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nkook's Diary/Photo Essay

가랑잎 구르는 소리

작은천국 2008. 11. 14. 22:57

 

 

 

요즘 산길에는 가랑잎이 수북이 쌓여있다.

올가을은 가뭄이 심해 물든 나뭇잎들이 이내 이울다가
서릿바람에 휘날리며 낙엽이 되고 말았다.
여기저기 지천으로 널려 있는 가랑잎을 밞으면서 산길을
거니노라면 세월의 덧없음을 새삼스레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은 오는것이 아니라 가는것이라는 말에 고객가 끄덕거려진다.
여름날 무성하던 잎들이 가을 바람에 시름시름 앓다가 낙하하여
땅위에 뒹굴고 있는 모습을 대할 떄, 계절의 질서와 함께 뿌리로
돌아가는 생명의 실상을 엿보는 것 같다.

뜰에 서 있는 후박나무와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는 소리에
나는 번번히 사람의 발소리인가 싶어 귀를 모으곤 했었다.
'뚝'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문득,
이 순간에 누군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순간순간이 우주 생명의 바다에서 보면,
탄생과 죽음의 고리로 이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 생명의 탄생은 그 순간부터 죽음으로 이어지고 한 목숨의
죽음은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변하거나 죽지 않고 언제까지고 한결같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한때일뿐
우리에게 주어진 그 한때를 어떻게 사느냐에 의해서 삶의 양상은
천태만상으로 나타난다.
.....
숲은 나목이 늘어가고 있다. 응달에는 빈 가지만 앙상하고
양지쪽과 물기가 있는 골짜기에는 아직도 매달린 잎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무서리가 내리고 나면 질 것은 다 지고 말것이다.
때가 지나도 떨어질 줄 모르고 매달려 있는 잎은 보기가 민망스럽다
때가 되면 미련없이 산뜻하게 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빈 자리에 새봄의 움이 틀 것이다.
꽃은 필 때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질 때도 또한 아름다워야 한다
왜냐하면 지는 꽃도 또한 꽃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생의 종말로만 생각한다면 막막하다
그러나 죽음을 새로운 생의 시작으로 볼줄안다면 생명의 질서인
죽음앞에 보다 담담해질것이다.
다된 생에 연연한 죽음은 추하게 보여 한 생애의 여운이 남지 않는다
뜰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가랑잎도 하루 이틀 지나면
너절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다
날이 밝으면 말끔히 쓸어내어 찬 그늘이 내리는 빈 뜰을 바라보고싶다

1988.11.22
법정스님 텅빈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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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맨 뒷편의 표지를 보니 1991년 10월 9일 한글날로 시작하는
짧은 책에 대한 감상과 그날의 느낌이 적혀있다.
오래된 책장속에 발견한 오래된 책의 뒷편에 적힌 시간으로 인해
나는 어느새 1991년의 그날로 가고 있다.
은행에 우연히 들른 고객이 내가 처리해 준 일로 너무 감사하다며
법정 스님의 텅빈충만이라는 책을 선물로 주고 갔다..
이 오래된 책에 군데군데 형광펜으로 색칠자구이 선명하게 아직도 남아있는것을 보니 14년의 시간도 그리 오랜기간은 아닌듯하다.
밑줄자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 강렬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 오래된 책이 시골집 책장 구석에 내몰려 있는 걸
우연히 법정이란 단어가 눈에 띄어 가지고 왔는데
1판 33쇄의 이 책은 샘터사에서 발간하고 가격\3,500이다.
풋.... 그러고 보니 안 변한듯 하면서도 많은 것이 변한것같다.
그때는 하얀 종이였을 책도 이젠 인쇄지도 누렇게 변했고
오래묵은 책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도 난다.

가랑잎 구르는 소리가 너무 정겨운 가을이다.
오래된 책에서 나는 구수한 냄새가 너무 좋고
기회가 된다면 가까운 지인들과 낙엽을 밟아보고도 싶고
아님 혼자만의 고즈늑한 가을여행을 떠나보고도 싶다..
생각이 깊어지는 가을....
십사년의 시간은 책의 가격도 곱하기 두배로 올려놓았고
종이의 색깔도 누렇게 변해놓았지만
아주 옛날 형광펜을 칠해가면서 읽던 그때의 그 맘만은
아직 여전한것 같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떄, 그 한때 때문에 인생의 너무 많은
무게에 눌려 많은 이들의 천태만상을 보게되고
나 또한 그 천태만상의 군락속에 한때를 살아가고 있다.

2005년 10월 31일 10월의 마지막날..
오랜묵은 책의 구수한 냄새와 진한 커피향기와
저녁 물안개에 묻어오는 약간의 습기속에
가랑잎 구르는 소리가 가슴을 저미는 이 늦가을속에
나의 '한 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다...