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1968 열아홉 청년, 음악 하나에 인생을 걸다
중학시절 우연히 손에 잡은 형의 기타는 학창시절 내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상하이 트위스트> <파이프라인> <불독> 등 벤처스 넘버들을 손끝이 짓무르도록 연습하고
집안 몰래 음악학원에 다니며 본격적인 기타 수학을 하던 그는 1968년 2월, 경동고 졸업식을 앞둔 어느날 친구들과 함께 집을 나왔다. 음악인을 딴따라 라고 부르던 대중문화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그 때, 무작정 음악이 하고 싶어 집을 뛰쳐 나온 청년의 음악을 향한 첫걸음은 그렇게 뜨겁고 절박한 것이었다.
1976 성공, 짧고 화려한 빛과 그림자
1976년 발매된 앨범에 수록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미8군 무대에서 실력을 쌓아가던 무명의 조용필을 유명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달콤한 성공의 시간도 잠시, 유신아래 반차제 포크, 록가수들에 대한 탄압의 도구였던 대마초사범 검거령은 다시 시작된 기나긴 절망의 시간들을 그는 음악적 발전의 계기로 삼았다. 내장산, 속리산 등지를 돌며 판소리를 통해 목소리를 트는 수련을 하였고, 어두운 연습실에서 완벽한 음악적 소양을 쌓기 위한 훈련을 거듭했다. 오명을 벗고 다시 일어나겠다는 오기와 자존심으로 버틴 눈물의 시간이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1980 마침내 가장 높이, 가장 및나는 별이 되다.
드라마틱한 재기를 도운 그녀, 창밖의 여자
대마초 사건으로 음악활동이 금지되었던 가수들에게 해금조치가 내려지며 그가 다시 돌아왔다.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로 처음 전파를 탄 자작곡 "창박의 여자"와 함께였다.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는 특유의 절창화 파격적인 멜로디는 당시 대중들의 억눌린 시대적 암울함을 표출시키는 카타르시스 역할을 했고, 함꼐 발표된 "단발머리"의 독특한 경쾌함은 새로운 시대를 강망하는 대중의 기대와 부합하여 조용필을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를 지배하는 유일한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1984 비상, 국경을 넘어 더 넓은 무대로
68년 데뷔 후부터 십 수년간 축적해 온 그의 음악적 역량은 발라드, 록, 트로트, 민요, 동요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완성도 높은 노래들도 발표되며 유치원생부터 할아버지까지 전 세대에 걸친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대형쇼의 휘날레는 항상 조용필이 장식했고 매해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에서도
그의 이름은 항상 마지막에 불려졌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어 보이던 가황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보수적인 국내와는 달리 세계적인 뮤지션들의 교류가 활발하던 대중 음악의 빅 마켓,
일본무대가 그것이다. '소름끼치는 혼의 목소리, 조용필' 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시작한 일본 내 음악활동은
90년대 초반까지 600만 여장의 음반판매, 3회의 골든 디스크상 수상, 한국인 최초 NHK 홍백전 참가 등
큰 성과를 거두며 지속되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한국어로 흥얼거리고 "한오백년"에 눈물짓던 이 시기의 많은 일본 팬들은현재까지도 그의 음악을 듣기 위해 현해탄 넘어 한국의 공연장을 찾고 있다.
1990년 천상의 별, 지상의 무대를 선택하다
1990년 소속 음바사와의 계약에서 자유로워진 조용필은 이제 '하고 싶은 음악'을 독립적으로 수행할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 그 해 나온 12집 앨범 자켓에 '90 vol.1' 이라고 표기함으로써 90년대의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가겠다는 자의적 의지를 천명한 그는 TV등 방송매체를 떠나 라이브 공연장을 음악활동의 주무대로
삼겠다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리게 된다. 공연문화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당시 대중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익숙하고 편안한 방송매체를 스스로 떠나겠다는 어찌보면 무모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의 선택은
한동안 그를 외롭게 했다. 이제 조용필을 TV에서 볼 수 없게 된 대중들은 어느새 그를 잊기 시작했고,
전설의 수퍼스타는 한동안한산한 객석을 바라보며 노래해야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시기는 80년대 조용필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스타가 아닌 뮤지션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내공을 다지는 시간이 되었다.
좋은 공연을 만들기 위한 그의 욕심은 세트, 음향, 조명 등 공연을 구성하는 모든 시스템을 진화시켰고,
수준 높은 그의 공연은 사람들로 하여금 TV를 끄고 공연장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가 원했던 대로 방송국 무대라는 공간이 주는 한계와는 상관없이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노래와 그가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 서로 공존하는
최상의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2003 그를 놓지 않는 고독, 그가 놓지 못하는 음악.......
누구 힘이 더 셀까
음악 인생 45주년을 맞이하던 해인 2003년 1월, 조용필은 유일한 가족인 아내를 잃었다.
8월엔 실험정신 가득한 새로운 음반이 5년여 만에 발매되었고,
35주년 기념공연으로 기획된 잠실 메인스타디움 공연의 전 좌석이 공연 한 달 여 전에 매진되는 기록이
세워졌다. 완벽한 공연을 위해 수 개월 동안 준비한 많은 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당일 쏟아진 야속한
비는 그러나 비를 맞으면서도 꼼짝않고 조용필의 노래를 들어준 4만 5천여 관객들로 인해
오히려 35주년을 축복하는 아주 특별한 하늘의 선물이 되었다.
어둡게 밝게 가볍게 혹은 무겁게 이어지는 그의 노래처럼 슬픔과 환희는 그의 삶에도 이렇게 예외없이
교차한다. 한없는 고독과 맞닿아 있는 찬란한 영광의 시간....
끝없는 고독마저 그에겐 음악을 위한 무한의 에너지로 바뀌는 것일까?
2007 나는 조용필이다
2004년 여름 속초에서 개최된 제1회 Korea Music Festival을 축하하는 조용필 공연의 타이틀이었던
'나는 조용필이다'는 40여년 한 길을 걸어온 조용필표 자신감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그는 1968년 데뷔 이래 정규앨범 18장을 통해 발표한 180여곡의 노래 중 90여곡을 직접 만든 싱어송라이터이자 지금도 신곡을 준비하는 현역의 뮤지션이다.
전축, 카세트 기기 보급대수가 백만이 채 안되던 80년대 초 백만여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똑같은
레코드 한 장을 사게 만든 장본인이며, 99년부터 7년간 63회 지속된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 공연을
전회 매진시키며 16만여 관객을 불러 모으는 것으로 라이브 공연에 대한 집념을 성공적으로 입증해 낸
신화의 주인공이다. 잠실 메인스타디움의 4만5천 객석을 단독으로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음악인이다.
대학교수의 차 안에서, 들일하는 촌부의 막걸리 한 사발 안에서, 또 라디오에서 무심코 들리는 그의
노래들을 지난 30여년간 함께 흥얼거렸던 평범한 이 시대의 대중 안에서 21세기인 오늘도 여전히
마주치는 그 어떤 수식어로도 충분치 않은 그는....
대한민국의 조용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