관람 문의 : (055) 645-7349

홍보, 행사, 기획전 문의     : (055) 643-8825, 011-551-3408

미술관 쇼핑몰 문의           : (055) 645-7349. 010-3069-0105

E-mail : thejhlmoa@hotmail.com

Fax     : (055) 643-8825

주   소 : 우)650-140 경남 통영시 봉평동 189-2번지

 

 

Posted by 작은천국~☆

 

 

 

 

 

 

OLPOST구독을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이 유익하셨다면 최신글과 인기글 숫자에 버튼 누르는 당신은 센스쟁이 우훗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